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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칭 '교통 오타쿠',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가 연재합니다.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교통, 그리고 대중교통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합니다. 가려운 부분은 시원하게 긁어주고, 속터지는 부분은 가차없이 분노하는, 그런 칼럼도 써내려갑니다. 여기는 <박장식의 환승센터>입니다. - 기자 말

"잠에 들지 않는 도시, 가로등은 밤을 새며 아침까지 춤을 추지 / 같은 시간 다 똑같은 방향, 눈 감고 있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지 / 왼팔엔 힘, 내 오른쪽 팔엔 야망, 왼쪽엔 빛. 오른쪽 눈에는 / 사랑을 담기 시작하네 난 나만의 섬, 자정이 넘은 삼화고속 맨 뒤에서" - Boi.B의 <삼화고속> 중에서

삼화고속의 '쓸쓸한 퇴장'이 담긴 안내문.
 삼화고속의 '쓸쓸한 퇴장'이 담긴 안내문.
ⓒ 삼화고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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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고속이 지난 9월 6일 마지막 노선인 계양구청 - 서울역 간 1500번의 매각으로 광역버스 운행을 중단했다. 이미 1500번의 인가를 쪼개 1501번을 만들어 즉시 마니교통에 매각한 것을 보며 짐작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삼화고속이 광역버스 운송시장에서 퇴장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다.

경인고속도로의 '황제'였던 삼화고속의 위세는 대단했다. 삼화고속은 1970년대부터 인천과 서울역을 잇는 시외버스를 운행하며 나들이객, 출근객들을 실어날랐고, 2004년 이들 노선을 모두 광역버스로 형간전환을 했을 때는 전철 이용객이 급락할 정도였다. 그랬던 삼화고속이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동안' 광역버스 사업을 모두 철수하기에 이르러,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대다수다.

지난 40년 동안 경인을 잇는 발 역할을 해왔던 삼화고속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삼화고속이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빠르게 광역버스 시장에서 철수했는지, 그리고 인천 시민들에게 삼화고속이란 어떤 존재였는지 찬찬히 짚어본다.

인천에서 삼화고속 모르면 '간첩'이던 시절

'인천에서 서울가는 버스'하면 삼화고속이 떠올랐던 시절이 있었다. 사진은 1500번.
 '인천에서 서울가는 버스'하면 삼화고속이 떠올랐던 시절이 있었다. 사진은 1500번.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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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경인지역을 한 번에 잇는 최초의 고속버스는 1969년 4월 12일 운행을 시작한 한진고속(2006년 동양고속에 매각)이다. 삼화고속은 1973년 부평에서 출발해 서울 종로로 향하는 고속버스 운행을 시작했다. 이 고속버스는 1979년 부천을 일부 경유하는 시외직행버스로 인가를 바꾸게 된다.

콩나물시루였던 비둘기호나 수도권전철을 타기보다는 빠르고 쾌적한 시외직행이 편리했기 때문에 버스 이용객 수는 날마다 치솟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며 서울의 위성도시, 특히 인프라가 갖춰져있던 부천과 인천이 급격하고 빠르게 발전하며 인천 각지에서 서울로 가는 수요가 늘어난 것도 버스 흥행에 한 몫했다.

이후 삼화고속은 2004년부터 2005년까지 시외버스였던 인가를 광역버스로 속속 바꿨다. 그 뒤 2007년 수도권 광역 환승제도가 도입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홍대입구역 버스 정류장을 서울 버스 대신 빨간색으로 온 몸을 덮은 삼화고속 버스가 꽉 메우고 있었던 적이 있었고, 서울역 광장에 삼화고속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긴 줄이 늘어섰던 적도 있었다.

'인천에 사는 사람 중에 '삼화고속'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삼화고속은 인천지역의 패왕으로 자리잡았다. 삼화고속은 북쪽 검단에서부터 남쪽 송도까지, 그리고 중간의 부평과 구월동에 이르기까지 인천 곳곳에서 합정역, 종로, 서울역 그리고 강남으로 향하는 노선 수십 개를 운행했다.

전성기 삼화고속은 연안부두에서 서울역, 인천 송도에서 부천을 거쳐 서울역, 인천 가좌동에서 양재역, 심지어는 인천터미널에서 종로, 연수동에서 구로디지털단지역을 거쳐 대방역까지 가는 노선까지 운행했다. 하지만 삼화고속의 '리즈시절'은 고유가 시대가 열리고, 공항철도가 개통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운행요건 악화는 파업으로, 그리고 노선 매각으로

지난 2015년 삼화고속이 운영권을 포기한 2500번의 모습. 2500번은 신강교통으로 이전된 이후 서울 도심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종로행 광역버스의 철수인 셈이다.
 지난 2015년 삼화고속이 운영권을 포기한 2500번의 모습. 2500번은 신강교통으로 이전된 이후 서울 도심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종로행 광역버스의 철수인 셈이다.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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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발유 2000원' 시대가 열리고, 인천국제공항철도 완전 개통, 서울 9호선 개통 등으로 삼화고속 대신 다른 교통수단을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운행요건이 점점 악화되었다. 자연히 기사들, 사원들에 대한 처우 역시 악화되었다. 기사들의 시급이 4727원밖에 되지 않고, 21시간 근무에 휴식이 보장되지 않다는 보도가 연일 이어졌다.

결국 노조는 2011년 총파업에 돌입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노선이 운행중단에 이르렀다. 총파업은 대부분의 수요가 삼화고속을 이탈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 공항철도가 삼화고속의 소요시간와 차이가 적고 정시성 역시 높아, 파업이 끝나고 노선이 정상운행 한 이후에도 승객이 돌아오지 않았다.

인천시 역시 조정에 들어갔고, 결국 삼화고속은 파업 전 20개 노선을 13개 노선으로 줄여야만 했다. 이어 계속되는 노선 매각 와중 2013년 다시 파업에 돌입하게 되었고, 이는 직격탄이 되었다. '삼화고속의 상징'이었던 1400번(인천터미널 - 서울역)과 1000번(인천가좌동 - 서울역) 노선 역시 작년과 올해 마니교통에 팔렸다.

삼화고속이 운행했던 1200번의 차내 모습. 1200번은 2016년 신동아교통에 매각되었다.
 삼화고속이 운행했던 1200번의 차내 모습. 1200번은 2016년 신동아교통에 매각되었다.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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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난 4월, 삼화고속은 마지막 남은 광역버스 노선이었던 1500번의 인가를 1500번과 1501번 두 개로 쪼갰다. 1501번은 6월 10일 마니교통에 매각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노선이었던 1500번 역시 지난 6일을 기해 마니교통으로 매각되었고, 9월 5일을 마지막으로 삼화고속은 광역버스 사업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삼화고속의 철수에 담긴 교훈 역시 적지 않다. 2011년 총파업이 일어났던 배경을 다시 살펴보면 운전기사에 대한 무리한 노동 강요가 눈에 띈다. 사실 이 문제는 삼화고속만의 문제는 아니다. 불과 며칠 전에도 무리한 노동으로 인한 '버스기사 졸음운전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천광역시 전체 버스의 60%, 광역버스의 80%를 소유했던 삼화고속은 과거 인천 버스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광역버스 사업 철수로 인해 인천 시민들의 공감을 얻었던 Boi.B의 <삼화고속> 역시 이제는 추억 속으로 묻힐 것이다. 앞으로 삼화고속이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는 지속적으로 운행한다지만, '삼화고속=인천 서울간 버스'라는 공식을 이제는 지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삼화고속 노선에 어색하게 붙여진 '마니교통' 사명, 그리고 아직도 흔적으로 남아있는 광역버스 전용 정류소의 '삼화고속 마크'를 보며, 20년 뒤 '삼화고속'을 기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역사는 돌고 돌고, 교통의 경우 폐선과 신설이 자주 이루어진다지만 삼화고속은 꽤나 오래 뇌리에 남을 것만 같다. 이처럼 교통수단 자체가 '상징'이자 지역을 대표하는 '황제'가 되었고, 그 상징에 걸맞지 않게 빠르게 몰락하고 철수한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내 아버지의 땀과 스무살의 나, 이 모든 것들을 싣고 달려가는 삼화고속"이라는 <삼화고속>의 말미 가사를 다시 읊는다.



태그:#삼화고속, #인천광역시, #인천 버스, #광역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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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기사를 쓰는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그러면서 컬링 같은 종목의 스포츠 기사도 쓰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리고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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