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순사건 발발 69주년을 맞이해 여수동성자동차학원(옛 14연대 터)에서 열린 주철희 박사의 북콘서트 모습
 여순사건 발발 69주년을 맞이해 여수동성자동차학원(옛 14연대 터)에서 열린 주철희 박사의 북콘서트 모습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여순사건 발발 69주기를 맞이한 19일 오후 7시 동성자동차학원(옛 14연대 터)에서 여순사건 연구 전문가인 주철희 박사의 북콘서트가 열렸다. <까치정보신문>, <여수넷통>, <여수신문>, <남해안신문>, <동부매일신문>이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제주4·3사건 유족회 대표와 여순사건 유족회장을 비롯한 1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투박한 사투리가 잘 어울리는 주철희 박사는 여수 출신으로,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연구하는 분야는 주로 여순항쟁을 비롯한 국가 폭력과 반공 문화지만 지역의 근현대사 문제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그가 펴낸 저서는 <불량국민들>, <일제강점기 여수를 말한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인물로 본 전라도 역사이야기>, <지리산의 저항운동>, <여순사건 자료집> 등이 있다.

여순사건은 제주4·3 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을 점령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했다.

사건 발생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여순반란사건 또는 전남반란사건이라고 불렀으나 1995년부터 국사 교과서에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일반적으로는 여순사건이라 부른다. 주철희 박사는 이 사건으로 희생 당한 사망자가 1만 5천여 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주철희 박사와 함께하는 토크쇼 모습. 왼쪽부터 여수넷통 오병종 국장, 주철희 박사, 정수미 시인
 주철희 박사와 함께하는 토크쇼 모습. 왼쪽부터 여수넷통 오병종 국장, 주철희 박사, 정수미 시인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오병종 여수넷통 편집국장과 정수미 시인과 함께 콘서트장에 들어선 주철희 박사는 자신의 저서인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의 책 내용을 설명했다.

맨 먼저 그가 보여준 자료는 14연대 군인들이 봉기에 나선 후 여수 시가지에 붙였다는 오래된 포스터로,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가 선포한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포스터 내용이다. 70년이 지난 포스터는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14연대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가 여수 시가지에 붙였던 포스터로 70년이 지나 색이 바랬다
 14연대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가 여수 시가지에 붙였던 포스터로 70년이 지나 색이 바랬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해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저자는 '여순사건'을 '여순항쟁'으로 정명(正名)하고 여순항쟁을 대한민국 항쟁역사의 서막으로 봤다. 역사를 논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이념논쟁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여순사건은 연구자마다 명칭을 제각각 사용하고 있다. 이를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을 하는 동안 많은 다툼을 낳았고 주철희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강의를 마친 주철희 박사 모습
 강의를 마친 주철희 박사 모습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주철희박사의 저서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주철희박사의 저서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제 책 제목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는 이 포스터에서 가져왔습니다. 국민의 안전보장에 가장 우선해야 할 군인에게 동족을 학살하라는 명령이 하달됐습니다. 1980년 5월 대한민국 군인은 이에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출동했고 광주는 피의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반면에 1948년 10월 대한민국 군인은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잘못된 명령에 저항하고 출동을 거부했습니다. 어떤 군인이 올바른 군인입니까?"   

책은 1차 사료를 검증하고 분석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배경과 원인을 밝혔다. 제14연대의 제주도 출동명령은 '동포학살'로, 군인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잘못된 명령이었다. 군인 봉기는 지역민이 지지하면서 항쟁으로 발전하게 됐다.

여순항쟁의 부정적 기억으로 '빨갱이'가 탄생해

여순항쟁의 기억은 부정적이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여수사람들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절대 앞에 나서지 말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여순항쟁은 안보를 가장한 반공교육과 '빨갱이'란 말을 탄생시켰다.

'빨갱이'의 사전적 의미는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사실상 '기본적 위엄과 권리를 박탈해도 되는 존재'로 인식되곤 한다. 주철희 박사가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면 '빨갱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세월호에 대한 주장이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으면 '빨갱이'라고 주장합니다."

"여순항쟁의 역사를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여수사람들이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여순사건 당시 학살된 희생자 모습
 여순사건 당시 학살된 희생자 모습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여순사건 당시 혐의자로 끌려와 군경으로부터 취조를 당하고 있는 모습
 여순사건 당시 혐의자로 끌려와 군경으로부터 취조를 당하고 있는 모습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군대를 통제하는 통수권자는 대통령입니다. 혹여 반란이라고 한다면 통수를 잘못한 대통령이 책임졌어야 합니다. 왜 여수지역민들이 피해를 당해야 합니까? 여순사건을 지역민의 관점이 아닌 군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순항쟁'으로 명칭을 정하려면 지역에서 나서야 하는데, 지역민이 무관심하고 조례하나 제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마디로 "참담하다"고 표현한 그는 "여수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빈다"며 말문을 닫았다. 

북콘서트에 참가한 일행들이 기념촬영했다
 북콘서트에 참가한 일행들이 기념촬영했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주철희 박사의 말은 들은 정수미 시인이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들려줬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귓가를 맴돈 김춘수 시인의 '꽃'의 1, 2연 부분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여순사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