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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각(水閣)은 경북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 134에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이가 많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탄하며 굶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은퇴 장수 박응상이 살아있을 때인 1584년(선조 17)에 지은 강학 장소이다. 1935년에 중건되었다.
 수각(水閣)은 경북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 134에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이가 많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탄하며 굶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은퇴 장수 박응상이 살아있을 때인 1584년(선조 17)에 지은 강학 장소이다. 1935년에 중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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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응상(朴應祥, 1526∼1592)은 23세 때 무과에 급제했다.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 시험을 보던 중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졌을 때 버들가지로 동여매고 계속 응시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순신(1545∼1598, 32세인 1576년 급제)보다 나이로는 19세 많고, 과거 합격 경력으로는 27년 선배인 박응상에게도 재미있는 급제 설화가 있다. 한문으로는 '삼각무예(三角武藝) 신험구시(神驗九屍)', 즉 삼각산에서 무예를 닦는데 하늘이 시체 아홉으로 그의 담력을 시험했다는 이야기다.

1549년(명종 4) 박응상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한양에 올라와 있었다. 무과 시험이 며칠 앞이었으므로 그는 북한산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던 삼각산에 들어가 무예 연습을 했다. 그 무렵 삼각산은 한양 사람들의 마음에 진산(鎭山, 고을을 지켜주는 산)으로 숭배되고 있었다.

진산에는 신이 있는 법이다. 캄캄한 새벽 박응상이 말을 달리고 칼을 휘두르고 있는 중에 소복의 여인이 갑자기 나타났다. 여인은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혼자서 어쩔 수가 없이 도와달라고 했다. 박응상은 여인을 따라가 아홉 구의 시신을 염한 뒤 매장하는 일까지 마쳐주었다.

여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박응상은 그 며칠 뒤 과거에 합격했다. 사람들은 소복의 여인이 산신의 화신이고, 박응상이 무장다운 담력과 재질의 소유자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무예와 큰 배포를 지닌 사람일지라도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 박응상도 나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묘소 앞의 묘비(왼쪽)와 수각 앞의 유허비
 묘소 앞의 묘비(왼쪽)와 수각 앞의 유허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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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발발 당시 67세였던 박응상

무과 합격 후 사헌부 감찰, 첨사 등을 역임한 박응상은 제주도 대정 현감으로 있던 중 모친상을 당했다. 장례를 치른 그는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터졌다. 1592년 당시 박응상은 67세의 노령이었다.

울분이 치솟고 의로운 기운이 탱천했지만 그는 이미 노인이었다. 8년 전인 1584년(선조 17) 이래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학소로 써왔던 수각(水閣)으로 가서 칼을 꺼내 들었지만 힘이 부쳤다. 몸은 병색이 뚜렷했고 근육에는 강건한 기운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길게 신음을 토하며 수각 마루에 하염없이 앉아 있던 그는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그날 이후 그는 곡기를 끊었다.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백성들이 왜적의 칼날 아래 풀잎처럼 쓰러지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절망했고, 스스로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자괴감

이름난 효자였던 아버지(전 형조 좌랑 박민수)를 생각하면 '차마 이럴 수는 없다' 싶기도 했지만, 나라를 위한 충이 어버이를 위하는 효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려고 산속으로 숨어들 수는 없었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 이튿날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이 아버지 송복흥(전 사헌부 감찰)에게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君臣義重) 아버지의 은혜는 가벼이 하오리다(父子恩輕)'라는 편지를 써 보낸 후 순절하였듯 박응상은 굶고 굶은 끝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기여할 능력이 없는 것을 괴로워하다 스스로 굶어서 이승을 하직한 늙은 장수의 실화는 듣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눈물짓게 한다. 전장에서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죽임을 당한 경우보다도 오히려 더 애통하다. 굶주림을 견디며 절명의 순간까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탄했던 의사의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수각 앞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경북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 134 수각 위로는 하늘빛도 처연하다.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박종석(박응상의 증손자) 효행비는 남다른 현대적 조형미를 보여주어 눈길을 끈다.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박종석(박응상의 증손자) 효행비는 남다른 현대적 조형미를 보여주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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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응상, #수각, #이순신, #봉산리, #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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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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