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 메인포스터

▲ <남한산성> 메인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01.

영화 <도가니>(2011)로 약 460만, <수상한 그녀>(2014)로 약 860만, 연이은 흥행에 성공한 황동혁 감독은 자신의 다음 작품의 소재로 병자호란을 선택했다.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소재다. 지난 2011년 김한민 감독이 <최종병기 활>이라는 작품에서 배경으로 삼았던 시기. 그나마도 시대적 배경으로 설정되었을 뿐이었다.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기력했고,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일방적으로 당했던 침략이었기에 오히려 극적이지 못했던 인조와 그 신하들의 이야기.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해야만 했었기에 그 동안 병자호란은 쉽게 다루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황동혁 감독이 그런 소재를 차기작으로 선택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던 것도 같다. 자신이 연출했던 <도가니>에 이어 소설에 충실한 영화를 한 편 더 만들고 싶던 차에 이번 작품의 원작인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을 읽으며 그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하니 말이다. <도가니>를 만들기 전 공지영 작가의 원작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과 동일한 마음이었단다.

02.

원작의 소설에서 주화파인 최명길(이병헌 역)과 척화파 김상헌(김윤석)이 서로의 입장을 대변하며 논쟁을 벌이는 것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듯이 스크린 속에서도 두 사람의 대립은 가장 중요한 요소로 다루어지고 있다. 인조(박해일 역)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뒤 신하들에게 의지하는 동안, 두 사람의 대립과 반목은 남한산성 내부의 결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남한산성 밖의 상황을 바꾸어가고 그 상황은 다시 한번 두 사람의 논쟁거리가 되어 끊임없이 반복된다. 임금이 치욕을 겪더라도 백성을 살리기 위해 더한 일도 감내해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과 죽음보다 더한 것이 오랑캐의 발밑에 엎드리는 것이기에 목숨을 걸고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의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두 사람과 달리 영의정 김류(송영창 역)와 그 외의 신하들은 인조의 기분에 따라, 바깥의 상황에 따라 자신들의 목숨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따라 머리만 조아리는 이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책임도 지지 못한다.

 이 중에서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신하는 누구인가.

이 중에서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신하는 누구인가. ⓒ CJ엔터테인먼트


03.

영화는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역사적 사실과 그를 바탕으로 저술된 김훈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곧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과 유사하다. 특히 조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하들의 태도며, 그들을 대하는 인조의 모습, 또한,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항복을 권고하는 청나라 군대와 황제의 모습에 대한 것이 그렇다. 여기에서 '모든' 부분이라고 하지 않고 '상당히 많은 부분'이라고 설명한 까닭은 이 영화에도 분명히 역사적 사실과 다른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예조판서 김상헌의 죽음과 관련된 장면.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김상헌은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고 오랑캐의 발밑에 치욕스러운 모습을 만든 책임을 지기 위해 할복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미 많은 매체들을 통해 그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생을 이어나갔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된 장면이다. 영화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장면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뱃사공의 죽음과 김상헌의 죽음을 수미쌍관으로 이어내는 표현이자, 김상헌이라는 신하의 책임감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어주는 장치다. 어떤 방식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따지기 이전에, 자신의 뜻을 임금을 지키는 일에 제대로 펼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하는 모습을 통해 앞서 이야기했던 영의정 김류 이하 신하들의 가벼운 언행과 대비되는 모습을 부각하는 것이다.

04.

이 지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라는 매체를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예술 작품으로 대할 것인가?, 혹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투영해내는 전달 매체로 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이는 영화사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라는 범주로 촬영되는 작품들과는 달리, 영화는 작가나 감독 본인의 의지대로 각색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촬영하는 과정 속에서도 많은 부분들이 임의적 의지와 연출에 따라 사실과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이 허용되는 것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와 다른 부분이다. 그 정도에 대한 문제는 차치해두고서라도 영화라는 매체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옳은 것인지, 또한 이 영화 <남한산성>에서 각색된 김상헌의 죽음은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개인의 판단에 그 몫을 남겨두도록 하겠다.

 논란의 결말, 영화 속 각색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논란의 결말, 영화 속 각색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 CJ엔터테인먼트


05.

영화에서 주된 내용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논쟁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그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서로를 향한 존중과 배려 때문이다. 자신의 뜻과 가치관을 내세워야 하는 곳에서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목숨까지 걸어가며 인조를 설득하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예를 표하며 존중을 보인다. 수려한 문장으로 가득 채워지는 두 사람의 논쟁과 달리, 이 부분은 한 마디 대사 없이 가느다란 목례나 눈빛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며, 일종의 완급조절인 셈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청나라 황제에게 굴복하겠다는 서신을 보이며 자신이 잘못되더라도 김상헌만큼은 잃지 말라는 간언을 올리는 최명길의 모습 또한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기 위해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결코 악의로 가득한 비난이나 모함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짜 라이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도 다시 한번 언급하게 되지만,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와 그 모든 잘못을 이시백(박희순 역)에게 돌리고 자신은 살아남고자 하는 김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06.

서날쇠(고수 역)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는 조정 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대부분인 이 작품에서 안팎을 연결해주는 존재임과 동시에, 영화 속 역사적 사실인 병자호란과 그 이전의 영화 밖 역사적 사실 정묘호란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잠시 등장하는 것처럼, 그가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와 대장간을 하게 된 것은 영화 속 역사적 사실인 병자호란 이전에 일어났던 정묘호란 때문이었다. 임금은 강화도로 도망가버리고 육지에 남은 백성들이 후금의 약탈과 살인으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9년 만에 다시 한번 침입을 당하고,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 이번에는 강화도로 피신조차 하지 못하고 – 남한산성으로 쫓기듯 도망쳐 온 인조와 그 신하들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다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와 칠복(이다윗 역)의 이야기가 또 다시 한번 신파의 대상으로 활용되고 만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 한국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이라면 반드시 집어넣어야 할 장면이기라도 한 듯이 느껴질 정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기에 더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영화 속 안팎의 역사를 이어내는 인물이다.

그는 영화 속 안팎의 역사를 이어내는 인물이다. ⓒ CJ엔터테인먼트


07.

기술적으로 이 영화가 좋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생각보다 이 영화는 섬세함이 부족하고 단조로운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역사적 사실이 주는 안타까움과 슬픔 이외에 작품의 기술적 완성도가 주는 감동과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의 이야기로써 이 영화를 평가하자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각색에 의해 달라진 부분이 있다고는 하나,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역사의 한 부분인 병자호란의 내용을 충실히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관객들을 쉽게 현혹할 수 있는 전투 장면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주화파와 척화파를 대변하는 두 인물의 모습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 박수를 보낼 만하다. 다만, 굳이 영화의 호흡을 원작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소단락으로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영화 무비 남한산성 황동혁 넘버링무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