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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이는 순국열사 윤형숙(이명 윤안정엽, 윤혈녀, 1900.9.13.~1950.9.28.)의 무덤 묘비석에 새겨진 글귀다. 지난 17일 오후 2시에 찾은 전남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마을 입구에 있는 윤형숙 열사의 무덤은 2차선 도로 옆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는 양지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
▲ 윤형숙 1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
ⓒ 윤치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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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내려간 기자에게 이날 윤형숙 열사의 무덤을 안내한 이는 윤 열사의 조카 윤치홍 (77)씨 내외였다. 윤치홍씨는 윤형숙 열사의 작은 아버지 윤자환(尹滋換,1896 ~ 1949, 2003년 대통령표창 서훈)의 손자로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감기 몸살 중이라 부인(72)이 운전하는 차로 KTX 여천역까지 배웅 나와 함께 윤형숙 열사의 유적지를 안내해주었다.

"고모님(윤형숙 열사)의 무덤은 원래 이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채 저기 보이는 고향(창무리) 마을 뒷산에 가매장되어 있었지요. 그러다가 10년 뒤에 현재의 이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1960년 3월 23일 마을사람들은 윤형숙 열사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후 2013년 9월 28일 무덤 앞에 묘비석과 안내판을 세우는 등 묘비 정비를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윤치홍씨로 당시에 그는 여수시 독립유공자발굴 전문위원이었다.

"윤형숙 열사는 남도의 유관순이라고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만세운동 중 일경에 왼팔이 잘리고 눈까지 잃으면서도 만세운동을 부른 그 투지를 누가 감히 흉내낼 수 있겠습니까?"

도로 가에 세워진 '독립유공자 윤형숙 열사의 묘' 안내판, 저 뒤로 열사의 무덤이 보인다.
▲ 윤형숙 2 도로 가에 세워진 '독립유공자 윤형숙 열사의 묘' 안내판, 저 뒤로 열사의 무덤이 보인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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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화양면 창무리에 있는 윤형숙 열사의 무덤.
▲ 윤형숙 3 여수 화양면 창무리에 있는 윤형숙 열사의 무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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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숙 열사의 무덤이 이곳에 자리하기까지를 설명하는 윤치홍씨와 기자.
▲ 윤형숙 4 윤형숙 열사의 무덤이 이곳에 자리하기까지를 설명하는 윤치홍씨와 기자.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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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는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를 잘 모른다. 윤형숙 열사는 어렸을 때 안정리라는 마을에서 살아 안정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수피아여고 시절에는 윤혈녀라고 불렸다. 윤 열사는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적인 사건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로부터 5년 뒤인 1900년 9월 13일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서 태어났다.

윤 열사의 아버지 윤치운은 당시 한학자였으나 윤 열사가 7살 되던 해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하지만 어린 형숙에게 교육을 시키고자 아버지는 윤 열사를 순천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집에 맡겨 초등학교를 마치게 한다.

이후 순천 성서학원을 이수한 뒤, 광주지역 최초의 여성중등교육기관인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고)에 진학하면서 나라의 운명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키우게 된다. 당시 수피아여학교는 광주 숭실학교와 더불어 호남지역의 중요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그 명성이 자자했던 학교이다. 1918년, 18살의 나이로 수피아여학교 신입생이 된 윤형숙 열사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반장을 도맡아했다고 한다.

특히 수피아여학교의 반일회(班日會)는 실제로 일제에 저항한 모임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였는데 윤형숙 열사는 '장발장', '베니스의 상인', '바보온달'같은 연극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키우는 일에 앞장섰다. 때마침 수피아여학교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박애순 선생(1896~1969,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있었고 영리하고 야무진 윤 열사는 박애순 선생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윤 열사가 2학년이 되던 1919년 1월 20일 오전 6시, 서울로부터 고종황제의 승하 소식을 전해들은 수피아여학교는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 독살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박애순 선생은 3.1만세운동 전후의 국내 사정과 파리 만국강화회의 사정, <매일신보>에 실린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 등을 학생들에게 알려 자신들도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해야 하는 당의성을 이해시켜나갔다.

윤형숙 열사의 호적.
▲ 윤형숙 호적 윤형숙 열사의 호적.
ⓒ 윤치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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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만세운동이 기록된 일본 육군성 기록물.
▲ 일본 육군성 기록물 광주만세운동이 기록된 일본 육군성 기록물.
ⓒ 윤치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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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윤형숙 등 학생들은 1919년 3월 10일 오후 2시, 광주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이날 만세시위에는 수피아여학교를 비롯하여, 숭실학교생, 기독교인, 농민, 시민 등 1천여 명이 참여하였는데 일제는 기마헌병을 투입하여 시위자들에게 위해를 가하며 체포에 열을 올렸다.

이 자리에서 윤형숙 열사는 태극기를 든 왼손이 잘리고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비극적인 운명과 마주치게 된다. 이러한 큰 부상을 입은 윤 열사는 주동자로 잡혀가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러야했다.

이 일로 윤 열사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외팔에 오른쪽 눈의 실명이라는 참담한 현실에 놓이게 된다. 당시 광주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수피아여학교는 윤형숙 열사를 비롯하여 교사와 학생 26명이 전원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

극심한 부상을 입은데다가 거듭된 고문으로 감옥 문을 나설 무렵의 윤형숙 열사는 그나마 실낱 같이 의존하던 왼쪽 눈마저 거의 실명 상태에 이르고 만다. 하지만 삶의 희망만은 놓지 않았다. 이후 윤 열사는 독신으로 원산의 마르다윌슨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뒤 전주로 내려가 기독교학교의 사감과, 고창의 유치원 등지에서 자라나는 어린이 교육에 힘썼다.

그는 "왼팔은 조국을 위해 바쳤고 나머지 한 팔은 문맹자를 위해 바친다"는 신념으로 불구의 몸을 이끌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윤 열사에게 닥친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방된 조국, 좌우 이념의 갈등 속에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9월 28일 밤, 서울이 수복되자 퇴각에 나선 인민군은 윤형숙 열사를 비롯한 손양원 목사 등 기독교인을 포함한 양민 200여 명을 여수시 둔덕동으로 끌고 가 학살했던 것이다.

윤형숙 열사 나이 50살,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독립을 외치다 잃은 왼팔과 실명된 눈을 평생 끌어안고 어린이교육에 힘써온 윤 열사의 삶은 사후 63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평가를 받게 되어 정부는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여수 이순신공원에 있는 항일열사기념탑 부조에는 칼을 든 일본 순사 앞에 팔이 잘린 윤형숙 열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 항일열사기념탑 여수 이순신공원에 있는 항일열사기념탑 부조에는 칼을 든 일본 순사 앞에 팔이 잘린 윤형숙 열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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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숙 열사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준 작은 아버지 윤자환 선생도 독립유공자로 손자인 윤치홍씨가 기념비 앞에 서 있다.
▲ 윤치홍 윤형숙 열사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준 작은 아버지 윤자환 선생도 독립유공자로 손자인 윤치홍씨가 기념비 앞에 서 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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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윤 열사는 독신으로 삶을 마치는 바람에 훈장을 받을 가족이 없어 훈장은 가엾게도 지금 여수시청 앞 게시판에 외롭게 걸려있다.   여수시에 있는 윤형숙 열사의 유적지로는 여수이순신공원(여수시 웅천동 산221) 내 여수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서 있는 곳의 벽에 새긴 부조(돋을새김 조각)를 들 수 있다. 이 부조에는 윤 열사의 잘린 팔이 뒹구는 가운데 만세운동을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 이름 석 자라도 기억하는 겨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슴에 간직한 채 평생 고모님 윤형숙 열사의 삶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 조카 윤치홍씨 내외의 노고가 쌀쌀한 11월의 바람을 훈훈하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아,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여!

 무덤에서 바라다 본 윤형숙 열사의 고향, 창무리 마을의 평온한 모습.
▲ 창무리 무덤에서 바라다 본 윤형숙 열사의 고향, 창무리 마을의 평온한 모습.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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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신한국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태그:#윤형숙, #여성독립운동가, #항일독립운동, #윤치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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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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