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더 테이블> 메인 포스터.

영화 <더 테이블> 메인 포스터. ⓒ 엣나인필름


01.

작년에 개봉한 영화 <최악의 하루>(2016)는 김종관 감독의 이름을 많은 사람에게 알린 작품이었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영화 관련 작업을 해왔지만, 생각보다 유명해지지는 못했다. 물론 그가 유명해지고 싶어했다는 뜻은 아니다. 지난 시간 동안 그는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이면서 책을 출판한 작가이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 사진가이기도 했다. 세간의 평가나 관심과 무관하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과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왔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의 선아나 <최악의 하루>의 은희처럼 조금씩 천천히 걸어왔던 감독. 그는 누구보다 인물의 섬세한 결과 작품의 분위기를 잘 연결해내는 감독이었다. 이번 작품인 <더 테이블> 역시 그의 지난 작품들이 갖고 있던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모두 4편의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굳이 따지자면 형식적으로는 옴니버스식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다. 각각의 이야기가 분절되어 있기는 하지만 카페라는 하나의 공간과 같은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으로 연결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공간이 변하는 대신 커피와 담배라는 오브젝트의 연결성을 가지는 짐 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2006)와는 반대의 경우라고 볼 수 있다.

02.

첫 번째 만남. 테이블 앞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유진(정유미 역)과 창석(정준원 역)은 과거에 연인 사이였다. 그동안 남자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고, 여자는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 아마도 남자가 먼저 연락을 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모습이 처음부터 순수한 의도로만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 남자보다는 조금 더 신중한 편인 듯 보인다. 카페의 창가에 위치한 탓에 그녀가 팬들에게 곤욕을 치를까 걱정하는 남자에게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가방 속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사인 전문 용지가 준비되어 있다. 자신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용지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시간이 오래 지난 만큼, 두 사람은 서로 조심스럽게 각자의 사라진 시간에 대해 추측해간다. 그 조심스러움이 되려 서로에게 조금씩 상처를 남기는 듯하지만. 보고 있자니 어쩌자고 지금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뭘 믿고, 뭘 안 믿고 있는데?"

급기야 각자의 입장을, 서로의 시간을 대변하기에 급급한 두 사람. 남자는 여자 앞에 여전히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는 모습이, 여자는 그런 남자가 자신을 너무 부풀려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두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쓰러움을 느끼게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화는 이상하게 흘러간다. 불편하다. 남자는 첫사랑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했던가? 남자는 과거의 시간을 지금 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자 한다. 어쩌면 처음에는 과거의 여자친구가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동경뿐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점점 그 마음에 욕심이 끼어드는 것 같다. 반대로 여자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그대로 묻어두고자 한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제라면 그게 문제다.

 첫 번째 테이블.

첫 번째 테이블. ⓒ (주)엣나인필름


남자가 여자에게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는 장면에 이르면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이상 수평을 이루지 못한다. 어쩌면 잠시 일렁였던 욕심을 남자는 내려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언감생심. 그렇다고 해서 순수한 의도라는 것은 아니다. 욕심과 관계없이 그는 처음부터 순수하지 못했다. 그녀의 자리로 몸을 옮겨 함께 사진을 찍자마자 남자는 메신저로 그 사진을 기다리고 있었을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바쁘다. 애초에 그는 그런 목적이었을까? 여자는 당혹스럽다. 그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겠지만, 그는 조금 다를 것 같았다. 아니, 달라야만 했다. 조금 전 사진을 찍기 위해 그가 옆으로 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눈이 반짝이고 말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끝이다. 남자가 아쉽다는 말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그래.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처음과 사뭇 다르다. 온전히 사무적인 태도. 대답은 같았지만 두 사람에게 아쉬움은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남자에게 남은 아쉬움이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만남'이었을 것이고, 그녀에게 남은 아쉬움은 간직하고 있던 시간조차 무너져 내리게 만든 '지금의 만남'이었을 테니.

03.

두 번째 만남. 두 사람은 올해 들어 처음 만났다. 남자의 이름은 민호(전성우 역), 여자는 경진(정은채 역). 만나자마자 여자의 뱉은 첫 마디는 새해 복을 많이 받으라는 것이었다. 남자의 반응으로 볼 때, 그 인사는 적절한 때를 만나지 못한 표현이었고 여자는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밉게 군 것 같다. 보통은 여자가 이렇게까지 까칠하게 굴면 남자도 짜증이 나거나, 주눅이 들거나 해야 하는데 이 남자는 그렇지 않다. 어떤 말을 해도 참 긍정적이다. 자꾸 웃는다. 속도 모르고 자꾸 웃는 남자의 태도에 여자는 부아가 조금 치밀어 오른다.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이 자리에 나오기는 했지만 여차하면 시계만 돌려주고 떠날 참이었다. 그래 시계. 남자가 여자의 집에 왔을 때 두고 간 물건이다. 남자는 그동안 한국에 없었다. 지난 4개월 정도를 인도와 유럽을 돌아다니며 세상 구경을 했다. 물론 그가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걸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그녀도 상상하지 못했다.

 두 번째 테이블.

두 번째 테이블. ⓒ (주)엣나인필름


"연락은 왜 주신 거예요? 조금 더 일찍 오실 줄 알았어요. 좋은 걸 보면 사진이라도 한 장 보내줄 줄 알았거든요."

사실 남자도 자신이 그렇게 오래 떠나있게 될 줄 몰랐다. 다니던 직장을 나와서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 우연히도 그사이에 그녀를 만났고, 그 날 밤 그녀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었을 뿐이다. 두 사람은 그때 그 시간 속에 머물러 있던 서로에게 짧지만 큰 사랑을 느꼈다. 그가 자리를 비운 4개월의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어 버렸지만. 그녀는 직장을 옮겨 힘들고 박봉인 일을 하게 되었고, 진짜 사랑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는 신기루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린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 비어버린 시간이 그녀가 나쁜 생각만 하게 만든 건 아닐까? 여자는 남자의 미소를 꺼뜨리고 말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듯 부정적으로만 대꾸하려 든다. 그러면 뭐하나. 오히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조심스러운 것들이 많아 상처가 되는 사이인데. 여자도 무너뜨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채워드려도 될까요?"

그녀가 내미는 시계에 그제야 진심을 전하는 남자. 그녀를 위해 체코에서 사 온 시계를 꺼낸다. 여자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차갑게 굴겠노라 했던 다짐을 모두 잊어버린다. 모든 게 녹아버리고 말았다. 내내 웃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차가운 태도 앞에 그도 조금은 긴장을 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웃음이 물꼬를 트기 시작하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그 후로도 주섬주섬 선물을 꺼내는 남자. 그녀는 틀렸다. 그는 떠나 있었던 동안 한순간도 마음을 놓친 적이 없었다. 모두 그녀가 떠올랐던 순간마다 하나씩 모아온 것들이었다. 오늘 밤 여자는 그의 집으로 갈 것이다. 그 날 밤의 사랑이 다시 한번 닿을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집에 그의 시계가 홀로 남겨져 있었던 건 어쩌면 우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04.

세 번째 만남. 조금 전까지 씩씩하던 테이블 위의 꽃이 조금씩 시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담긴다. 은희(한예리 역)는 한 번 식을 올린 적이 있었다. 아직 법적으로는 처녀인데 지난 결혼에서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사기 결혼이었다. 그녀는 지금 또 한 번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이번에는 진짜다. 돈 때문이 아니라 정말 좋아서 하는 결혼. 그래도 모든 게 사실일 수는 없었다. 이번엔 그녀도 솔직해져 보려고 했던 것 같지만 결국 없는 엄마를 만들어냈다. 그녀에겐 엄마가 필요하다. 그래서 숙자(김혜옥 역)를 만났다. 진짜 엄마는 아니지만, 그녀가 그렇게 해 줄 것이다. 엄마는 이 바닥의 생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한두 번 겪어 본 솜씨가 아니다. 처음에 그녀의 결혼이 의심받은 까닭 역시 그 때문이다. 엄마는 원래 다 알고 있다. 그녀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이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진짜 사랑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처음엔 그렇지 않았다. 돈 많은 사장을 어떻게 해 보려고 찾아간 스포츠용품점에서 사원이었던 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녀의 말처럼 그동안 살아왔던 시간 속에 진실로 솔직했던 순간이 얼마나 있었겠냐 마는, 이 테이블 앞에서는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세 번째 테이블.

세 번째 테이블. ⓒ (주)엣나인필름


"이렇게 살다 보면 솔직할 경우가 별로 없잖아요."

엄마는 그녀의 결혼식에 집에 준비해 두었던 옷을 입고 가겠다고 말한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버린 진짜 딸의 결혼식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귀한 옷이다.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감방에 가 있느라 어깨도 한 번 걸쳐보지 못한 그 옷을 엄마는 입고 가겠단다. 그녀의 결혼식이 세상을 떠난 딸과 같아서였을까? 조화가 조금씩 물을 머금기 시작한다. 부탁한 것도 아닌데 상견례 자리에서 엄마의 역할로 해야 할 말을 미리 조근대는 엄마를 보며 딸의 눈은 몽글거리기 시작한다. 잘해주셨단다.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엄마로 인해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함이 전해져 온다. 조금 시들어버리기는 했지만 물을 머금은 조화가 이제 막 생화가 되어 꽃잎을 늘어뜨렸다. 두 사람은 그동안 서로에게 결핍되어 있었던, 어머니와 딸의 역할을 대신하는 중이다. 진짜가 아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가짜인 것은 더욱 아니다.

05.

운철(연우진 역)은 과거에 자신에게 닥칠 현실의 무게를 감내하기 두려워 혜경(임수정 역)을 떠났던 것 같다. 널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어. 라고 가끔 말하는 것처럼. 그때 그는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었다. 책임지라고 한 사람도 없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이제 와 비겁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 이제 막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를 다시 만나는 자리에 혜경은 술을 한 잔 마시고 왔다. 무엇인가 초조하기라도 한 듯 문 앞에서 담배도 한 개비 피운다. 다른 남자와 결혼을 준비 중인 여자. 남편이 될 사람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결혼은 결혼이고 따로 만나자고. 어쩌면 그녀는 그 남자와의 이별이 아직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다.

"헤어지라면 헤어질게. 말만 해. 다시 돌아갈게."

남자는 도의적으로 그럴 수 없다고는 했지만, 아직도 망설이는 모습을 거두지 못한다. 아직 여자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여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온갖 달콤한 말로 남자를 꼬드겨보지만, 결국 여자도 다시 시작된 그의 답답함에 마음을 거두어 버린다. 예전에 자신을 떠날 때도 그랬었다. 카페를 나오며 차까지라도 바래다주겠다는 그의 제안에 블랙박스를 핑계 대기는 했지만, 조금 전 그녀의 결심이었다면 그런 단호한 거절이 아니라 다른 제안을 했으리라. 함께 택시를 타자던가, 그의 집으로 가자던가, 그것도 아니면 함께 밤새워 이 골목을 걷자고.

 네 번째 테이블.

네 번째 테이블. ⓒ (주)엣나인필름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두 사람은 애초에 서툴렀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보고만 그 장면이 눈에 참 '까끌'거린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테이블 위에서 시들어가던 꽃잎을 모두 뜯어버린 그와, 그 꽃잎들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한 손에 모아 처음에 꽃이 살아 숨 쉬던 컵 속으로 집어넣던 그녀의 모습. 작은 존재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한 두 사람이 지난 시간 속에서 서로의 마음은 보듬어 줄 수 있었을까? 남자의 망설이던 모습도. 여자의 강요하던 모습도. 왜 두 사람의 마음이 가려던 길과 사람이 선택한 길이 달랐을지 조금 알 것도 같다.

06.

영화는 모두 끝났다. 마음 한쪽이 따뜻하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하다. 네 번의 만남이 끝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덩그러니 남겨진 테이블을 비추고 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도 주문한 음료를 다 마시지 못하고 자리를 일어나고 만 것이다. 그들 모두는 저마다 지나간 시간 속에 두고 온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 영화 속에 숨겨져 있던 이 표현은 영화 속 작은 테이블 위에서 인물들의 공통된 심리를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감독에게 삶이란 여기 남겨진 음료와 같은 게 아니었을까? 첫 주문은 언제나 나의 선택이었겠지만 항상 모두 마실 수는 없는 것. 어떻게든 남겨지고야 마는 그런 것. 이런 섬세한 연출을 만나고 나면 그 작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 감정을 단순히 슬프다거나, 감동적이라는 단순한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쩌면 이 글이 길어진 까닭이기도 할 수 있겠다. 김종관 감독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지기 시작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무비 김종관 더테이블 넘버링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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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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