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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원주에서 만난 크레인
 2012년 원주에서 만난 크레인
ⓒ 전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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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세 번 동물원에 간다'는 말이 있다. 어릴 때 소풍으로 한번, 성인이 되어 데이트할 때 한번, 그리고 아이와 함께.

근대 동물원의 기원은 19세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 동물사업자들은 열대와 아열대 지방의 다양한 동물을 포획해 와 전시했고, 시민들은 이를 구경했다. 인문학을 전공한 내가 동물을 위해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동물원을 방문한 이후였다.

동물원은 인간이 지구상의 비인간 동물들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는 시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그곳은 동물들이 사는 자연의 공간인 동시에 지구를 점령한 인간의 공간이기도 했다. 나에게 동물원을 변화시키는 것은 자연을 정복한 인간의 행동을 반성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동물원은 제대로 된 종보전 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나

20세기 중반, 동물원이 자연을 가두고 학대하고 있다는 환경단체의 비난을 받자 동물원은 스스로 '종 보전 기관'임을 내세웠다. 그러나 전 세계 동물원 동물 전문 단체들은 동물원이 과연 제대로 된 종 보전 기관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종보전을 내세우고 있으나 사실상 오락과 상업적 기능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불균형적으로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 멸종위기종에 속하는 동물을 보전하는 것은 현대 동물원의 중요한 임무다. 그러나 여기에도 원칙이 있다. 멸종위기종을 단순히 번식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동물원의 보전 프로그램은 유전학 연구의 기초에서 가능하다. 계통분류학적 연구에 의해 수집된 동물을 정확하게 분류하여 보전가치가 있는 종과, 아종 등을 구분하고 잡종화를 방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확한 개체식별에 근거한 체계적 동물기록관리가 가능해야 하고 특정 종의 역사를 담고 있는 혈통등록부(studbook)를 보유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연구와 체계적 종관리를 서울동물원처럼 규모와 역사가 있는 동물원조차 최근 들어 진행하고 있다. 서울동물원이 이러한 실정이니 다른 동물원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상 우리나라 동물원은 종관리를 하고 있지 않았다고 봐야 하며 전 세계 멸종위기종의 보전을 위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동물원은 시민들에게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기능만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오락 기능만 있는 것이다. 이것을 드러나게 한 대표적인 사건이 지난 2013년에 발생했다.

크레인과 로스토프, 동물원의 비밀 드러나게 했다

2013년 11월 서울동물원에서 사육사가 호랑이 '로스토프'에 물려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쟁점은 '맹수관에 들어가는데 왜 한 사람만 있었냐'는 것이었고 '사람을 죽인 호랑이를 어찌 처리할까'였다.

물론 사람의 실수이지, 동물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그 호랑이를 죽여야 한다는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 호랑이를 죽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드러나자 한국 동물원의 문제점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 호랑이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지만 오히려 외교문제 발생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사실상 서울동물원에 있던 20여 마리의 호랑이들이 순종 논란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유전학적으로 확실한 순종 시베리아 호랑이는 로스토프와 펜자뿐이었다. 결국 로스토프가 없으면 우리나라에서 시베리아 호랑이의 종보전은 불가능하게 될 수 있었다.

근친교배와 잡종화가 이루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전학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호랑이를 들여와 번식했는데 나중에서야 잡종화가 드러난 케이스다. 둘째, 새끼 호랑이를 선호하는 동물원 측이 교배를 부추겼다는 주장이다. 셋째, 전시장이 너무 좁아 교배를 막기 힘들었다는 측면도 있었다. 서울동물원 호랑이전시관은 총 세 개의 구역으로 되어 있다. 실내전시관, 실외전시관, 그리고 전시되지 않는 공간. 이 세 구역을 동물들이 번갈아 사용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순식간에 교배가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육사를 물어죽인 사건 이후에도 로스토프는 살아남았고 서울동물원을 비롯한 여러 동물원들은 종관리와 유전학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의 작은 동물원들 중에는 맹수관에 한 명이 들어가는 경우도 많고, 유전학 연구는 꿈도 못 꾸는 곳이 허다한 실정이다.

2015년 크레인의 모습. 크레인을 기억하는 관람객들은 크레인을 침흘리는 호랑이라고 했다. 뻐드렁니가 심해 입이 잘 닫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5년 크레인의 모습. 크레인을 기억하는 관람객들은 크레인을 침흘리는 호랑이라고 했다. 뻐드렁니가 심해 입이 잘 닫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전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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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은 2000년 서울동물원에서 태어났다. 크레인의 부모는 남매였고 크레인은 전형적인 근친교배에 의해 태어난 열성인자를 가지고 있었다. 몸은 약했고 자라면서 안면 기형도 생겼다. 모든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가장 사랑받는 시기는 새끼일 때다. 동물이 태어나면 동물원은 홍보를 시작하고 관람객들은 새끼 동물과 사진을 찍고 언론기자들도 그때만 몰려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크레인은 자랐고 못생긴 외모 때문인지 2004년 지방 동물원으로 팔려갔다. 대부분 동물들의 삶은 이렇게 이 동물원 저 동물원을 전전하면서 끝나게 된다. 그런데 크레인이 살던 지방 동물원이 부도가 났고 동물원의 동물들은 거의 굶다시피 하면서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난 2012년이었다.

크레인, 동물원법 제정의 계기 마련하고 한 많은 17년 삶 마감

크레인을 만난 것은 지난 2012년 겨울 원주에 있는 동물원이었다. 원주에 있는 동물원은 벌써 여러 번 부도가 나서 거의 문을 닫기 직전이었고 이미 동물들의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다. 유럽 불곰은 정형행동이 극심했고 털빛도 나빴으며 몸집은 다른 동물원의 불곰에 비해 현저히 작았다. 제대로 된 영양섭취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작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크레인을 처음 만났던 황윤 감독은 그날 원주 동물원에서 6년 만에 크레인과 재회했다. 동물단체 활동가들은 크레인이 열악한 동물원에 방치된 책임 중 일부는 서울동물원에 있다고 판단했다. 사실상 근친교배에 의한 동물의 탄생은 동물원이 종 관리에 실패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생전의 크레인 모습.
 생전의 크레인 모습.
ⓒ 서울대공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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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박원순 시장님의 배려로 크레인은 서울동물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크레인이 유명한 동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른 동물들은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동물원의 경우 회생이 불가능하다면 폐쇄하고 남은 동물들을 보호할 시설과 법적 근거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동물원을 만들고 관리하는 종합적인 법이 없었다. 이 사실은 여론의 힘을 얻었다. 서명운동이 이어졌고 이 움직임은 장하나 의원의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관한 법률 제정발의로 결실을 맺었다.

원주에서 출발한 트럭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서울동물원으로 들어섰다. 작별에 나왔던 호랑이관 뒤뜰의 풍경들은 그대로였다. 크레인은 돌아오자마자 몸무게를 쟀다. 수컷 시베리아 호랑이는 다 크면 최고 300kg까지 나가지만 크레인은 당시 170kg밖에 되지 않았다. 심각한 영양부족 상태였다.

이후 서울동물원을 방문할 때면 나는 늘 크레인을 만나러 갔다. 크레인은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공간에서 지냈다. 사육사, 수의사 선생님들, 그리고 동물원을 방문한 기자들로부터 크레인의 소식을 종종 듣기도 했다. 크레인을 가까이에서 봤던 사육사 선생님들은 크레인이 원주에서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고 추정했다. 크레인은 행동풍부화에도 잘 반응하지 않았다.

크레인은 다가가면 그릉그릉 소리를 냈다. 고양이과 동물들 특성대로.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
 크레인은 다가가면 그릉그릉 소리를 냈다. 고양이과 동물들 특성대로.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
ⓒ 전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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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을 방문해 전시장에 다가가서 "크레인~"하고 부르면 크레인은 늘 철창 가까이 다가와 그르렁 소리를 내며 철창에 몸을 비벼댔다. 전형적인 고양이과 동물의 행동이었고 반갑고 좋다는 표현이었다. 동물원 사람들을 만나면 늘 화제는 크레인이었다. 크레인과 로스토프는 서울동물원의 뼈아픈 과거를 말해주는 동물임과 동시에 우리가 동물원을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할지 방향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2016년 5월 동물원 및 수족관 관리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고, 서울시는 전시·체험·공연동물을 위한 복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선포했다. 전시동물의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는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중요 공약 중 하나였다. 박원순 시장은 2012년 돌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냈고, 동물원에 올 때마다 크레인을 챙겼다.

21세기 동물원, 생물다양성과 동물복지를 위한 기관으로

동물원은 인위적이며 한정적인 공간이다. 자연 생태계가 아닌 이상 동물을 태어나게 한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책임질 수 없는 동물은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동물의 번식은 철저한 유전학 연구에 기초해 종보전 가치가 있는 동물에게 한정해 이루어져야 하며 한국의 기후 조건에 맞지 않는 동물의 전시는 차츰 줄여야 한다.

여름만 되면 몸에 녹조가 끼는 북극곰과 겨울 내내 좁은 실내전시관에 갇혀 살아야 하는 코끼리 등 열대 동물의 수도 줄여야 한다. 동물원의 개체 수가 늘어나면 한 동물에게 돌아갈 복지의 수준은 계속 낮아진다. 이것은 수학적 계산으로도 가능하다. 전 지구적 생물다양성 보전에 앞장서는 동물원에는 과감하게 국가적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며, 오직 오락적 상업적 가치만 발전시키는 동물원은 관리감독하고 규제해야 한다.

서울동물원은 여러 규제에 묶여 제대로 된 리뉴얼조차 못 하고 있다. 전시관이 좁아 날지 못하는 독수리들.
 서울동물원은 여러 규제에 묶여 제대로 된 리뉴얼조차 못 하고 있다. 전시관이 좁아 날지 못하는 독수리들.
ⓒ 전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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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방 동물원이 기린관. 기린은 몸의 길이때문에 한번 실내에서 쓰러지면 기중기가 없는 이상 잘 일어나지 못한다. 기중기가 없는 동물원이 허다하다. 동물복지를 실현할 수 없다면 전시를 중단해야 한다.
 한 지방 동물원이 기린관. 기린은 몸의 길이때문에 한번 실내에서 쓰러지면 기중기가 없는 이상 잘 일어나지 못한다. 기중기가 없는 동물원이 허다하다. 동물복지를 실현할 수 없다면 전시를 중단해야 한다.
ⓒ 전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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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관람객에게 시달리고 제대로 된 음식과 물도 제공받지 못한 채 질병에 걸려도 방치되는 동물들이 허다하다. 왜 치료해주지 않느냐는 질문에 가격이 싸고 번식을 잘하니 괜찮다는 답이 돌아오는 곳. 그곳은 동물원이 아니라 동물을 이용한 돈벌이 기관이 아닌가.

서울동물원은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가치 있는 종보전 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으나 과천시에 위치해 서울시의회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동시에 그린벨트 및 각종 규제에 묶여 있어 제대로 된 리뉴얼(재단장)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동물원에 대한 기준과 중심을 잡을 필요가 있다.

지난 25일 크레인의 죽음 소식을 듣자 2003년 <작별>에서 본 아기 호랑이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크레인은 태어나서는 안 되었다. 크레인은 평생 사람들의 놀림감으로 살았지만 동물원의 동물 역시 살아있는 생명이며 그들에게도 삶의 질이 있고 복지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크레인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싶다.

"크레인,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남아있는 동물들에게 작은 희망을 줘서. 호랑이별로 돌아가면 다시 태어나지 말아라. 이 지구별에서라면 그 어떤 생명체로라도."


태그:#동물원, #동물복지, #동물을위한행동, #작별, #크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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