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영화 <아이 캔 스피크> 메인 포스터.

영화 <아이 캔 스피크> 메인 포스터. ⓒ 리틀빅피쳐스




01.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절차와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무원 민재(이제훈 역)는 새로 발령받은 구청에서 '도깨비 할매'라고 불리는 옥분 할머니(나문희 역)를 만나게 된다. 그동안 8000여 건이나 되는 민원을 신고할 정도로 눈에 불을 켜고 마을 시장을 헤집고 다니는 그녀 때문에 골치 아픈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 조금 이상하다. 다른 사람들이 규칙을 위반하는 건 그렇게도 사사건건 트집이면서 자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번호표를 뽑지도 않고 민원을 신청하려고 하는가 하면, 민원 신청서도 제대로 써오지 않고는 무작정 신고부터 한다. 민재가 거슬리는 건 그 부분이다. 그래서 말한다. 번호표 있으세요? 앞으로 뽑으세요.

옥분 할머니는 이 동네에서 터줏대감이나 다름이 없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시장을 돌아다니며 조금이라도 민원 사항이 생기면 구청으로 달려간다. 시장의 골목 한쪽에서 수선집을 하고 있지만, 가끔 놀러 오는 사람이라고는 근처에서 슈퍼마켓을 하는 진주댁(염혜란 역)뿐, 가족도 없이 혼자 지내고 있다. 그렇게 들쑤시고 다니니 같은 시장의 상인들도 좋아할 리가 없다. 그 사실을 할머니 본인이 제일 잘 안다. 하지만 그만둘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다니던 구청에 새 청년이 왔다. 그 구청에서 옥분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 젊은 놈이 글쎄 규칙을 들먹이면서 가르치려고 든다. 조금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참는다. 가족 같은 시장 사람들의 명운이 걸린 문제니까.

 세 사람은 조금씩 변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도움을 받는다.

세 사람은 조금씩 변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도움을 받는다. ⓒ 리틀빅픽쳐스


02.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CJ 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여성가족부가 후원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에서 당선작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존의 접근 방식을 발랄하게 비틀어 냈다는 평을 받으며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었다. 기획에서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나문희 배우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채 완성이 되기도 전에 영화의 가치에 공감하며 출연을 수락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는 기존의 작품들이 위안부라는 소재를 활용하는 측면에 있어서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의 작품들은 물론, 최근에 개봉했던 <눈길>(2015), <귀향>(2015)과 같은 작품들처럼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투영해내는 작품들과 달리 감정적 공유를 우회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03.
영화의 전반부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공간이 시장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시장은 소시민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꾸린 일터로 인식되는데, 이 공간으로 인해 상인들이 생각하는 생존의 문제와 옥분 할머니가 생각하는 규범의 문제 사이에서 잣대가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융통성과 관련된 문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옥분 할머니만 가만히 있어 주면 시장 상인들은 서로의 편의를 봐주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들인데 할머니 때문에 그게 안 된다. 물론 그런 할머니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외부의 부조리에 맞선 일종의 내부 단속이라고나 할까? 악행에 맞서 악행으로 대응하자는 논리가 아니라, 애초에 발목이 잡힐만한 일은 만들지 말자는 셈인 것이다. 실제로 시장 상인들은 할머니를 향해 불만만 토로할 뿐이지, 막상 영업을 방해하는 용역 직원들 앞에서는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 상황들을 방지하고, 시장 사람들의 생존권을 지켜보고자 밤낮으로 시장을 순찰하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수상한 이의 행동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를 남겨놓는다. 옥분 할머니의 그런 행동은 어릴 적 위안부로 끌려가 모진 시간을 견뎌냈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04.
사실 옥분 할머니의 행동에는 큰 사명감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다. 그 시절 함께 목숨을 부지하며 의지했던 정분 할머니(손숙 역)가 세상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달리 옥분 할머니는 이 작은 시장에서 겨우 옷 수선이나 하며 숨죽이고 살고 있지 않나. 함께 활동하자는 정분 할머니의 제안에도 그저 이렇게 가끔 만나서 커피나 마시고 얼굴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옥분 할머니다. 삶의 방향이 옳고 그르다는 걸 이야기 하자는 게 아니다. 그런 할머니가 시장을 쥐 잡듯이 뒤지고, 주변 상인들의 항의에도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이야길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를 떠올렸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사과는 하지도 않고, 시간을 보내려고만 하는 그들의 태도를 말이다. 영화 속에서는 단순히 옥분 할머니의 외로움이 시장 상인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 속에는 분명히, 정분 할머니처럼 적극적이지는 못했으나 나름의 방식으로 항의하고 그 마음을 쏟아내려는 행동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지킬 건 지키자는 식의 시장 단속과 민원 신고로 투영되어 나타난 게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첫 만남부터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첫 만남부터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 리틀빅픽쳐스


05.
옥분 할머니의 행동이 단순히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는 건 민재의 동생 영재(성유빈 역)와의 관계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단순히 지나칠 법도 했던 장면, 생라면을 부숴 먹고 있던 영재에게 따뜻한 식사를 내어주었던 옥분 할머니의 마음은 그런 행동들이 단순히 오지랖으로만 느껴지지는 않게 만든다. 이 장면은 다르게도 해석을 해 볼 수 있는데, 가족이나 연인을 이용해 주인공의 태도 변화를 도모하는 구조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주로 죽음이나 비극적 사건을 활용해 각성시키는 방향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옥분 할머니의 부탁을 한사코 거절하던 민재가 태도를 바꾼다는 측면에서 이 장면 역시 일종의 변용이라고 볼 수 있다. 다소 작위적이라 느낄 수도 있지만, 옥분 할머니가 주변 많은 사람에게 오지랖을 부린다는 설정과 영재를 생각하는 민재의 마음을 사전에 제시함으로써 그 위화감을 최소화했다.

06.
그런 과정들 속에서 영화 속 인물들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도움을 받는다. 옥분 할머니는 민재로 인해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기회와 용기를 얻고, 절차만 지키면 타인의 아픔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행동하던 민재는 약간의 유통성과 타인을 헤아리는 마음을 배운다. 그의 동생 영재 역시 다르지 않다. 부모의 빈자리를 대신해주었던 형의 수고는 물론, 생라면 대신 따뜻한 밥상을 차려준 옥분 할머니의 사랑으로 좋은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영재는 이미 형인 민재가 몰랐던 할머니의 진짜 속내도 이미 알고 있었던 속 깊은 아이였으니까. 시장 상인들의 원망을 들으면서도 매일 같이 시장을 들쑤시고 다닌 옥분 할머니의 하루에는 그런 마음이 담겨있다. 자신의 과거는 당신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말 못 할 아픔으로 남고 말았지만, 내게 쏟아지는 비난과 수고로움 정도로 당신들의 미래가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내 기꺼이 그리 하리라. 는 마음. 이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 되고자 자처하는 마음이었으며, 시간이 지난 뒤에 진실을 마주한 상인들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였다.

07.
죽은 엄마보다는 정분이가 더 중하고, 정분이보다는 내가 더 중하다며 엄마의 무덤 앞에서 목놓아 울던 옥분 할머니의 모습. 이 장면을 시작으로 영화는 만들어진 세계로부터 실제 세계로 나갈 준비를 한다. 그 모진 세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한스러움과 같은 것들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 고초를 겪고 돌아온 자신을 보듬어주기는커녕 제대로 한 번 안아주지도 않았던 엄마를 향한 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상처를 끌어안고 보듬어주지 않는 지금 이 사회에 대한 우회적인 서운함과 같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감정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장면, 진주댁과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장면이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것 역시 이 지점에서부터 쌓이기 시작한 옥분 할머니에 대한 감정 때문이다. 지난 세월이 더욱 아팠을 이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는 못 해줄망정, 그의 마음을 받기만 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죄스러움과 같은 것. 우리의 마음이 그 감정에 동일시 되는 순간, 관객들은 진주댁이 되고 이 영화는 옥분 할머니 그 자체가 되어 또 하나의 작은 변화를 일으킨다.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다.

 나문희라는 배우의 연기는 작품의 전형성까지도 덮을만큼 대단하다.

나문희라는 배우의 연기는 작품의 전형성까지도 덮을만큼 대단하다. ⓒ 리틀빅픽쳐스


08.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야기가 수습되는 과정이 다소 전형적이라는 것은 이 작품의 유일한 아쉬움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들이 주어진 결과를 변주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허구적인 세계와 실제의 세계가 가진 온도 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계가 생기는 것이다. 작품이 실화의 영역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이야기가 주는 오락적 요소는 다소 힘이 빠진다. 대신 그런 전형성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 나문희라는 배우의 연기는 실로 대단하게 느껴진다. 어느 배우가 그녀의 역할을 대신하여 저렇게 유연하고도 힘 있는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김현석 감독의 지난 작품들 속에는 배역에 잘 어울리는 배우들이 잘 캐스팅되어 있다는 기분이 든다. <광식이 동생 광태>(2005)의 김주혁과 봉태규는 물론, <스카우트>(2007)의 임창정도.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이나 <쎄시봉>(2015)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의외로 단단한 이야기 위에서 적절한 인물을 활용할 줄 아는 감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작품 <아이 캔 스피크>에서도 실제 사실을 모티브로 하면서 허구의 영역으로부터 그 사실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단단히도 엮어낸 작품의 힘이 그런 전형성 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무비 아이캔스피크 나문희 이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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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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