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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9일 삼성역의 광고 패널에 미쿠 10주년 기념 광고가 나오고 있다.
 8월 19일 삼성역의 광고 패널에 미쿠 10주년 기념 광고가 나오고 있다.
ⓒ 미쿠월렛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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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삼성역에 '하츠네 미쿠'가 떴다. 애니메이션 광고가 아니다. 엄연한 '아이돌 데뷔 축하 광고'다. 이 행사를 위해 팬들이 총 5000여만 원을 냈다.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의 캐릭터를 위해 팬들이 모였고, 하츠네 미쿠를 '업'으로 하겠다는 젊은이가 나섰다.

삼성역에 걸린 하츠네 미쿠 10주년 기념 광고는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광고로 오해할 법하다. 주인공이 실존인물이 아니라 '그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광고는 한국의 많은 아이돌 팬들이 생일이나 데뷔를 축하하기 위해 거는 '조공 광고'처럼 하츠네 미쿠의 팬들이 돈을 모아 건 광고다. 국내 미쿠 소모임 '미쿠월렛즈'는 국내·해외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총 5000여만 원에 이르는 후원을 받았다.

광고가 걸린 지난 8월 19일, 소식을 들은 팬들이 첫차로 삼성역에 모여 인증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팬들의 인증 사진은 6000리트윗을 넘겼고, 해외 미쿠팬 뉴스 사이트에서는 이것을 기사로 쓰기도 했다.

하츠네 미쿠는 2007년 8월 31일 일본의 크립톤 퓨처 미디어라는 회사에서 출시한 노래를 불러주는 소프트웨어(보컬로이드)이다. 과거 사이버 가수 '아담'의 뮤직비디오는 3D로 만든 캐릭터에 사람이 부른 노래를 입힌 반면, 미쿠는 사람 목소리에 기반한 프로그램이 있고 작곡가가 가사와 음정을 입력하면 이에 맞춰 노래를 불러준다.

처음엔 음성합성 소프트웨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며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등 소프트웨어가 아닌 가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쿠 미쿠 댄스'(MMD)라는 3D 프로그램이 가세하면서 노래만 부르는 가수에서 노래와 춤을 겸비한 '사이버 디바'로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2009년 홀로그램을 이용해 콘서트를 시작으로 매년 세계 곳곳에서 콘서트를 열어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아이돌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2011년 토요타 차량 광고에 미쿠가 쓰였고, 국내에서는 LG 휴대폰인 G5의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미쿠 특유의 목소리가 리믹스된 곡이 쓰였다.


(하츠네 미쿠 콘서트)


(Toyota USA 2011년 미쿠 출연 광고)

하츠네 미쿠 출시 10년 뒤인 2017년, 한국에서도 미쿠에 대한 '오타쿠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일본 여행을 통해, 미쿠가 나오는 게임을 통해 미쿠를 알게된 이들이  팬이 됐고, 이들이 모여 '한국에도 미쿠팬들이 많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이 이벤트를 계획한 '미쿠월렛즈'의 이형철씨는 미쿠를 통해 생업이 바뀐 사람이다. 일명 오타쿠 문화라 불리는 서브컬처를 소비하는 입장에서 하츠네 미쿠 이벤트를 계획하면서 저변이 넓혀지고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콘텐츠 사업가'로 변모한 것이다. 취미와 직업이 일치한다는 '덕업일치'를 이룬 이형철씨를 지난 8월 24일 만나  성공한 덕후 '성덕'의 비결을 물어봤다.

'질 수 없다'는 팬심으로 시작된 광고 모금

미쿠월렛즈의 이형철씨를 만나 하츠네 미쿠 10주년 기념 광고 프로젝트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미쿠월렛즈의 이형철씨를 만나 하츠네 미쿠 10주년 기념 광고 프로젝트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 미쿠월렛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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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계기로 미쿠에 빠지게 되었는지 설명 부탁드린다.
"페이스북에 '원데이 원미쿠' 해시태그(#원데이원미쿠)를 붙여가며 하루에 한 장씩 미쿠의 사진을 올렸다. 어떤 한 분이 자신이 운영하는 단체 카톡방에 저를 초대해주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검증된 '미쿠를 좋아하는 사람'만 모인 방이었다. 이 방을 기점으로 미쿠를 통해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 하츠네 미쿠 광고 이벤트를 과거에도 준비했던 적이 있는지.
"2016년에도 하츠네 미쿠 기념 광고를 한 적이 있다. 당시에 '러브라이브'라는 애니메이션의 야자와 니코 캐릭터 광고가 지하철에 걸려서 이슈가 되고 이어서 게임 '아이돌마스터'의 지하철 광고도 진행되는 걸 지켜봤다. 그래서 단톡방을 기반으로한 소모임에서 '우리는 왜 이걸 못하냐'고 반 농담으로 한 말에 첫 광고 모금을 진행하게 되었다.

지하철 벽면 광고를 개시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주실 일러스트레이터를 섭외했다. 일본의 그림 투고 사이트인 PIXIV에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BTRP)께 연락을 해 이벤트의 취지를 설명하고 부탁을 드려 그림을 받을 수 있었다. 소모임 사람들끼리 소규모로 모금을 진행했는데 입금된 금액 중 39만 원 같은 숫자가 많이 눈에 띄었다. 일본어로 3은 '미', 9는 '쿠'로 후원금에 미쿠팬으로 의미를 나타낸 것이었다. 팬들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이후 개인계좌를 트위터에 올려서 2016년 3월 9일 사당역에 지하철에 광고를 게시할 수 있었다."

- 프로젝트를 지켜보는 팬들이 저작권에 대해 걱정을 하더라, 저작권은 어떻게 해결했나.
"하츠네 미쿠 자체가 비영리 활동에 대해서 굉장히 관대하다. 콜 사인만 받으면 오픈이다. 피아프로(piaplo) 링크 라이센스 라고 하는 컨펌 방식이 있다. 이 컨펌을 통과하면 비영리적인 활동에 대해서 미쿠 라이센스를 받게 된다."

2017년 삼성역에 '미쿠 성지'를 만들다

- 2017년 미쿠 광고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후원을 진행했다. 어떻게 한 건가.
"작년 이벤트가 성공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당시 반응을 살펴보면 '개인 계좌 입금이 아닌 공신력이 있는 곳을 통해 진행했다면 참여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한 글이 많았다. 그래서 텀블벅과 같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끼면서 생기는 공신력의 힘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이벤트의 주최자도 이형철 개인이 아닌 미쿠팬 전체라는 것을 담기 위해 '미쿠 월렛즈'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모금 계좌를 '이형철(미쿠월렛즈)'라고 만들었다.

2017년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미쿠팬이라면 누구나 참여하고 싶도록 만들어줄 일러스트레이터를 섭외해보자고 계획했다. 하츠네 미쿠에 대한 대표 일러스트를 그리는 한국분이 세 분 계셔서 섭외를 시도했지만 성사되지는 못 했다. PIXIV를 통해 미쿠 일러스트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Lpip'(엘핍)를 알게 되었다. 그 분이 흔쾌히 승낙해주셔서 이번 텀블벅 이벤트의 그림을 걸 수 있게 되었고 답례품으로 드릴 상품도 다양하게 결정할 수 있었다. 텀블벅으로는 후원금이 4200여만 원 모였다. 해외 인지도가 있는 Lpip의 그림이다보니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반응을 보여 해외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에서도 후원을 받았고 4209달러가 모였다. 설마 누가 선택할까 하고 만든 390만원의 고액 펀딩과 답례품인 기계식 시계를 준비했는데 삽시간에 나갔다."

하츠네 미쿠 10주년 기념 광고 프로젝트가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받고 있다.
 하츠네 미쿠 10주년 기념 광고 프로젝트가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받고 있다.
ⓒ 텀블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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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지하철 광고는 작년 지하철 광고보다 훨씬 규모가 커졌다.
"펀딩이 5일만에 3000만 원에 육박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저에게 접촉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300여만 원이면 2016년 사당역 광고 때처럼 적당히 광고판 하나로 마치려했다. 하지만 몇 천만원이 삽시간에 모이면서 이에 걸맞은 광고를 집행해야겠다고 느꼈다. 일정 영역을 독점해 일종의 성지가 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삼성역 한 개찰구방면이 사진 광고와 함께 영상광고를 무한 반복 재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상을 재생할 스크린이 많은 만큼 트위터를 통해 축전을 보내주면 모두 영상에 싣겠다는 글을 남겼더니 한 달 동안 100장이 넘는 이미지를 받았다. 영상 재생 시간에 한계가 있어서 영상을 틀 수 있는 3면에 전부 다른 영상을 틀기로 했다. 일본에 계신 분이 영상 만드는 걸 도와주겠다고 해서 맡기게 되었다."

- 이벤트 규모만큼 도와주신 분들이 굉장히 많을 것 같은데 어떻게 만난 건가.
"이번 이벤트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수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인터넷으로 여러 활동을 해 온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느꼈다. 후원 답례품의 기본이 된 그림부터 게임 카드, 시계, 축전 그림, 3D영상까지 다양한 도움이 있었고 저 스스로 '인생 헛살지 않았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도움을 주신 분들 대부분과 오프라인에서 만나지는 못했다. 만난 분들은 처음 본 사람이었다. 모임 내에서 소개를 받거나 팬으로서 도움을 주겠다는 분들과 함께 진행했다. 결론적으로 서로를 잘 모르는 미쿠 팬 모두가 함께 참여한 것이다.

3D 영상은 '꽁치'라는 닉네임의 팬이 도와줬다. 지금 생각해도 이게 '신의 한수'였다. 3D 영상이 있어 남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추고 공연을 하는 미쿠의 캐릭터성을 어필할 수 있었다. 가수라는 게 단순히 공연하고 끝이 아니라 팬들과 교감하는 반면, 아쉽게도 미쿠는 그런 교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영상 내에서는 팬들과 인사를 하거나 다른 어필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움직이는 미쿠 영상은 미쿠 팬들에게 반응이 굉장히 좋다."

서투른 준비... 결국 사비 들였다

미쿠 팬들이 모여 2016년 3월 9일 사당역에 미쿠 9주년 광고를 걸었다.
 미쿠 팬들이 모여 2016년 3월 9일 사당역에 미쿠 9주년 광고를 걸었다.
ⓒ 미쿠월렛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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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아쉬움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후원을 처음 받다보니 미약한 점이 많았다. 텀블러에 후원에 4200여만 원이 쓰여 있지만 전액이 들어온 것이 아니다. 수수료 외에도 입금이 안 들어온 부분이 많아서 1000만 원 정도 적은 상태로 진행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배송불량과 염두하지 못한 진행비용까지, 모든 것을 떠안다보니 저를 포함한 미쿠월렛즈의 사비 기백만원이 들어갔다.

현재 캔버스에 일러스트레이터 Lpip의 사인을 받아서 배송하고, 킥스타터로 모집한 해외 후원자에게 답례품 배송이 남았다."

- 광고를 걸었지만 이런 이벤트는 미쿠팬들만 기뻐하는 건 아닌지.
"혼자 삼성역에 설치한 광고를 확인하러 간 적이 있다. 어느 아주머니가 어린 딸을 광고 앞에 세워서 사진을 찍는 것을 봤다. 미쿠를 알고 찍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여러 그림이 나오고 이쁘고, 귀여우니까 사진을 찍은 것이다. 하츠네 미쿠가 여러 분들에게 그런식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라고 본다. 여러분들이 미쿠에 대해서 열광하지 않아도 좋은데 적어도 알아줬으면 한다. 이렇게 시나브로 알아가면서 대중화되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미쿠가 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본다."

- 생업을 접고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이걸 하면서 해내고 싶은 목표가 있는지.
"콘텐츠 사업을 해보려고 한다. 미쿠를 통해 국내에서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것을 증명하는 예가 있다. 우리나라에 서브컬처 매장은 개인이 취미로 하는 카페가 전부였다. 그런데 최근에 yes24에서 (만화 관련 상품 매장인) '홍대던전'을 만들었고, 애니플러스라는 만화 전문 채널에서 합정역에 애니메이션 전문 굿즈 상설 매장을 열었다. 이렇게 가능성을 보고 기업이 뛰어들었지만 워낙 대중적인 시장이 아니다보니 갈피를 잡지 못 하는게 현 상황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어려서부터 덕후문화를 즐기던 스페셜리스트가 들어가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기업들과 또는 이번 미쿠 이벤트 진행을 통해 만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미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일본의 오타쿠적인 콘텐츠 사업을 진행하므로써 돈이 있어도 쓰지 못하고 목 말랐던 덕후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주고 싶다. 일본의 오타쿠 문화에 관련된 컨텐츠 전반을 우리나라에 가지고 오고 싶다. 그렇게 사업을 전개해나가고 싶다.

하고 싶은 일과 취미가 서로 맞는 것을 '덕업일치'라고 한다. 사람들이 저를 '성공한 덕후'라고 칭해준다. 그러므로 아까 말씀드렸듯이 기업이 돈을 보고 들어왔지만 갈팡질팡하는 상황에서 덕후 문화에 대한 가이드 라인이 되어주고 싶다. 그리고 미쿠 엑스포의 국내 유치를 이뤄내고 싶다."

8월 26일 삼성역에서 하츠네 미쿠 팬들이 미쿠 10주년 기념 광고 앞에 모였다.
 8월 26일 삼성역에서 하츠네 미쿠 팬들이 미쿠 10주년 기념 광고 앞에 모였다.
ⓒ 하츠네 미쿠 10주년 광고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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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도 오타쿠 문화가 스며들고 있다

- 흔히 오타쿠 문화로 대표되는 서브컬처를 접해 보지 않은 분들께 한말씀 부탁드린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오타쿠 문화라는 게 우리나라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받아졌고 지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초등학생이든 중학생이든 다양한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을 접하면서 이런 일본 애니메이션의 오타쿠 문화에 매우 익숙하게 변화되어가고 있다. 오타쿠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도 예전에는 나쁜 의미였다. 그런데 '오덕'이나 '덕후'로 둥글게 들리는 어감으로 변화했다. 오타쿠라는 게 이미 우리들 사회에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스며들어오고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상황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도라에몽 덕후로 유명한 심형탁씨, 게임에 능한 전 레인보우 멤버인 김지숙씨 등 오타쿠적인 면이 있는 분들이 TV에 나오는 것 자체가 오타쿠 문화가 연예인이나 평범한 사람들이 즐기는 하나의 문화로 각인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서브 컬쳐는 이미 우리 곁에 깊이 들어와 있다. 함께 나아가기를 바란다."

하츠네 미쿠는 2017년 8월 31일로 10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매년 일본에서 열리는 콘서트인 매지컬 미라이가 9월 1일부터 9월 3일까지 치바현 마쿠하리 멧세 국제 전시장에서 열린다.


태그:#미쿠, #10주년, #광고, #하츠네미쿠, #서브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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