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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 사회복지를 공부하던 학생들이 처음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페미니즘이 거창하고 무서운 줄만 알았는데, 들여다보니 우리가 꼭 귀 기울여야 하는 소중한 목소리였습니다. 여전히 공부가 부족하지만, 여성으로서 우리들의 생각을 글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해보자는 취지에서 총 6명의 목소리를 소개합니다. -기자말

엄마이자 아내였으나, 67년생 박00로서의 삶도 중요했던 그녀는 일과 가정의 양립 문제로 아빠와 갈등을 빚을 때가 많았다.
 엄마이자 아내였으나, 67년생 박00로서의 삶도 중요했던 그녀는 일과 가정의 양립 문제로 아빠와 갈등을 빚을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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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라는 벽장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가장 교묘하게 인간성을 억압해온 제도. 이른바 '가부장제'는 지독히도 어둡고 음침한 벽장이다. 이것은 나를 가두었고, 나의 가족들을 가두었고, 내가 속한 사회를 가두었으며, 내가 살아가는 세계(世界)를 가두었다. 벽장의 시작이 어디인지,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크나큰 공간이기에, 이는 곧 절대적 체계이다.

엄마이자 아내였으나, 67년생 박OO로서의 삶도 중요했던 그녀는 일과 가정의 양립 문제로 아빠와 갈등을 빚을 때가 많았다. 갈등의 뿌리가 우리 가족의 삶에 단단히 자리 잡아갈수록, 부모님 간의 언성도 점점 높아졌다.

아빠 : "애들이 아프건 말건, 학교를 어떻게 다니건 말건 너는 직장이 더 중요하지? 이렇게 살 거면 차라리 갈라서자."

엄마 : "나는 직장일로 바쁘면 좀 안 돼? 나도 너처럼 내 일이 소중해. 그래 그럼 갈라서. 근데 나는 이혼해도 애들 못 키워!"

엄마는 가부장제에서 규정한 '모성애(母性愛)'가 부족했다. 자녀를 보살피고, 남편을 내조하고, 집안 살림을 가꾸는 일 보다는 자신의 커리어를 탄탄히 하는 것에 더 열중했다. 자신이 선택한 남성과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가 생기더라도, 사회라는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위치를 잃고 싶지 않았다. 즉, 가부장제에 종속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철없는 여성'이었다. 이것이 그녀에 대한 평가였다. 

'가부장제'라는 단단한 벽장 속에서 자란, 나의 평가도 다를 바 없었다. 우리도, 일도 소중하다 말하는 나의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고, 가정에'만' 충실하지 않은 나의 엄마가 미웠다. '나의 엄마는 모성애가 부족하다'라는 굳은 믿음으로 우리 가족의 문제를 늘 엄마의 탓으로 돌려버릴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겪는 불편함을 '엄마의 모성애'로 환원해버릴 수 있어서, 나는 너무나도 편했다.

벽장, 깨부수다

"모성애란 모든 여성이 동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것인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 여성이 자신의 직업에 열중하는 것은 비난받아야 하는가?"
"가정 안에서의 여성은 모두 다 같은 모습이어야 하는가?"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마음 한 쪽에 이와 같은 궁금증이 싹 터 올랐다. 나의 의문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엄마를 재조명하기 위해서 나는 페미니즘을 선택했다. 페미니즘으로의 입문(入門)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결정적이고 절실한 사건이었다. 

나는 '가부장제'라는 벽장을 마주하였다. 이곳으로부터 여성에게 가사노동, 모성애, 어머니 노릇이 부과된다. 나의 엄마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여성들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규율에 속박되어 있다. 가부장제가 속삭이는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여성 스스로를, 여성이 또 다른 여성을, 남성이 여성을, 사회가 여성을 다층적으로 억압한다.

가부장제 안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수많은 불편함과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것을 선언한다. 즉, 나는 이 무서우리만큼 견고한 '가부장제'를 깨부수기로 결심했다.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통해 수확한 작은 열매들을 차곡차곡 쌓아 '가부장제'라는 허울 좋은 벽장을 채워나갈 것이다. 벽장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열매를 쌓고 쌓아, 마침내 벽장을 깨부술 것이다. 그곳을 '페미니즘'이란 열린 공간으로써 대체할 것이다.

지금까지, 페미니즘을 통해 내가 깨달은 사실은 다음과 같다.

- 가부장제에서 규정한 '가족'으로 인해 여성이 속박될 이유는 전혀 없다. 여성도 가족 내외에서 다양한 역할을 누릴 권리가 있다.

- 여성의 본성은 '모성애'로 환원될 수 없다. 이것은 여성에게만 한정되는 가치가 아니다.

- 가족이란, 남성 가장과 나머지 구성원을 의미하는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가 존재할 수 있으며 각 구성원들의 역할 또한 다양할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의 위치를 규정하고, 그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가부장적이다.

- 결혼제도를 통해 남성은 무언가를 얻게 되고, 여성은 오히려 잃게 되는 현상이 존재한다. 남성은 기존의 사회적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까지 점유하게 되지만, 여성은 사적 공간에 편입됨으로 인해 사회에서의 위치는 위태로워진다.

- 노동시장에서의 차별, 사회적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엔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은 사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가정 내에서의 역할을 재규정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큰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차츰차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수확한 열매, 즉 나의 깨달음은 벽장을 깨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내가 경험했듯, 모든 이들 각자의 자리에서 이룬 결실을 통해 벽장 밖으로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



태그:#여성, #페미니즘, #가부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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