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EBS의 D-Box 사이트에서 8월 30일까지 무료로 시청이 가능합니다.

 홍보용 재개발 입간판을 바라보는 주인공

홍보용 재개발 입간판을 바라보는 주인공 ⓒ EBS국제다큐영화제


01.

이 작품은 12살 소녀 발렌틴 프랭신이 애드거 앨런 포의 단편집 가운데 '검은 고양이'를 읽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짧은 소설이지만 화자의 이야기에 대한 불완전한 의문들 때문에 독자들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어 영미 문학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아직 12살에 불과한 주인공은 이 소설을 조목조목 분석하며 자신만의 해석을 도출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중이다. 주변에 도움을 줄 사람은커녕 말썽만 부리는 아이들 때문에 도무지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말지만. 다큐멘터리의 시작치고는 문제를 바로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다. 장편 영화를 연출해 본 경험이 있고, 다수의 작품에서 연기 경력이 있는 찰스 오피서(Charles OFFICER) 감독다운 선택이다. 영상이 끝나면 이 처음 지점의 장면에 대한 인상은 더욱 강해진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 '불안'에 대한 이야기가 효과적으로 집약된 장면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02.

이번 EIDF(EBS International Documentary Festival) 2017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찰스 오피서 감독의 <나의 시, 나의 도시>는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주를 강요받는 이들과 어린 시절부터 겪어야 했던 많은 불안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길 힘들어 하는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캐나다 토론토 북동쪽 빌라웨이즈 임대주택단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재개발이 되는 지역 때문에 이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발렌틴 프랭신의 가족도 그들 가운데 하나다. 과테말라의 안티구아 태생의 프랭신은 교육 문제 때문에 4살 때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고향에 둔 채 아버지와 단둘만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체험학습을 가기 위해 내야 하는 45달러를 걱정해야 할 정도의 가난. 이곳 임대주택단지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감독은 어린 프랭신의 시선을 통해 외부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의 불안을 들여다봄과 동시에 지속적인 결핍 속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한 소녀의 내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03.

빌라웨이즈 임대주택단지의 재개발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거주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된다. 지금 살고 있는 임대주택의 월세를 감당하기도 쉽지 않은 거주민들은 재개발 후에 들어설 콘도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걱정이다. 그 전에 겪게 될 일들 또한 걱정이다. 재개발 업체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이해를 구하지만 무엇 하나 명확한 것이 없다.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동안 옮겨야 하는 지역도 추첨에 의해 무작위로 정해지고, 그마저도 절차 기간 외의 자의적 이동은 인정되지 않아 이후의 터전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 이곳 빌라웨이즈 임대주택단지에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법적 권한만 내세우고, 상대적으로 정보가 부족한 주민들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다. 사실 이 재개발 문제는 아직 시의회의 허가조차 받지 못한 상황이다. 다큐멘터리의 중간에 프랭신이 재개발을 홍보하는 입간판의 Coming Soon이라는 글자를 말없이 올려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가 알아차렸을지 알 수 없으나, 입간판조차 높게 세워진 그 재개발 콘도들이 현재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얼마나 높은 장벽인지를 비유적으로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누가 원하는 재개발이며, 누구를 위한 콘도란 말인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도전하는 주인공의 모습

두려움을 이겨내고 도전하는 주인공의 모습 ⓒ EBS국제다큐영화제


04.

자신의 교육을 위한 결정이었다고는 하나, 어른들의 결정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프랭신에게 그 빈자리는 쉽게 채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존재에 대해 알 기회가 없었던 어린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끔찍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엄마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요. 잘 모르니까.' 그녀의 어머니는 프랭신이 살고 있는 토론토에서 직선거리로 3,000km가 넘게 떨어져 있는 과테말라의 안티구아에 있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그녀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전화를 걸기도 하고 편지를 쓰기도 하지만, 대답을 들을 수는 없다. 그런 그녀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예술과 공동체 문화다.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던 문학도, 빌라웨이즈 아트 스튜디오라는 지역 문화센터에서 알게 된 선생님들도, 차고에서 마이크를 들고 흥겹게 레게를 부르던 아버지의 모습도. 이런 것들 하나하나 모두 그녀가 자신의 불안을 이겨내고 하나의 인격을 완성해 가는 요소들이 된다. 영상 속에서 직접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점점 잊혀져 가는 소중한 존재의 상실은 그녀 속에서 큰 불안으로 남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 주변에 존재하는 예술의 영향력은 더 크게 느껴진다. '지금 아빠에게 느끼는 감정을 엄마에게서도 느끼길 바라요.' 프랭신이 말한다.

05.

예술과 문화는 그녀의 심리적 변화뿐만 아니라 외향적 변화까지도 이끌어 낸다.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시도하고 싶지 않다던 그녀는 다양한 예술적 영향과 주변 어른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프랭신이 찾은 '장 미쉘 바스키아' 전시에서 만난 코디네이터의 설명이다. 바스키아의 예술이 지금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가 길 위에 있는 아무것에나 그림을 그리길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힙합 장르에서 전통적 방법과 달리 레코드를 쓰는 방식인 스크레칭 역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걸 프랭신에게 알려준다. 그런 주변의 도움으로 인해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 기회도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말에 의미를 담는 법을 배우며, 그런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것 또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스스로라는 걸 조금씩 배워나간다. 앞서 언급했던 임대주택단지의 재개발은 현재 존재하는 그곳의 공동체를 무너뜨릴지 모르지만, 그 속에서도 다음의 공동체를 위한 교육과 성장은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12살 발렌틴 프랭신이 가진 의미이며, 그녀의 존재가 곧 지역 공동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06.

이 다큐멘터리 <나의 시, 나의 도시>가 영리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바로 공동체 구성원의 시선을 통해 공동체 전체와 개인의 이야기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공동체의 문화와 영향력에서 개별적일 수 없으며, 공동체 역시 개인의 노력과 관심 밖에서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외부적 변화나 확정되지 않은 미래와 상관없이 개인의 성장은 지속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공동체라는 것을 이 작품은 끊임없이 언급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시의회의 승인으로 인해 지금 구성된 공동체가 흩어질 것이고, 한 소녀의 미래는 그리 밝게 빛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흩어진 공동체는 또 다른 여럿의 공동체를 이루어 지금의 모습으로, 혹은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며, 소녀는 또 다른 행복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이루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이 작품 속에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를 인용해 놓은 이유는 바로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포기하지 않는 몽상가가 승리한다.'

 나의 시 나의 도시 메인포스터

나의 시 나의 도시 메인포스터 ⓒ EBS국제다큐영화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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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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