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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돌아가셨어."

친구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옷장에 있는 검은 옷을 챙겼다.

늦은 밤이었고, 다행히도 나는 바로 달려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린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도 같을 뻔했지만 내가 이사를 가게 되는 바람에 거기까지 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러니까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린 서로에게 관계 맺고 있으나 신경 쓰이지 않는, 서로의 어린 시절과 배경 그리고 큰 테두리의 삶의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는 관계였다.

매일 같은 학교에서 부대끼던 학생 시절을 지나, 일 년에 두세 번을 만나는 느슨한 관계가 되었지만, 그 친밀도는 잔잔하게 유지되었다. 누군가 가장 오래된 혹은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 묻는다면 충분히 나는 이 친구의 이름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친구도, 친구의 부모님도 예상은 했던 일이었다. 오랜 시간 신장투석을 받아오셨고,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넘나들며 근근이 삶을 연장해 오셨던 분이셨다. 그렇게 모두가 예상했지만, 죽음은 예측한다 해도 누구도 경험해 본 일은 아니기에, 그 슬픔과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일은 사람이 아닌 시간만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아직 인생의 한창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보거나 함께한 경험이 없다. 조사(弔詞) 보다는 경사(慶事)가 많았고, 조의금보다는 축의금을 더 많이 챙겨보았다. 그런 나에게 어쩌면 가장 오래된 친구 아버지의 죽음은, 미래에 있을 언젠가 나도 먼 훗날 치러야 할, 그 일의 예행연습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레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고 발인을 함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산자가 하는, 해야만 하는 일

"아빠가 돌아가셨어." 친구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옷장에 있는 검은 옷을 챙겼다.
 "아빠가 돌아가셨어." 친구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옷장에 있는 검은 옷을 챙겼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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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나의 아버지는 아닐지라도, 누군가의 장례를 함께하고 옆에서 바라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의금은 어디에 내야하는 건지, 고인의 영정사진 앞에서 나는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 건지, 무엇보다 한없이 무너져있는 친구 앞에서 무얼 해줘야 하는 건지 한참을 허둥지둥 대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아무 말 없이 모든 것들을 응시하며 그저 묵묵히 함께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 시간과 공간 속에는 다른 듯하지만 다르지 않은 일상 속에 단상들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고, 비슷한 단어와 위로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말과 표정과 눈물을 맞이하는 순간에, 나와 친구 그리고 그 곳의 많은 사람들이 한참을 오열하며 울다가도, 때가 되면 밥을 먹었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나도 친구와 함께 울다가도, 거울을 봤고, 졸기도 했고, 죽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화들도 나누었다. 그 대화의 범위는 아버님의 지병과 사인(死因)을 묻는 과거의 말들로 시작해, 남자친구가 생겼냐는 현재의 물음까지 다양했고, 어울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일상의 질문과 행위들은 계속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산자가 하는,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냉정하지만 죽음의 대상자는 우리가 아니었고, 남은 삶의 주체는 우리였기에.

그렇게 밤을 새고 발인을 함께했다. 나를 포함해 친구의 가족들과 지인 몇몇이 운구차에 올라탔고 한 시간 남짓 이동했다. 그곳에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하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묘지에 안장되는 순간. 관이 땅속으로 옮겨지고, 흙으로 덮여지고, 국화꽃잎이 뿌려지고, 다시 흙으로 뒤덮여 꾹꾹 밟혀졌다. 나는 이 모든 행위들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순서에 맞고 엄숙하게 행해주는 상조회사 직원들을 보며 '저들에겐 이 과정들이 반복되는 일의 연속이겠지. 나는 억만금을 줘도 이 일은 절대 못하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극도의 슬픔이 가득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결이 다른 생각들은 이렇게 불쑥 튀어나왔다.

누구도 담대해질 수 없는 영역

발인과 하관이 모두 끝나고 아버님은 땅속에 묻혀 잠이 들었고, 우리들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밀려오는 피곤과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갈 때는 아무도 차마 잠들지 못했지만, 올 때는 모두가 으레 잠이 들었다. 삶의 끝남과 이어짐이 공존하는 그 때. 그렇게 누군가는 한 시간 후면 깨야 할, 누군가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잠에 들었다. 통곡과 오열로 순간은 시끄러웠지만, 머지않아 한참 동안 정적만이 흘렀다.

나는 문득 이 모든 장례라는 의식 아래 행해졌던 것들이, 산자든 죽은 자든 어쩌면 결국 모두 잠들여지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료한 하루건, 치열했던 하루건, 결국 모두 그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에 드는 것처럼.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며, 잘 잠들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누구나 죽음은 간접적으로 관망하다 결국 직접적으로 겪는 일이다. 삶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시기를 지나,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온다. 나는 아직은 생(生)에 대해 더 많이 겪고 사유해야 하는 과정에 있지만,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거들었던 잠깐의 시간 동안 많은 물음과 생각들이 스쳐갔다. 누구도 담대해 질 수 없고 능숙해 질 수 없는 영역.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지만, 나의 일이 됐을 때 그것을 결코 두 번째 혹은 해본 일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장례라는 의식 아래 나는 삶과 죽음, 슬픔과 배고픔, 눈물과 하품이 동시에 퍼져 나오는, 수많은 어울리지 않는 감정과 말들에 섞여 그렇게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태그:#죽음, #장례,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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