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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시 100편을 써서 책으로 만들어 선물할게!"

결혼할 무렵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그까짓 거 뭐 대충해도!' 그런 오만이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삶의 고단함에 한 방 먹고 말았다. 10년이면 되리라 예정했던 시일은 어느덧 20년이 지나가고 있었고, 시집은 100편의 절반인 50편에서 멈춘 채 길을 잃은 나그네가 되고 말았다.

아이들 셋, 옮겨 다니는 직장, 허덕거리며 살던 와중에 아내는 희귀 난치병을 얻어 사지마비로 자리에 눕고 말았다. 24시간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는 간병인이 된 나는 모든 꿈과 계획을 접어야 했다.

아내의 발병 6년만인 2013년 시집 대신 오마이뉴스에 '여보 일어나'라는 간병일기를 연재했다. 글을 본 위즈덤하우스에서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라는 간병일기를 책으로 내주었다. 그 책을 시집 대신 아내 손에 쥐어주었다. 삶은 시처럼 되지 않고 더러는 간병으로 채워지기도 하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이 나오고 '새롭게 하소서' '강연100도씨' 등 TV와 라디오 방송도 나갔지만 삶은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속상하고 억울하지만 간병생활은 계속 됐다. 당연히 간병일기도 계속 썼다. 살아 있는 동안은 모든 것들은 계속 되는 법인가 보다. 행복하든, 고통스럽든 상관없이.

어디 내 처지만 별난 삶일까? 우리는 모두 조금씩 종류가 달라도 각자 자기 인생이라는 그림을 완성시켜가는 화가다. 어쩌면 자기 드라마의 주연배우들이고. 그런 생각으로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의 느낌과 꿈을 한 편 씩 쓴다. 아내에게 못 지킨 시 100편의 약속을 생각하면서... 시집 대신 받고 '퉁'쳐주고 용서해주시라 아내야!

<사랑, - 놓아주고 들어주고 바라보아주는 것이 더 좋다더라.>

"내가 잘해줄게"
"나만 믿어!"

그러다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나만 따라오라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착한 사람도 아주 나빠질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왜 말을 안 들어?"
"그런 식으로 할 거야? 못 살겠다!"

30년을 문 닫는 연습만 하고 뒤로 20년을 그렇게 실습하며 살았다.
그러는 동안 아내도 아이들도 상처가 나고 멍들고 있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육이었다.
그걸 알기 시작한 것은 아내가 철퍼덕! 중병이 들고 나서였다.
동물은 사육만으로도 병이 나지 않지만 사람은 병이 난다는 걸,

50년이 걸렸다.
사랑, 미안하다는 말로 다시 시작할 수가 있다는 걸 알기까지는

"나는 그저 이해해주고 들어주기를 바랐을 뿐이야,
뭘 해결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고..."

아내와 딸의 그 말을 참 오래도록 삼키지 못하고 입에 물고 살았다.
쓰디쓴 한약처럼, 조금씩 목으로 흘려 넘기면서

<가장 소중한 선물 - 살아 있는 오늘, 그리고 딸과 아내, 아픈 채로라도>

"야! 딸, 그러고 돌아다닐 거야?"
"뭐가 어때서?..."
"그래도 그거는 아니지"

딸아이는 빨간 츄리닝 바지에 양말도 없이 슬리퍼를 끌고 나간다.

"60살 전에는 시집도 안 보낸다며? 그럼 뭔 상관있어!"
"그건 그거고..."

아내는 22살에 나에게 시집을 왔다.
그리고 결혼 20년 만에 주부와 엄마와 아내 자리를 파업해버렸다.
희귀난치병 사지마비로.

초등학교 5학년에 졸지에 부모 있는 고아가 되어버린 막내 딸
5년을 혼자 잘도 살아내더니 고1 되어 성적표 한 장을 내민다.
가방에 굴러다니다 너덜해진 종이, 400명 중에 10등쯤 된 성적표다.

어느 날 아내가 하얀 침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난 이제 못 살아..."

해 뜨고 해 지도록 밥도 굶고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는 노을을 보았다. 울었던가? 안 울었던가?

다행히 꿈이었다.

내게는 상위 5% 성적표도, 건강회복의 기적도 아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춘화현상' - 그래도 추운 겨울이 꽃을 진하게 한다!>

"빨리 와서 같이 먹자!"
"먼저 먹어, 이거 마저 다듬어서 갈게!"
"애들아! 먹자~"

어머니에 조카들까지 8명이나 되는 식구가 왁자지껄.
내리는 눈을 그대로 맞으면서 시골 마당에서 석쇠에 온갖 것을 먹었다. 삼겹살, 칼집 낸 생닭, 추수해서 보관한 콩, 마늘종까지.
그렇게 몇 해 전 겨울은 참 요란했다.

"당신은 결혼생활 중 언제가 행복했었어?"
"... 난 사람들이 두려웠어, 그래서 행복하기 힘들었던 같아"

면목이 없었다. 명색이 20년이나 같이 산 남편인데...
겨울 아침 새벽같이 먼 병원으로 가서 피검사를 하고 내려오는 길.
몸은 고단하고 마음은 편치 않았다.

"혹시 다시 태어나면, 넉넉하고 스트레스 안주는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아."
"...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 이렇게 아파보니 사는 게 겁나"

병으로 무너지는 아내의 몸은 손에 쥔 것을 다 놓게 했다.
적금도 직장도 집도 날리고 마침내는 아이들조차 뿔뿔이.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뭘, 우리 사이에! 흐흐"

목욕과 식사는 물론이고 소변과 기저귀까지 내게 맡긴 아내.
졸지에 갓난아기가 되었고 나는 24시간 어미가 되어 갔다.

계절의 겨울은 한 해에 한 번 오지만 인생의 겨울은 수시로 온다.

덧붙이는 글 | 산의 중턱쯤을 오를 때 '여보, 일어나!' 간병일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했었다. 얼마나 큰 위로와 탈출구가 되었는지 모른다. 바깥 현실과 내면의 고통까지 어느 정도 덜어 주었다. 그럼에도 글을 쓴다는 것은 한편으로 힘이 들기도 했었다. 수시로 닥치는 질병의 무게와 갑갑한 간병생활은 벽들이 되었다. 그러나 좀 쉬면서 보니 모두가 비슷한 짐들을 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감기와 암의 무게가 하늘과 땅 차이일까? 어쩌면 내 문제냐 너의 문제냐가 더 크게 좌우하더라는 아픈 사실도 경험했다. 그래서 그냥 사는 이야기다. 어떤 상황도 다 사는 범위 속의 이야기들일테니.



태그:#간병일기, #여보, 일어나, #희귀난치병, #가족,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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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인생의 핸들이 내 손을 떠났다. 아내의 희귀난치병으로, 아하, 이게 가족이구나. 그저 주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내 꿈은 사람사는세상을 보고 싶은 것, 희망, 나눔, 정의,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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