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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살기도 어렵고, 재밌게 살긴 더 어려운 요즘. 하루하루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의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남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행복한 일을 하며 사는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재미있게 살고 있는지, 내가 행복한 일을 하고도 밥은 먹고 살 수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앞으로 기획 <인터뷰 100>을 통해 행복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전할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반짝이는 박수소리> 중에서.
 <반짝이는 박수소리> 중에서.
ⓒ <반짝이는 박수소리>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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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nomad, 방랑자). 이메일 주소 맨 앞의 몇 글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삶을 퍽 잘 설명하는 단어가 아닐까. 고등학교 1학년, 학교를 뛰쳐나왔다. 무작정 인도에 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중학교 때까지 전교회장을 도맡으며 모범생으로 살던 딸이었다. 부모는 말렸다.

그래도 떠났다.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8개월간 태국, 베트남, 인도 등 동남아시아 국가를 돌아다녔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 낯선 언어 속에서 비로소 오롯이 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귀중한 경험 속에서도 어떤 '질문들'이 발목을 잡았다.

"... 그러나 그곳에서도 나는 설명해야 했다. 내가 왜 부모님과 국제전화를 하지 않는지, 내가 왜 손과 발을 많이 사용하는지, 내가 왜 떠돌아다니는지. 나를 설명해야 했다." (<반짝이는 박수소리> 중)

다큐멘터리 감독 이길보라씨의 이야기다. 지난 2015년, 그는 청각장애인 부모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소리>를 내놓는다. <반짝이는 박수소리>는 거꾸로 흘러가는 영화다. 밥을 차려먹고, 뉴스를 보고, 김장을 하고, 시장에 가고, 집을 보러 다니는 청각장애인 부부의 평범한 일상을 한참 나열하고 이길보라 감독과 그 동생의 입을 통해 왜 이 다큐멘터리를 찍는지, 그 이유를 말한다. 이 영화는 부모의 삶을 낯설어하는 세상을 향해 이길 감독이 건네는 대화다. 

"나는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그것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생각을 했고, 말을 했고, 글을 썼고, 카메라를 들었다. 어떻게든 그 드넓은 침묵을 이해하고 싶었다." (<반짝이는 박수소리> 중)

"직접 보고 결정해라" 고민을 정리해준 한 마디

<반짝이는 박수소리> 이길보라 감독
 <반짝이는 박수소리> 이길보라 감독
ⓒ <반짝이는 박수소리> 프로모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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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보라 감독은 올 9월, 도돌이표처럼 또 다시 길 위에 섰다.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로 주목받고 칼럼과 출판 작업을 이어가던 시기였다. 네덜란드 영화학교로 훌쩍 유학을 떠났다. 지난 10월 말부터 11월 1일까지, 이길 감독과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는 낯선 곳에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열심히 삶의 힘을 빼는 연습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저는 이 생에서 평생 작업을 하고 살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즐겁고 또 지속 가능한 작업을 계속 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게 최근 몇 년 사이의 화두였어요. 책 작업을 하고, 영화 작업을 하면서 관객들과 독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과연 이 환경에서 내가 계속 즐겁고 신나게 작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고. 그렇다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나가고, 어떻게 작업을 해나갈까 하는 궁금함이 생겼어요. 알아보고 싶었던 거죠."

암스테르담은 지난해 유럽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들르게 됐다.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힙한 베를린이나 파리 정도가 내가 좋아하게 될 도시가 아닐까' 짐작했는데, 별 기대 없이 도착한 암스테르담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푹 빠졌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거나 얼음장처럼 차갑지 않고 딱 적당한 수준의 온기를 품은 그곳의 사람들도 마음에 들었다. 내친김에 네덜란드 영화 학교에 방문했고, 우연히 석사 전공 학장을 만나 입학 상담도 받았다.

일은 빠르게 추진됐다. 올 4월에 서류전형에 합격했고, 면접 일정이 잡혔다. 암스테르담으로 다시 날아가야 했다. 그때부터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그토록 꿈꾸던 유학길이지만 시간과 돈을 들여 면접을 본다고 해서 합격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엄마에게 살짝 고민을 털어놨다. 그녀의 대답은 명쾌했다. "가서 눈으로 직접 보고 결정해라."

"농인인 엄마에게는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거예요. 가보지 않고, 해보지 않고서는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게 엄마한테는 너무 이상한 거죠. 가서 눈으로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거니까. 아무리 귀로 듣고 눈으로 읽어도 모르는 거니까. 저는 그런 엄마, 아빠 아래서 자라면서 정말 그렇게 세상을 만나고 삶을 배워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우리 가족의 방식이고, 내가 해왔던 것이고, 그게 나니까." 

차이가 눈에 띄지 않는 도시, 고민이 시작됐다

<반짝이는 박수소리> 중에서. TV를 보는 이길보라 감독의 엄마 길경희씨.
 <반짝이는 박수소리> 중에서. TV를 보는 이길보라 감독의 엄마 길경희씨.
ⓒ <반짝이는 박수소리>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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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식'을 택했기 때문일까. 영화학교 합격 통지문이 날아왔다. 그렇게 지난 9월부터 2년간의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이길보라 감독은 네덜란드 영화학교에서 단순히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라, 영화 예술을 가지고 자신만의 연구를 진행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첫 학기는 자기만의 '주관성'을 찾는 과정이란다. 같이 공부하는 10명의 동기들도 가지각색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길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지금 "다양한 이 문화들의 레이어(층위) 속에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한두 달 정도는 매일 매일 깜짝 놀랐던 것 같아요. 국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다문화가 있어요. 국적은 더치(네덜란드)지만 이스라엘에서 왔고 이스라엘에서 산만큼 암스테르담에서 산 친구, 더치와 결혼해서 네덜란드에서 아이를 낳고 이혼했지만 여전히 같이 아이를 키우며 사는 러시아 친구, 18살 때까지 네덜란드에서 나고 자라 살다가 최근 10년간을 뉴욕과 LA에서 산, 유고슬라비아인처럼 생겼지만 더치에서 나고 자란 친구. 정말 다양해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저는 명함도 못 내미는 거예요. '부모님이 농인이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저는 수어를 썼는데, 세상 사람들은 음성언어를 써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라는 문장이 여기서는 별로 신기하거나 이상하거나 특별한 문장이 되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항상 그런 차이들을 발견하고 주목하면서 즐거워했고, 제 작업에 반영했어요. 근데 이곳에선 그게 통하지 않는 거죠."

한국에서 낯선 것들이 암스테르담에선 익숙했다. 익숙하기에 부러 강조할 필요도 없어보였다. 일상적 고민들이 무용한 건 아닐까, 불안했다. '아, 그럼 나는 여기서 무슨 작업을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고민을 꾹꾹 눌러담아 스승에게 메일을 보냈다. "네게 오는 것을 그냥 온전히 보고 받아들이는 데 힘을 쓰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웃풋'에 연연하지 않으려 마음을 고쳐먹었다. "맛있는 것 챙겨먹고, 해 뜨면 공원하고, 주변 산책하고, 소도시도 여행하고, 일기도 많이 쓰는" 느슨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자의 자녀로서 살아남기 위해선 예쁜 아이,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 돼야 했어요. 과거에 그걸 택한 적도 있고요. 그런데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 꼭 그렇게만 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꼭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가끔 '열심히 살아야 한다'와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가 충돌해서 괴롭기도 하지만, 요즘은 '지금 이 순간 지구에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덜 끼치고 행복하게,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가 목표예요."

물론 마음의 여유만 찾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도 비용이 든다. 당장 학비부터 골칫거리다. 학교 추천으로 정부 장학금을 받게 되어 1년치 학비를 벌고, 코다(Children of Deaf Adults' International)에서 주는 지원금 3천 달러를 받았지만 이후부터가 걱정이다.

당장 내년부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만약 그 어떤 장학금도 받지 못하면 고스란히 자비를 털어 학교를 다녀야 한다. 비EU국가 유학생은 EU국가 유학생에 비해 3배 많은 등록금을 내는 게 규정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받는 장학금은 폭이 좁을뿐더러, 예술 분야 전공생들을 대상으로한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길 감독은 유학길에 오르며 SNS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제목은 '이길보라의 유학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 장학금'. 리워드는 '없음'. 다만, '사회에 좋은 영화와 글로 환원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찌 보면 배짱 좋다는 비아냥이 돌아올 수도 있는 시도였다. 실제 욕도 많이 먹었단다. '거지냐', '창피하다', '구걸하냐'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조금씩 더 많아져야 한다는 운동적 차원이었어요. 예술 분야에 왜 장학금을 안 주지? 다큐/예술 영화 공부하겠다는데 그게 왜 작가/감독 자기만을 위한 거지? 왜 예술 분야에 장기적 육성/후원 계획이 없지? 그럼 그냥 다 포기해야 하나? 왜지? 그럼 다른 방식으로 그곳에서 공부해보자.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늘어나면, 또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느슨한 삶, 제 작업에 또 다른 영향을 주겠죠"

<반짝이는 박수소리> 이길보라 감독(왼쪽)과 이길 감독의 동생.
 <반짝이는 박수소리> 이길보라 감독(왼쪽)과 이길 감독의 동생.
ⓒ <반짝이는 박수소리> 프로모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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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보라 감독은 현재 학교에서 '여성', '기억', '전쟁'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 지난해에 리영희재단에서 제작 지원을 받은 작품인 <기억의 전쟁>의 후반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베트남 중부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비(非) 남성의 시각으로 기억하는 영화다. 이길 감독은 "내년이나 내후년쯤 관객을 만나면 좋겠지만, 작업엔 각자의 운명이 있어서 감독 마음대로만은 되진 않을 거 같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결과에 얽매이거나, 무언가를 증명하려고 애쓰진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는 요즘 "날이 좋으면 공원에 가서 누워 있고, 산책도 가고, 더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고, 트램 대신 자전거를 매일 타고 다니고, 박물관에 가고, 미술관에 간다"고 했다. 암스테르담의 상점엔 화려하고 다양한 물건이 없고, 그마저도 5, 6시만 되면 문을 닫는다. 그래도 "살아진다"고 했다. 덜 쓰고, 덜 소비하고, 덜 경쟁하고, 덜 비교하고, 덜 압박받는 만큼 이젠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라보는 시간을 찾았다.

"무언가를 공부하고 학위를 따고, 이런 걸 하기 위해 유학을 오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여기서 행복하고 아름답게 지내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고요. 그것들이 저의 작업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해요."


태그:#이길보라, #반짝이는박수소리, #코다, #기억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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