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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크 농촌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라다키 아주머니, 새링 돌카. 내게 아무런 조건없이 먹고 자고 가라 했다.
 라다크 농촌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라다키 아주머니, 새링 돌카. 내게 아무런 조건없이 먹고 자고 가라 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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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크에서 우연히 찾아가게 된 초크람사 마을은 내가 피해 가고자 했던 티베트 불교 최대 법회인 칼라차크라 행사장이었다.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수만 명의 사람들, 그 행렬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티베트 청년이 알려준 농촌 마을 쪽으로 향하는 행렬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대부분 티베트 사람들이었지만 더러 서양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외국인 배낭여행자들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서로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곤 한다. 배낭을 멘 금발머리의 서양 여성이 내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나 또한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며 그녀에게 물었다.

"모두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법회를 마치고 숙소 돌아가고 있어요."
"칼라차크라 행사가 다 끝났습니까?"
"아니요. 오늘부터 열흘간 계속돼요."
"매일매일 열흘 동안 법회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지요."

칼라차크라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행렬를 무작정 뒤따랐다.
 칼라차크라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행렬를 무작정 뒤따랐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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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폭 좁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었다. 이 행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리 건너 저 멀리 푸른 나무들이 듬성듬성 모여 있는 농촌 마을이 보였다. 다리를 건너자 너른 벌판에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있는 외딴 가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가옥들을 향해 크고 작은 오솔길들이 이어져 있었다. 행렬에서 벗어나 그 오솔길들로 접어드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들처럼 무작정 큰 도로를 걷다가 한적한 시골 마을로 꺾어지는 길을 택했다. 그 길로 접어든 사람은 나와 한 명의 노인이 전부였다.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며 다가가자 노인은 빙글빙글 웃으며 '나마스테'로 화답했지만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저만치에서 두 명의 중년 사내가 길 옆구리로 흐르는 도랑에서 물꼬를 조절하고 있었다. 작은 도랑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그 작물을 알 수 없는 푸른 밭을 적히고 있었다. 길가에 흙벽돌 가옥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고 집마다 무를 비롯한 다양한 채소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는 텃밭이 보였다. 더러는 이제 막 옮겨 심은 듯 잎이 축 쳐진 채소 모종도 보였다.

라다크 농촌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가며 사진기를 피해 달아나고 있다.
 라다크 농촌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가며 사진기를 피해 달아나고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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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를 피해 이리저리 달아나던 수줍음 많은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기를 피해 이리저리 달아나던 수줍음 많은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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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도로 깊숙이 들어서자 고만고만한 아이들 몇몇이 길거리에서 놀고 있었다. 라다크에 와서 처음 만나는 아이들이다. 너무나 반가웠다. 사진을 찍겠노라 사진기를 들이대자 모두 까르르 웃어가며 사진기를 피한다. 히말라야 설산을 두르고 있는 북인도 오지 마을, 문시아리에서 만난 아이들처럼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들이었다. 저만치 달아나거나 흙벽에 얼굴을 파묻고 도로 아래로 내려가 숨기도 한다.

북인도 문시아리에서도 그랬듯이 아이들과 와하하 웃어가며 사진 찍기 놀이를 하고 있는데 깔판을 돌돌 말아 어깨에 둘러멘 라다키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온다. 그녀는 할아버지처럼 수염발 허연 내가 아이들과 놀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환하게 웃으며 먼저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왔다.

"나마스테, 사진 찍어도 됩니까?"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주머니였지만 사진기를 들어 보이는 내 몸짓을 금세 알아채고 사진을 찍으라며 당당하게 서서 포즈를 잡는다. 사진을 찍고 나서 내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 자신을 따라 오라며 손짓한다.

사진을 찍어가며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아주머니를 뒤 따라 가다가 언덕 위의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있는데 조만치에서 차 한 대가 멈춰 선다. 티베트 전통 복장을 한 아리따운 라다키 여성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주머니에게 손짓한다.

집으로 가는 길목, 언덕 위에 서 있는 라다키 아주머니 새링돌카.
 집으로 가는 길목, 언덕 위에 서 있는 라다키 아주머니 새링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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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링 돌카 아주머니네 집. 이 집에서 내게 아무런 조건 없이 머물다 가라 했다.
 새링 돌카 아주머니네 집. 이 집에서 내게 아무런 조건 없이 머물다 가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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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는 외딴집 앞에 서 있는 젊은 여성에게 가볍게 손짓하더니 내게 뭔가를 마시는 시늉을 한다. 짜이 아니면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는 것 같다. 차에서 내린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엄마'라고 한다. 아주머니의 딸이었다. 그녀는 영어를 썩 잘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한국. 아세요?"
"그럼요. 남한 사람이겠죠? 우리 엄마가 짜이를 대접하고 싶어 해요. 괜찮겠죠?"
"고맙습니다."

그녀의 영어는 내가 제대로 못 알아들을 정도로 유창했다. 길가에 자리한 모녀의 집은 제법 규모가 있었고 집 저편으로 히말라야 설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멀뚱멀뚱 집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내게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우리 엄마가 당신은 이곳에서 머물러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예?"
"민박을 하시나요?"
"아니요. 당신이 만약 숙소를 찾지 못했다면 우리 집에서 조건 없이 머물러도 됩니다."

그녀가 조건 없이 머물러도 된다는 말에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나를 언제 봤다고 모녀가 살고 있는 이 외딴집에 남정네가 머물러도 된다는 것인가. 그것도 추레한 거지꼴의 남정네를.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만난 내게 자신의 방을 내준 네팔 소녀 씨라파의 가족이 떠올랐다. 하지만 씨라파에게는 부모가 있었다. 그녀의 영어를 잘못 이해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물었다.

"이 집에서 숙박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 그래요. 당신의 가방은 티베트 스님들의 가방인데… 수행자인가요?"

그녀는 내 어깨에 걸쳐 메고 있는 붉은 천 가방을 손짓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냥 여행자일 뿐입니다. 이것은 동생이 선물한 가방입니다. 그는 티베트 불교의 스님입니다."
"정말로요? 당신 동생이 티베트 스님이라고요?"
"예 맞습니다."
"그럼 그 스님도 같이 왔나요?"
"아니요. 그는 지금 한국에 있습니다."
"동생이 티베트 수행자라니, 너무 반갑네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티베트 불교를 믿고 있어요."

그녀가 내온 달콤한 짜이를 마시며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녀는 이 마을에서 6대째 살고 있고 그녀의 엄마는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로컬 피플' 이었다. 내가 라다크에 온 가장 큰 목적은 라다크 농촌 사람들의 생활에 끼어드는 것이었기에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그녀의 엄마 이름은 새링 돌카, 그녀의 이름은 디스킷 돌카였다. 디스킷은 티베트 말로 '행복'이라는 의미가 깃들여 있다고 한다. 내가 짜이를 다 마실 무렵 그녀는 불과 20여 분 전에 만난 나를 철석같이 믿고 집안 곳곳으로 안내했다.

손님들을 위해 따로 마련한 방. 한국으로 치자면 그 옛날 사랑방이라 할 수 있다.
 손님들을 위해 따로 마련한 방. 한국으로 치자면 그 옛날 사랑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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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을 모신 공간도 따로 마련해 놓았다.
 부처님을 모신 공간도 따로 마련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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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는 4개의 크고 작은 방이 있었다. 주방과 거실을 겸하고 있는 너른 방은 엄마의 방이었고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가 놓인 또 다른 방은 그녀의 공간이었다. 힌두 신을 모신 방을 따로 마련해 놓은 북인도 코사니의 시골집에서 보았던 것처럼 부처님을 모신 작은 방도 있었다. 작고 아담한 부처상이 놓인 신단에는 티베트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달라이라마 존자의 사진이 보였다. 돌카네 역시 달라이라마 존자를 생불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이 모셔진 작은 방 옆으로 제법 너른 손님방이 있었다. 그녀 말로는 라다키 사람들 대부분이 집안에 부처님을 모신 공간과 함께 손님방을 따로 마련해 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로 치자면 조선 시대 유교 집안의 개인 사당과 사랑방인 셈이었다.

"이 방에서 머물다 가세요."
"저야 좋지만…"

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그동안 떠돌아다니다 만난 인도와 네팔의 숙소를 떠올렸다. 아무리 조건 없이 머물다 가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비용은 지불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정도의 넓고 깔끔한 방에다가 식사까지 하려면 비용이 꽤 나올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민박을 하려면 하루에 얼마 정도 내야 합니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우리는 돈을 받지 않아요."

나는 너무나 고맙다고 말하면서 이 집에 머무는 조건으로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재차 돈을 받는 민박집이 아니라며 사양했다.

"엄마는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을 큰 축복이라 여기고 있어요. 당신이 우리 집에 머물다 가신다면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축복은 제가 받은 것이지요."

이들의 자비 앞에서 돈 얘기를 꺼낸 나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 어제 이 방에 손님이 한 분 오셨어요. 남인도에서 온 젊은 인디언인데 함께 쓰셔도 되겠지요?"
"그럼요. 친구도 사귀고 좋지요."
"혹시 두 사람이 쓰기에 불편하시면 제 방을 쓰셔도 됩니다. 저는 엄마하고 같이 자면 되니까요."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세 사람이 함께 지내도 이 방이면 충분합니다. 그동안 저는 여행을 하면서 아주 허름한 방을 이용했습니다. 이 방은 거기에 비하면 호텔입니다."
"레에 배낭을 놓고 오셨다고 했죠? 지금 짐을 옮겨도 되고 내일도 상관없습니다. 아무 때나 오세요. 여기서 머무는 기간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새링 돌카의 딸 디스킷 돌카. 그녀의 영어는 유창했다. 나중에 알게된 것인데 그녀는 라다키 유학파, 뉴델리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한다.
 새링 돌카의 딸 디스킷 돌카. 그녀의 영어는 유창했다. 나중에 알게된 것인데 그녀는 라다키 유학파, 뉴델리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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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들이 기적처럼 다가왔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내가 말할 수 있는 영어를 총동원해 가족관계를 비롯해 그동안 살아온 이력을 푼수처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내가 쓴 서적 중에는 사소한 일상이 기적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를 담은 <모두가 기적 같은 일>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오늘도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동안 인도 네팔을 떠돌면서 힘들 때마다 기적처럼 도움의 손길들이 나타났다고 말했더니 빙그레 웃으며 엄마에게 라다키어로 그 말을 전달했다. 그 말을 듣고 나자 엄마, 새링 돌카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합장을 했다. 나 또한 그녀에게 머리 숙여 합장을 하며 말했다.

"돌카, 당신과 당신의 엄마를 만난 것은 내게 기적 같은 일입니다."

숙소에 맡겨 놓은 배낭을 가지러 레로 나서는 내 입에서는 리왈샤에서부터 줄곧 읊조렸던 옴마니반베움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오래된 미래 라다크'에 나오는 자비로운 라다크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다. 그런 일이 전혀 예상치 못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욕심 없이 좋은 마음을 먹으면 그 좋은 마음대로 이뤄진다는 말, 그 말 그대로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태그:#라다크, #칼라차크라, #새링돌카,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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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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