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토믹 블론드> 포스터

<아토믹 블론드> 포스터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01.

데이빗 레이치 감독은 현재 헐리우드에서 주목하고 있는 액션 감독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전문적으로 연출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아르고>(2012), <타운>(2011)를 연출한 벤 에플릭이나 <언브로큰>(2015), <바이 더 씨>(2016)의 안젤리나 졸리처럼 유명한 배우 출신의 감독도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액션 장면들을 만들어 온 스턴트 전문가였을 뿐. 브래드 피트와 장 클로드 반담의 액션을 대신 했을 뿐 아니라, <매트릭스> 시리즈의 곳곳에서도 그의 대역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은 대역 전문 연기자였다. 80여 편의 작품에서 대역을 맡아왔던 그가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것은 영화 <존 윅>(2014).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과 공동 연출을 맡은 것이기는 했으나 그 재능을 인정 받아 이번 작품인 <아토믹 블론드>의 단독 연출을 맡고, 팀 밀러 감독이 하차한 <데드풀 2>의 감독으로 선임된 상태다. – 참고로, <존 윅>의 후속작인 <존 윅 – 리로드>(2017)의 연출에는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만 참여했다. – 그 때문에 관객들에게는 감독의 연출력보다는 샤를리즈 테론이라는 배우의 연기력이 더 많은 관심을 끌게 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02.

가장 최근에 큰 인상을 남긴 작품이라면 아무래도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2015)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다양한 작품 속에서 선 굵은 연기를 보여준 샤를리즈 테론에 대한 이야기다. 이번 작품 <아토믹 블론드>에서 맡은 로레인(샤를리즈 테론 역)이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얼음이 가득 찬 욕조에서 등장하는 첫 모습부터 압도적이다.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 역할로 등장하는 제임스 맥어보이의 모습 역시 그 어떤 작품보다 강렬한데, 그녀의 모습은 그의 분위기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다. 그녀가 수행하는 액션 장면들의 강도도 생각보다 높은 편이다. 복잡한 장치 없이 끊임없이 연결되는 그녀의 액션은 언젠가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에서 맷 데이먼의 액션과 유사해 보이기까지 한다. 특히 스파이글래스(에디 마산 역)를 동베를린으로부터 탈출시키던 도중 등장하는 계단 액션 장면은 롱테이크 특유의 긴장감을 가득 담아 그녀의 연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지점이다.

 <아토믹 블론드> 스틸컷. 롱테이크로 이루어지는 계단 액션 장면.

<아토믹 블론드> 스틸컷. 롱테이크로 이루어지는 계단 액션 장면.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03.

그동안 숱한 작품들이 스타일리시하다는 수식어와 함께 등장했지만, 이번 작품은 정말 그런 수식어가 어울리는 면모들을 갖추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베를린의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명암은 물론, 베를린 장벽에 그려진 그래비티의 페인트 스프레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치들까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전체적인 톤앤매너를 맞추는 것인데, 데이빗 레이치 감독은 그런 디테일 한 점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신경을 쓴 모습이다. 음악은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또 하나의 요소다. 적재적소에 활용되는 적절한 음악은 이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장면의 변화나 긴박함의 정도에 따라 완급조절이 대단히 뛰어난데, 이 영화의 음악 감독인 타일러 베이츠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음악을 연출한 것을 알게 되고 나면 과연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그 역시 최근 데이빗 레이치 감독만큼이나 주목을 받고 있으며, 장르는 다르지만 <라라랜드>(2016)의 저스틴 허위츠 감독과도 비교가 되고 있다.

04.

영화는 베를린이 동쪽과 서쪽으로 양분되어 있던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전 세계 스파이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파일을 차지하기 위한 각국 스파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로레인 역시 그런 상황 속에 혼란스러운 베를린으로 급파된다. 다만, 작품이 액자식 구성을 차용하여 상황이 끝난 뒤에 그녀의 기억을 토대로 진행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영화의 흐름 상 굳이 이런 방식을 택할 필요는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감독은 하나의 내러티브가 끝나는 지점을 교묘하게 잘 잘라내 그 연결고리마다 로레인이 보고를 하는 현재의 장면으로 돌아오는 형식을 취한다. 의외로 이 장면은 영화의 호흡을 조절하고,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적절한 역할을 한다. 취조실처럼 꾸며진 밀폐된 공간과, 그녀의 이야기를 유리창 너머 숨겨진 공간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이 은밀한 분위기를 주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그녀의 실체를 러닝타임 내내 감추어 놓는 역할을 하는 것 역시 감독이 택한 방식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아토믹 블론드> 스틸컷.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 베를린은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아토믹 블론드> 스틸컷.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 베를린은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05.

쉽게 지나칠 수 있지만 몇 차례 계속해서 등장하는 작품 속 텔레비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화면 속에서는 동독과 서독을 가로지르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의 순간들에 대한 소식이 등장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때의 현실에서 그랬듯이, 영화 속에서도 모든 사람은 광장으로 모여 그 순간을 기뻐하고 행복해한다. 장벽의 붕괴는 오랫동안 지속하여 온 냉전 시대의 종말을 상징함과 동시에 희망과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런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로레인에게도, 퍼시벌에게도, 그리고 억울한 죽임을 당해야 했던 델핀(소피아 부텔라 역)에게도 냉전의 종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던 어두운 세계가 무너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스파이라는 것은 그런 직업이니까. 결국 선택은 우리가 한 것이라고 로레인이 델핀에게 이야기하는 지점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결국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밝은 빛이 비칠수록 그 뒤로 드리우는 그림자의 그늘은 더욱 어두워지는 법이다. 뒷골목에서 죽어가던 퍼시벌은 비로소 자신이 베를린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장벽이 무너진 베를린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06.

대다수의 미디어들은 천만 관객 혹은 극성수기의 블록버스터 작품에 무게를 두지만, 매해 이런 영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작품의 장르를 최대한으로 부각시키면서 그 스토리도 적절하게 끌고 나가는 힘이 있는 작품들 말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 <더 랍스터>(2015)가 그랬고, 작년엔 드레이크 도리머스 감독의 <이퀄스>(2016)가 그랬다. 최근 작품이 아닌 그 이전의 작품들을 꼽자면 셀 수가 없을 정도일 것이다. 아쉽게도, 이 작품 <아토믹 블론드>도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반 관객들에게 어필하기에는 감독이나 배우의 이름값이 현실적으로 높다고 볼 수도 없으며, 개봉 첫 주에 470개관으로 확보되어 있던 스크린 수도 불과 3일만에 440개관 수준으로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 아쉬운 일이다. 다소 익숙한 장면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모든 면에서 액션이라는 장르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과 샤를리즈 테론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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