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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을 지나 쌍계사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눈처럼 내리는 벚꽃이 피는 봄이 아니더라도 녹색 터널과 섬진강은 평안함을 안겨준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을 지나 쌍계사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눈처럼 내리는 벚꽃이 피는 봄이 아니더라도 녹색 터널과 섬진강은 평안함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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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을 지나 쌍계사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눈처럼 내리는 벚꽃이 피는 봄이 아니더라도 녹색 터널과 섬진강은 평안함을 안겨준다. 19일, 짙은 녹색 물이 뚝뚝 떨어지는 터널 끝에 이르렀다. 차를 잠시 오른쪽 최참판댁 방향으로 세웠다. 조심스레 섬진강 쪽으로 걸었다. 가드레일을 넘어 '섬진강 100리 테마 로드'로 내려가자 평사리 마을 가는 길이라는 그림 지도판 옆에 장독을 닮은 조형물에는 '전망쉼터'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섬진강으로 향하는 듯한 작은 전망대에서 두 눈을 꽉 채우는 풍광은 말이 필요 없는 절경이다.
 섬진강으로 향하는 듯한 작은 전망대에서 두 눈을 꽉 채우는 풍광은 말이 필요 없는 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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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기갑사단'이라는 정연홍의 시가 적힌 선간판도 있다. '탱크를 보았다/ 새벽녘, 기갑사단/ 강물을 끌고 내려오고 있었다/집게발 포신 치켜세우고/팡팡 물대포를 쏘며/ 머리통 내밀어 눈알 부라린다/ 각진 등딱지에 달린 철갑 이빨은/ 오래전 시간을 다듬어/ 물컹물컹 씹고 있다//~'

섬진강으로 향하는 듯한 작은 전망대에서 두 눈을 꽉 채우는 풍광은 말이 필요 없는 절경이다.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길가로 올랐다. '슬로시티 하동 악양'이라는 선간판 뒤로 바위 위에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조선 시대 지리산 유람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람코스- 삽암

악양 평사리들판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에서 ‘슬로시티 하동 악양’이라는 선간판 뒤로 바위 위에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악양 평사리들판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에서 ‘슬로시티 하동 악양’이라는 선간판 뒤로 바위 위에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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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하동과 악양으로 가는 도로표지판은 선명하지만 이곳을 알리는 안내판은 우두커니 한쪽에 서 있다. 오가는 차에서는 물론이고 걷는 이들에게도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안내판이 서 있다.

주민들은 '섯바구'라고도 부르고 '선바위'라 부른다는 삽암(鍤巖‧꽃힌 바위)에 관한 이야기를 안내판은 들려준다. 바위가 있는 곳은 옛날부터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는 곳이다. 고려 무신정권 때 한유한(韓惟漢)이 처자식을 이끌고 와서 은거하며 낚시로 소일하던 곳이라 한다. 후에 임금이 대비원녹사(大悲院錄事)라는 벼슬을 내리기 위해 신하를 내려보냈는데 창문으로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주민들은 ’섯바구‘라고도 부르고 ’선바위‘라 부른다는 삽암(?巖?꽃힌 바위)에 관한 이야기를 안내판은 들려준다. 바위가 있는 곳은 옛날부터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는 곳이다. 고려 무신정권 때 한유한(韓惟漢)이 처자식을 이끌고 와서 은거하며 낚시로 소일하던 곳이라 한다.
 주민들은 ’섯바구‘라고도 부르고 ’선바위‘라 부른다는 삽암(?巖?꽃힌 바위)에 관한 이야기를 안내판은 들려준다. 바위가 있는 곳은 옛날부터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는 곳이다. 고려 무신정권 때 한유한(韓惟漢)이 처자식을 이끌고 와서 은거하며 낚시로 소일하던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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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유한에 이야기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릴 만큼 이황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지리산 유람에 나서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삽암과 한유한의 삶을 기록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명은 1558년(명종 13년) 음력 4월 11일 자신이 살던 합천 삼가를 떠나 진주목사 김홍, 고령현감 이희안, 청주목사 이정, 이공량 등 절친한 선비들과 진주, 사천을 거쳐 남해를 따라 섬진강 뱃길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닷새째, 배는 지리산 입구인 현재의 악양면에 이르렀다.

부조리한 시대에 맞선 고려 충신 한유한

남명선생은 기행문에서 "잠깐 사이에 악양현(岳陽縣)을 지나고, 강가에 삽암(鍤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의 옛 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혼란해질 것을 예견하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징초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는데, 하룻 저녁에 달아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아! 국가가 망하려 하니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겠는가.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착한 사람을 선양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섭자고(葉子高)가 용을 좋아한 것만도 못하니, 나라가 어지럽고 망해가는 형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가득 따라놓고 거듭 삽암을 위해 길게 탄식하였다.." 라고 적었다.

남명선생은 이곳에서 부조리한 시대에 맞선 한유한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한유한을 통해 자신이 걸어가야 할 처사의 삶을 다잡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위에 서서 강을 바라보는 내내 가슴이 벅차다.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릴 만큼 이황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지리산 유람에 나서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삽암과 한유한의 삶을 기록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릴 만큼 이황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지리산 유람에 나서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삽암과 한유한의 삶을 기록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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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에서 올려다보면 바위 끝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악양의 부자 이세립(李世立)이라는 사람이 한유한의 절개를 사모해 겼다 한다. 이후 삽암은 조선 시대 지리산을 유람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람코스가 되었다.

현재는 아쉽게도 포장된 도로에서 보면 조그마한 바위에 지나지 않는다. 모한대와 관련 없는 2기의 비석을 정리했으면 한다.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주변을 정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마리 좀벌레(?)'를 찾아 지리산으로 간 남명 조식

악양 동정호에서 6km가량 이른 곳에서 두꺼비 바위 쉼터와 은모래 쉼터 사이에 나는 차를 멈춰 세웠다. 섬진강변 ‘섬진강 100리 테마 로드’로 향했다.
 악양 동정호에서 6km가량 이른 곳에서 두꺼비 바위 쉼터와 은모래 쉼터 사이에 나는 차를 멈춰 세웠다. 섬진강변 ‘섬진강 100리 테마 로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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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 동정호에서 6km가량 이른 곳에서 두꺼비 바위 쉼터와 은모래 쉼터 사이에 나는 차를 멈춰 세웠다. 섬진강변 '섬진강 100리 테마 로드'로 향했다.

나무들 사이로 차들이 쌩쌩 달리지만, 이곳 풍경은 모른척한다. 나 역시 모른 척 풍경과 하나가 되었다. 나무등걸에 기대어 앉아 잠시 대나무 너머 강도 훔쳐보고 마음속 땀도 닦는다.

나무들 사이로 차들이 쌩쌩 달리지만, 이곳 풍경은 모른척한다. 나 역시 모른 척 풍경과 하나가 되었다.
 나무들 사이로 차들이 쌩쌩 달리지만, 이곳 풍경은 모른척한다. 나 역시 모른 척 풍경과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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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이 별세하자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세종32)~1504(연산군10)) 선생이 처자식을 이끌고 아예 지리산 악양으로 다시 들어가 18년간 은둔하며 학문을 강론했다는 악양정(岳陽亭)을 알리는 간판이 보이자 따라 좀 전과 달리 성큼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진분홍빛 배롱나무를 지나 마을 위쪽으로 향하자 허리 굽은 400년이 넘은 소나무가 담장 밖으로 가지를 뻗은 '악양정' 이 나온다. 주위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다.

허리 굽은 400년이 넘은 소나무가 담장 밖으로 가지를 뻗은 ‘악양정’ 이 나온다. 주위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다.
 허리 굽은 400년이 넘은 소나무가 담장 밖으로 가지를 뻗은 ‘악양정’ 이 나온다. 주위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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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누각은 선생이 지은 당시의 모습이 아니다. 무오사화 이후 400년 동안 정각은 허물어졌다. 선생을 추모하던 지역 유림이 1901년 4월에 3칸의 정각을 중건하고 1920년에 다시 4칸으로 중수하였다. 1994년 대대적으로 보수해 정면 4칸 규모로 5량 구조 현재에 이른다.

돌계단을 차근차근 밟아 외삼문으로 올랐다. 아쉽게도 마을에 들어선 집들에 둘러싸여 섬진강이 보이지 않는다. 문은 잠겨 있다. 악양정을 찾는 이는 연락하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지만, 돌담을 따라 걸으며 때로 까치발로 안을 들여다보면서 선생을 떠올렸다.

하동 악양정
 하동 악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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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좀벌레(一蠹)'라고 호를 지은 선생은 18세에 부친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다 순국하자,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식이 영화를 누리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면서 받지 않았다. 1483년(성종 1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안음(安陰) 현감을 지냈다.

선생은 술 마시고 않고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모친이 소를 보고 놀랐고 술을 마시지 말라 명하신 것을 따른 것이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곤장 100대를 맞고 두만강 근처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어 관노 생활을 하다가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4월 1일, 55세를 일기로 유배지에서 돌아가셨다. 문인들이 2달에 걸쳐 시신을 함양으로 옮겨와 장사지냈는데 같은 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했다.

현재의 누각은 선생이 지은 당시의 모습이 아니다. 무오사화 이후 400년 동안 정각은 허물어졌다. 선생을 추모하던 지역 유림이 1901년 4월에 3칸의 정각을 중건하고 1920년에 다시 4칸으로 중수하였다. 1994년 대대적으로 보수해 정면 4칸 규모로 5량 구조 현재에 이른다.
 현재의 누각은 선생이 지은 당시의 모습이 아니다. 무오사화 이후 400년 동안 정각은 허물어졌다. 선생을 추모하던 지역 유림이 1901년 4월에 3칸의 정각을 중건하고 1920년에 다시 4칸으로 중수하였다. 1994년 대대적으로 보수해 정면 4칸 규모로 5량 구조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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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 있는 처사의 삶을 다짐했던 것처럼 선비의 체취를 느껴

하동 악양정 덕은사
 하동 악양정 덕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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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조선조 동방 5현과 동국 18현 가운데 한 분으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 향교와 9개의 서원에서 제향(祭享) 되고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지리산 유람에 나서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도탄에서 1리쯤 떨어져 정여창(鄭汝昌)선생이 거처하던 옛 집터가 남아 있다. 선생은 바로 천령의 유종(儒宗)이었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에 실마리를 열어준 분으로 처자식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가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되었다. 뒤에 교동주(喬桐主,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곳은 삽암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인의 행과 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며 지조를 목숨처럼 아낀 넋을 기렸다.

남명선생은 '10층의 산봉우리 위에 다시 옥을 하나 더 얹어놓은 격'이며, '천 이랑의 물결 위에 둥근 달 하나가 비치는 격'이라며 드높였다.

악양정 돌담을 따라 거닐면서 남명선생이 지리산 기행에서 만난 일두 선생의 흔적을 통해 지조 있는 처사의 삶을 다짐했던 것처럼 선비의 체취를 느꼈다.

악양정 돌담을 따라 거닐면서 남명선생이 지리산 기행에서 만난 일두 선생의 흔적을 통해 지조 있는 처사의 삶을 다짐했던 것처럼 선비의 체취를 느꼈다.
 악양정 돌담을 따라 거닐면서 남명선생이 지리산 기행에서 만난 일두 선생의 흔적을 통해 지조 있는 처사의 삶을 다짐했던 것처럼 선비의 체취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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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하동군청블로그
<해찬솔일기>



태그:#악양정, #섭암, #지리산유람, #한유한, #일두 정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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