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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선생 58주기 추모제. 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묘역.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조봉암 선생 58주기 추모제. 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묘역.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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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하에서 억울하게 '사법살인'을 당한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1898~1959년) 선생을 추모하는 58주기 추모제가 지난 7월 31일 서울 망우리공원에서 열렸다.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에게 씌운 간첩죄는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지만 조봉암은 여전히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58주기 추모제에는 58년 만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선생 영정 앞에 놓였다.

58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이들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광복 후 만인이 평등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설계했던 죽산 조봉암 선생을 기리며 그의 영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기를 기대했다. 조봉암 선생의 독립운동과 건국 공로를 인정하는 것은 조봉암과 진보당의 누명을 벗기는 일이자 역사를 바로세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조봉암 선생 58주기 추모제. 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묘역.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조봉암 선생 58주기 추모제. 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묘역.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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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선생 58주기 추모제. 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묘역.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조봉암 선생 58주기 추모제. 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묘역.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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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58년만에 대통령이 조화를 보냈다. 대통령 외에도 정세균 국회의장과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정의당 이정미 대표, 더불어민주당 박남춘 국회의원(인천시당위원장), 자유한국당 정유섭 국회의원(인천시당위원장), 자유한국당 윤상현 국회의원, 바른정당 이학재 국회의원, 정의당 노회찬 국회의원 등도 조화를 보냈다.

곽정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죽산 선생의 장녀인 조호정 여사의 연세가 구십이다. 이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한을 풀어드리는 게 우리 모두의 염원이다"며 "선생님의 묘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바치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다 함께 힘을 모아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조봉암, 대한민국 건국훈장 추서돼야

죽산 조봉암 선생은 인천 강화도 태생으로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후 인천을구(현재 부평, 계양, 서구 일대)에서 제헌 의원(1948년)와 2대의원(1950년)에 당선돼 초대 농림부 장관과 2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광복 후 정부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식량난과 토지개혁 문제였다. 조봉암은 1948년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조봉암은 정부가 양곡을 매입하고 배급하는 방안을 마련했고, 농촌개혁을 이끌 농민조직 결성을 주도했다.

조봉암은 이승만 독재에 맞서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며,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대선에 출마하면서부터 이승만 정부는 그를 본격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조봉암은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출마하려고 했지만 이승만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후보 등록조차 못했다.

조봉암 선생 58주기 추모제. 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묘역.
▲ 죽산 조봉암 조봉암 선생 58주기 추모제. 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묘역.
ⓒ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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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은 후보등록에 실패하자 보수 세력에 맞설 혁신정당, 진보당 창당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진보당은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주요 노선으로 내걸었다.

대선에선 비록 졌지만 조봉암과 진보당은 이승만과 자유당을 견제할 정치세력으로 성장했고, 조봉암은 대중의 지지를 토대로 혁신세력 통합을 주도하며 1958년 제4대 총선거를 준비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승만 정권의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탄압도 본격화됐다.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월 조봉암과 진보당원들에게 간첩죄를 적용해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한국 정치사에 등장한 진보정치의 싹을 도려내버렸다.

조봉암은 결국 1959년 7월 31일 사형수로 생을 마감했다. 조봉암이 꿈꿨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평화통일 조국은 '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망우리 묘역에 묻혔다. 조봉암 사후 50여년 간 죽산 조봉암과 진보당은 금기어나 다름없었다.

그는 비록 묻혔지만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조봉암의 누명을 벗기기 위한 유가족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새얼문화재단의 노력은 지속됐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진보당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52년 만이다.

대법원은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하여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조봉암, #죽산 조봉암, #진보당, #이승만,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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