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진보기
|
▲ 초등학교 <국어활동 1-2> 영어에서는 전치사를 꼭 써야 한다. 그래서 바나나가 식탁 '위'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말에서는 바나나가 '식탁에' 있다고 해도 누구라도 식탁 위에 있다고 알아듣는다. |
ⓒ 이무완 | 관련사진보기 |
영어는 전치사가 발달했다면 우리 말은 씨끝과 토씨가 발달했다. 가령, 영어에서 'My mam is in the room'이라는 문장이 있다고 치자. 이 문장을 우리 말로는 어떻게 뒤쳐야할까. 모르긴 해도 대부분 '우리 엄마는 방
안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영어 전치사 'in'을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이라는 말은 빼고 '우리 엄마는 방에 있다'고만 해도 너끈하다. 굳이 전치사 'in'을 보태지 않아도 누구라도 '방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때 영어를 독해하던 버릇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낱말 하나 하나를 곧이곧대로 우리 말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런 귀결로 'in' 같은 말을 허투루 버릴 수 없다. 'in the room'은 '방 안에(서)'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제대로 뒤치는 수준이 되자면 옮겨온 말이 그대로 자연스러운 우리 말이 되어야 한다. 다음을 보자.
㈎
주머니 속에 손수건을 넣었다.
㈏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었다.
앞엣말에서 '속'이란 말이 꼭 있어야할까. 영어에서는 'I put my handkerchief
in my pocket'으로 써야 한다. 그래야 말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구태여 '속'을 쓰지 않아도 다 안다. 넣었다는 말로 이미 '안'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글은 꼼꼼하게 써야 한다. 하지만 없어도 될 말을 쓰면 오히려 읽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 않을지? 이렇게 요새 들어 쓰지 않아도 될 말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데는 아무래도 영어 말법에 영향을 받아서인 듯하다.
다음 보기들은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서 옮겨왔다. '위, 속' 같은 말을 꼭 써야 할까.
△ 곰이
나무 위로 올라가 벌집을 따서 아래로 던집니다.(국어활동 1-1, 86쪽)
→ 곰이
나무에 올라가 벌집을 따서 아래로 던집니다.
△
주머니 속의 말로 문장을 만들어 봅시다.(1-1-나, 179쪽)
→
주머니에서 꺼낸 낱말로 문장을 만들어 봅시다.
△ 아빠는
아빠 손바닥 위에 달팽이를 놓았어요.(1-1-나, 200쪽)
→ 아빠는
손바닥에 달팽이를 올려 놓았어요.
△
모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1-2-가, 67쪽)
→
모자에 무엇이 들어 들었을까요?
△
가방 속에 어떤 학용품이 들어 있는지 말해 봅시다.(1-2-나, 214쪽)
→
가방에 어떤 학용품이 들었는지 말해 봅시다.
△ 그러자 갑자기
뾰족 박쥐의 머리 위로 열매가 후두두, 따다닥!(1-2-나)
→ 그러자 갑자기
뾰족 박쥐 머리에 열매가 후두두, 따다닥!
△
식탁 위에 있는 바나나를 먹고 (1-2-국어활동, 70쪽)
→
식탁에 있는 바나나를 먹고/ 식탁에 둔 바나나를 먹고
△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급히
풀밭 위로 뛰어왔어요. (1-2-국어활동, 72쪽)
→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부리나케
풀밭으로 뛰어왔어요.
△
얼음판 위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모습이 재미있었어.(1-2-나, 258쪽)
→
얼음판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모습이 재미있어.
이쯤 쓰고 보니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되는 양 떠드는 것만 같아 쑥스럽다. 하지만 말이란 게 한번 입에 붙으면 좀처럼 바꾸기 어렵다. '에이, 또 우리 말에 스며든 영어 말법 몰아내자는 소리냐? 말이란 게 이 말 저 말 서로 섞이고 영향을 주는 게 밥 먹듯 하는데 영어 말법이 좀 섞어 쓴다고 그게 무슨 대수냐'고 할지 모르겠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1학년 아이들은 집에서 마을에서 익힌 입말로만 살다가 학교에 오면서 글말 단계로 들어선다. 이때 배운 글말은 평생을 간다. 이 어린아이들에게 영어 말법에 찌든 글말을 애써 가르쳐야 할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우리 말을 더 정성스레 가르쳐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