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던 교수 감금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즈>(2011)를 만든 선호빈 감독은 2011년 사귀고 있던 김진영과 결혼한다. 결혼 3년차에 접어든 2013년 김진영은 선 감독의 어머니이자 그녀의 시어머니 조경숙과 극심한 갈등을 빚게 된다. 절대로 시댁에 가지 않겠다는 김진영과 손자만이라도 보겠다는 조경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선 감독은 다년간 자신이 몸소 겪은 고부갈등을 카메라에 담기로 결심한다.

지난 5월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 B급 며느리>(2017)는 한국 대부분의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흔히 있는 고부 갈등을 다룬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 B급 며느리>에 등장하는 선호빈의 아내이자 조경숙의 며느리인 김진영씨는 시댁에 가지 않는다. 조경숙과 같은 보통의 시어머니들이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 행동하지 않는다. 조경숙의 주장에 따르면, 며느리의 본분이라는 집안의 대소사에도 절대 참여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 대부분의 시어머니들을 뒷목잡고 쓰러지게 하는 '나쁜' 며느리다.

 다큐멘터리 영화 < B급 며느리>(2017)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 B급 며느리>(2017) 한 장면 ⓒ 영화연구소


하지만 선호빈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키우고 있는 김진영이 아내로서 엄마로서 제 역할을 안 하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라는 직업 특성상 생계가 불안한 남편을 살뜰이 챙기면서 빠듯한 살림에도 아이를 씩씩하게 잘 키우고 있는 김진영은 누가봐도 A급 아내, 엄마다. 다만, 자기가 생각했을 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상황이다 싶으면 굽히지 않고 똑부러지게 말 잘하는 성격을 가졌을 뿐이다. 조경숙은 그런 김진영의 성향이 못마땅스럽다.

처음 아내 김진영의 입장에서 고부 갈등을 다루고자 했던 선호빈 감독은 어머니 조경숙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어머니 입장을 헤아리게 된다. 젊은 시절 혹독한 시집살이를 경험했던 조경숙은 그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겪었던 것처럼 며느리의 본분을 강조하는 시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조경숙과 김진영을 오가며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의 해법을 모색하던 선 감독은 조경숙과 김진영을 둘러싼 갈등은 단순히 두 사람 개인의 문제가 아닌, 여성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모순, 그리고 부모보다 더 가난한 자식들이 겪는 현실과 직결해 있음을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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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며느리·독한 시어머니 만드는 웃픈 현실

조경숙이 시집살이로 힘들어 할 당시, 그녀의 남편이자 선 감독의 아버지 선길균은 철저히 방관자 입장이었다. 조경숙 스스로도 자신이 겪는 시집살이를 당연하다고 여겼고, 산업화 세대인 선길균에게는 남자 혼자 벌어 가족 모두 먹여 살리며 가부장제를 유지할 수 있는 탄탄한 경제력이 있었다. 젊은 시절 조경숙이 겪는 시집살이 고통을 나몰라라 했던 선길균은 아내와 며느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고부 갈등에 여전히 방관자 입장을 취하고 있고, 조경숙은 무슨 일에 있어서 그녀가 아닌 남편 선길균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영상 제작 알바 외에는 고정된 수입이 없는 선 감독은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 쓰는 신세다. 결혼 전 이렇다할 직장에 다니지 않았던 김진영 또한 결혼과 출산, 육아 이후 경력이 완전 단절된 채 전업 주부가 되었다. 부모에게 의존해야만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는 선호빈과 김진영은 부모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시)부모에게 손 벌리고 살면서, 며느리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김진영은 시어머니 조경숙의 분통을 터트리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김진영도 원하는 일이 아니다. 남편 선호빈이 유명 감독이 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김진영은 선호빈이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세 식구가 먹고 살 수 있는 생활비를 벌기를 바란다. 김진영 또한 일을 알아보고 있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경력이 단절된 기혼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렇게 김진영은 경제적으로 남편 선호빈에게 의존해 간다.

 다큐멘터리 영화 < B급 며느리>(2017)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 B급 며느리>(2017) 한 장면 ⓒ 영화연구소


상황이 이렇다보니 결국 선호빈 감독은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 아내가 겪는 갈등과 고통을 영화로 만든다. 리얼한 고부 갈등을 다룬 < B급 며느리>는 여러 다큐멘터리 피칭, 제작 지원 심사에서 열띤 호응을 얻었고, 덕분에 선호빈 감독은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도 < B급 며느리> 제작에 전념할 수 있는 약간의 돈을 손에 쥐게 된다. 선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 B급 며느리>는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선덕대왕 신종을 빗대어 그 자신의 모든 고통과 시련을 갈아 넣는 '에밀레' 다큐다.

시종일관 물러남이 없이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던 조경숙과 김진영은 어느 한 쪽의 화해의 제스처로 평화로운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선호빈 감독 또한 영화가 완성된 지금도 그 누군가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이유에 대해서 도통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조경숙, 선호빈, 김진영 모두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 양보가 아닌 치열한 다툼과 갈등 끝에 내린 서로를 위한 타협이라는 것.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부장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겠지만, 해법은 있다. 다만, 그 또한 개인의 양보를 기대해야하지만 끊임없는 대화와 문제제기를 통해 서로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하면 수많은 여성들을 힘들게 하는 고부 갈등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지극히 이상적인 이야기에 지리멸렬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 B급 며느리>는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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