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박열> 메인포스터

<박열> 메인포스터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01.
역사적 사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가 된다. 우리나라와 같이 외세의 침략과 수탈을 끊임없이 겪어야만 했던 국가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 민족의 애환과 같은 감정들을 내포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영화의 흥행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역대 박스오피스 10위권에 <명량> <국제시장> <암살> <광해, 왕이 된 남자>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포함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역사극은 어떤 지점을 작품의 중심에 두느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건을 표현하는 데 힘을 쏟는 '시대극'과 한 시대 속에서 어떤 인물이 걸어간 발자취를 따르며 그의 인생과 업적을 그려내기 위한 '전기물'. (그 쓰임의 차이가 미묘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시대극과 역사극이라는 단어는 혼용되고 있으나, 이 글에서는 구분하도록 한다) 최근의 흐름은 '시대극'에서 '전기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영화 <박열>은 그런 흐름 속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역대 박스오피스 정보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02.
이 작품의 이준익 감독은 인물의 이야기를 그려내는데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전작인 <동주>에서 보여준 윤동주(강하늘 역)와 송몽규(박정민 역)는 물론, 그의 최고 흥행작인 <왕의 남자>에서도 광대 장생(감우성 역)과 왕 연산군(정진영 역)이 작품의 8할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인상을 남겼다. 또 다른 작품 <라디오 스타>의 최곤(박중훈 역)과 박민수(안성기 역)은 또 어땠고. 이처럼 그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 속에는 인물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역사나 시대적 상황을 뒤에 두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지난 작품 <동주>부터는 억지로 꾸미지 않은, 실존 인물이 갖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 그의 장점은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1923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을 배경으로 억울하게 죽어갔던 한국인들을 대변했던 박열(이제훈 역)과 그의 연인이자 동료였던 후미코(최희서 역)에 대한 이야기. 다른 작품들과 크게 차이를 설명할 만한 기술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두 인물의 이야기를 쉽게 지우기가 힘들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특히, 후미코의 모습은 더욱 그렇다.

 <박열> 스틸컷

<박열> 스틸컷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03.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인력거를 끌던 박열은 2전이 부족해서 일본인에게 몰매를 맞으면서도 가랑이를 붙잡고 버티고, 후미코는 월간 조선청년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에 감명받는다. 단순한 도입부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박열이 어떤 성격을 가진 인물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면서, 아나키즘적 동지애와 함께 정인(情人)으로서의 연정을 느끼게 됨을 표현하고 있기에 짧지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준익 감독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조금씩 드러내는 방법들을 자주 이용해 왔다. 인물이 가진 성격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의 흐름은 작품의 전체적인 개연성까지도 자연스럽게 확보하게 한다.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그려나가는 방식은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에까지 힘이 생기게 만든다.

04.
그런 점에서 관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박열이라는 인물이 이준익 감독의 작품 속 주인공이 된 것은 흥미롭다.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역사 속 인물과는 다른 부분들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도들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누명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의욕만 강한 청년이었다. 관동대지진을 수습하는 분위기 속에서 6000여 명의 조선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참극이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불령사라는 조직을 만든 장본인이기는 했으나, 그 전에도 몇 번의 조직을 구성하고 해체하는 등 성과를 얻지 못했던 인물이 바로 박열이다. 일반적으로 일제에 맞서 구국 운동을 시도하거나,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된 이들이 탄압을 받은 것과 달랐다는 의미다. 그는 조선인 학살이라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일본의 필요에 의해 누명을 쓰고 자진해서 형무소로 향한 인물이었으니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조선인들을 대변하고 제국주의의 악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자신이 벌이지도 않은 일들로 꾸며진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자 했던 그의 행동 역시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이런 차이에서부터 그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05.
태생은 일본인이지만, 그런 박열의 곁에서 뜻을 함께하고 부패한 일본 제국주의 정부의 어두운 부분을 반박하는 일본인 후미코는 이 영화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그 당시 실제로 우리 민족이 대적해야 했던 것은 평범한 일본 시민들이 아니라, 조선의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무너뜨리고자 했던 정부와 그에 옹호한 극우 세력이었다는 것. 그녀의 과거와 아나키즘적 사상이 영향을 주었던 것이겠으나, 적어도 영화 상에서 그려진 그녀의 모습은 누구보다 앞서 조선의 목소리가 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조작되었기에 모든 결과가 정해져 있었던 박열과 후미코의 처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최소한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고자 했던 다테마스(김준한 역)와 자청하여 두 사람을 변호했던 후세(야마노우치 타스쿠 역) 역시 그녀의 의미를 뒷받침한다.

둘째는 당시에 보기 힘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매체의 지면에서는 박열이 그녀에게 동거를 제안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실제로 영화에서 동거를 먼저 제안하는 것은 후미코였다. 뿐만 아니라 박열을 따라 구치소로 가는 것 역시 그녀 본인의 의지였으며, 마지막 죽음 역시 본인이 스스로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자기 결정권을 인지하고 행사했던 한 여성의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었던 두 사람.

잘못한 것이 없으니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었던 두 사람.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06.
실화를 바탕으로 하거나, 실존 인물을 극의 소재로 이용하는 것에는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고, 그 결과를 전복시킬 수 없다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작품들이 끊임없이 소개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산업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단순한 수익성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아픈 역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들. 결말이 어떨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불편한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으로나마 함께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것들이다. 영화가 끝나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보내던 사랑스러운 미간의 찡그림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 걸 보아, <박열>은 그런 두 지점 사이의 감정을 잘 헤집어 놓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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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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