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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 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그동안 개인적인 이유로 수 개월간 연재를 올리지 못했음을 깊이 사과드립니다. 연재를 재개하오니 독자님들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2015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순회강연을 마치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북녘의 수양딸을 찾아 북한을 여행했습니다. 또 2015년 10월 초에도 북한을 한 번 더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통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하려 합니다. - 기자 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탈북동포 김련희씨의 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탈북동포 김련희씨의 딸.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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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5일, 북으로의 송환을 요구하며 남한에 살고있는 탈북동포 김련희씨의 가족을 만나는 날이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일정 중 하나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자격으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나는 것으로 돼 있지만, 내 의도는 사실 인터뷰가 아니다. 오늘 김련희씨와 그녀의 가족은 김련희씨가 남으로 간 후 처음으로 메신저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는 날이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몇 번이고 휴대전화를 켜고 페이스북이 제대로 연결되는지 확인했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북한의 '해외동포사업국' 건물이다. 이곳은 주로 해외동포들과 북한 내 친척들의 상봉 장소로 이용된다고 한다. 또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한 해외동포 친척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서 머무른다고도 한다.

초조한 마음에 서두르다 보니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나는 기자 완장을 팔에 차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련희씨의 남편과 딸이 도착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딸 련금씨가 나를 바로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한다.

"안녕하십니까. 김련금입니다."
"어머, 어머니 하고 꼭 닮았네요."

"이렇게 멀리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어요. 련금양, 어서 앉아요."


인사를 마친 김련희씨의 딸이 이내 울음을 터뜨리며 내게 묻는다.

"저의 오마니를 마지막으로 보신 게 언제입니까? 기자 선생님은 남조선에 들렀다 오시는 길인가요?"
"아니오. 나는 련금이의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어요. 인터넷을 통해서만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남조선에 들르지 않고 미국·중국을 거쳐 평양으로 바로 왔어요."


나는 차마 내가 남한에 입국금지돼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설명은 련금이를 더 절망적으로 만들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탈북동포 김련희씨 가족에게 내가 실제로 만나고 싶었던 이유를 설명하며.
 탈북동포 김련희씨 가족에게 내가 실제로 만나고 싶었던 이유를 설명하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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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고 있던 기자 완장을 팔에서 떼어내 테이블 위에 놓으면서 련금이에게 말했다.

"나는 기자의 자격으로 만나자고 했지만 사실은 련금양과 남조선에 계신 련금양 어머니를 인터넷으로 연결해주려고 해요."

내가 휴대전화를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이제 내가 남조선에 계신 어머니를 인터넷으로 연결할 거예요. 그럼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면 돼요."
"네? 어머니를 연결해주신단 말입니까?"
"네, 잠깐만 기다려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내원 경미가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친다.

"신 선생님, 인터뷰하신다 기랬는데 기건 안 됩니다. 미리 요청을 하셨어야지, 기건 안 됩니다. 야아~,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경미야, 남조선에 있는 김련희씨는 얼마나 사무치게 이곳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겠니. 그리고 지금 여기 련금이는 얼마나 애타게 어머니가 보고플까 생각좀 해봐. 경미야, 잠깐이면 되니까 좀 양해해 줘."


"저도 지켜보고 있는 심정은 똑같습니다. 긴데 이건 안 됩니다. 이건 공화국의 법을 위반하는 겁니다. 저 큰일 납니다."
"경미야, 잠깐이면 돼. 잠깐이면.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 모녀가 얘기 좀 나누게 하자."
"선생님이 어떻게 책임을 지십니까? 선생님은 떠나시면 그만이지만 책임은 제가 져야 한단 말입니다. 미리 그렇게 하신다는 요청을 하셨어야지요. 전 정말 모르겠습니다."


경미가 핸드백에서 전화기를 꺼내들고 밖으로 나간다. 혹시라도 경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해진다.

남한에 있는 김련희씨와 북한에 있는 김련희씨의 딸이 나눈 페이스북 대화 내용.
 남한에 있는 김련희씨와 북한에 있는 김련희씨의 딸이 나눈 페이스북 대화 내용.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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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면서 나간 사이 나는 김련희씨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메신저를 열었다. 현재 함께 있는 사진을 두 장 찍어 보내면서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신은미입니다. 지금 가족을 만나고 있습니다. 사진 보이나요?"
"와~~~,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사진이 보이냐고 재차 물었다.

"우리 딸 너무 예쁘네요. 네, 잘 보여요. 페북으로 통화도 할 수 있나요?"
"지금 시도를 하는데 잘 연결이 안 되네요."


김련희씨와 내가 페이스북 친구 관계가 아니라서 그런지, 무슨 이유인지 통화 연결이 잘 안 된다. 전화를 련금이에게 넘겨주자 눈물을 떨구며 자판기를 누른다.

얼마 안 돼 경미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내 카메라를 들고 동영상 촬영을 도와준다. 뜻밖에도 전혀 걱정스러운 표정이 아니다. 안심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 모녀가 손가락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탈북동포 김련희씨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언론을 통해 그녀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가고싶어 한다는 딱한 사정을 알고 있는 정도다. 한번은 그녀가 내게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자신의 한국 주소를 영문으로 표기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는데 그 일을 도와준 게 전부다. 그런 그녀가 너무나 안타까워 내 스스로 그녀를 평양의 가족과 연결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나 자신도 남한에 입국금지가 돼 갈 수 없는 형편이지만, 나는 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서울 어머니와 전화 통화도 할 수 있고, 게다가 또 어머니께서 1년에 한두 번씩 미국에 오시니 큰 불편은 없다. 다만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딸을 보러 긴 비행시간을 견디셔야 하는 것과 혹시라도 서울의 어머님과 시어머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갈 수 없다는 정신적 부담이 있을 뿐이다.

탈북 브로커에 속아 남한에 왔다는 김련희씨.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으면 영원히 사회에 나갈 수 없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남한 사람이 됐다고 한다. 그후, 감옥을 드나들며 북송을 요구하는 그녀는 지금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될 위기에 처해 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가게 해달라는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인 셈이다.

민족의 분단은 지금도 이산가족을 만들어 낸다. 슬픔을 넘어 분노가 치솟는다.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엄청난 인권 유린이다. 분단은 가장 잔인하고도 야먄적인 비극을 우리의 역사에 남기고 있다.

어린 소녀의 무거운 어깨

남한의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탈북동포 김련희씨의 딸 련금양과 김련희씨 남편.
 남한의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탈북동포 김련희씨의 딸 련금양과 김련희씨 남편.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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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의 대화를 마친 련금이가 공손히 전화기를 내게 돌려준다.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다. 연신 눈물을 훔치는 경미의 모습만이 우리의 심경을 대변해줄 뿐이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편이 침묵을 깬다.

"련금아, 한 번 환하게 웃어줄래? 어머니한테 사진을 보내 드리려는데 그래도 환하게 웃어야 어머니가 좋아하실 거 아냐. 그래, 한 번만 환하게 웃어. 그리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봐. 련금이 아버님께서도 환히 웃어주십시오."

련금이도 김련희씨 남편도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탈북동포 김련희씨의 딸 련금양을 배웅하며.
 탈북동포 김련희씨의 딸 련금양을 배웅하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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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글썽이며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아빠를 위로하는 탈북동포 김련희씨의 딸.
 눈물을 글썽이며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아빠를 위로하는 탈북동포 김련희씨의 딸.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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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련희씨의 남편과 딸 련금이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건물을 나왔다. 그리고 련금양을 꼭 안고 말해줬다.

"련금양, 어머니는 꼭 돌아오실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로 훌륭한 요리사가 되길 바라요. 나는 평양에 수양딸들이 있어 자주 오는 편이에요. 다음에 올 때도 꼭 련금양을 찾을게요. 할머니·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잘 모시고 어머니가 오실 때까지 련금양도 희망을 잃지 말고 꿋꿋하게 잘 살아야 해요. 알겠지요, 련금양."

마치 어머니를 만난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은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간다. 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찢어지는 가슴으로 바라본다. 련금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걸어가는 아버지의 팔을 살포시 잡는다. 아빠를 위로하고 있는 것 같다.

탈북동포 김련희씨의 부모님 집에서 (2017년 5월 22일 평양).
 탈북동포 김련희씨의 부모님 집에서 (2017년 5월 22일 평양).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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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7년 5월 북한을 여행하던 중 김련희씨의 친정 부모님댁을 방문해 그분들과 김련희씨를 화상통화로 연결해줬다. 6년 만에 처음으로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김련희씨의 어머니는 딸의 일로 충격을 받고 시력을 잃고 있다. - 기자 주)

북한에서 '자유주의'란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기자 완장을 꺼내 경미에게 돌려줬다.

"이제 더 이상 나는 기자가 아냐. 그리고 김련희씨 가족을 만나게 해준 공화국(북한) 정부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내가 공화국의 법을 위반했다면 처벌을 달게 받겠어."
"걱정 마십시요. 저도 놀라서 전화를 들고 상부에 보고했더니 가만히 듣더니만 '잘하셨다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헤어진 모녀가 대화를 나누는 게 당연한 일이지, 뭐…."


"정말 다행이다. 그분께 고맙다는 인사 꼭 전해드려."
"알겠습니다. 긴데 다음부터는 자유주의(마음대로 하는 행동) 하시면 안 됩니다. 웬만한 건 숨기지 마시고 꼭 미리 요청하십시요."


차창 너머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소프트볼 연습장이 눈에 들어온다. 북한에서 잘하지 않는 스포츠로는 골프와 야구가 있다. 평양에 골프장이 하나 있긴 하지만, 주로 외국인이 이용한다. 스크린 골프가 등장했지만 이는 오락에 불과하다. 야구도 하는 건 본 적이 없다. 대략 야구와 비슷한 소프트볼 경기도 북한에서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본다. 언뜻 미국 한 동네를 지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평양의 소프트볼 연습장.
 평양의 소프트볼 연습장.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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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커피숍에서 김밥을 먹으면서.
 호텔 커피숍에서 김밥을 먹으면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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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바로 앞에 노점상들이 있다. 과일도 팔고, 길거리 음식도 판다. 나는 경미에게 오늘 점심은 길거리 음식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남편이 얼굴을 찡그린다. 왜냐하면 길거리 음식 매대에선 술을 팔지 않기 때문이다. 절충을 했다. 길거리 음식을 사서 호텔에 가져가 대동강맥주와 함께 먹자고 말이다. 우리는 김밥을 샀다. 지난 6월(2015년 6월) 너무 맛있게 먹었던 기억 때문이다.

북한 김밥은 속에 든 것도 없는데 고소하면서도 담백하니 아주 맛있다. 이번에 산 김밥도 역시 마찬가지다. 얇은 계란말이 조각에 단무지처럼 생긴 짠지무가 전부다. 그런데도 밥 양념을 잘해서 풍부한 맛을 낸다. 심술쟁이 남편만 대동강맥주에 김밥을 먹으며 투덜댄다.

"에이, 참. 소주에 육회 한접시하고 시원한 냉면 한 그릇 먹으면 좋겠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하루

왼쪽 부터 설경이 남편 주혁남, 설경이, 그리고 경미.
 왼쪽 부터 설경이 남편 주혁남, 설경이, 그리고 경미.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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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식사는 평양의 딸들과 함께하기로 돼 있다. 그런데 둘째딸 설향이는 몸이 몹시 안 좋아 참석하지 못했다. 배가 잔뜩 불러 힘이 많이 드는 모양이다. 우리는 대동강가에 있는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단연 오늘의 화제는 탈북동포 김련희씨다. 오늘 있었던 일을 모르고 있는 첫째 딸 설경이가 많이 궁금해 한다.

"오마니, 탈북여성 가족은 잘 만나 보셨습니까?"
"응, 딸이 요리학교를 다니는데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고 있는 것 같아 그래도 안심이 돼. 오히려 남편 되시는 분께서 더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긴데 어케 남조선엘 갔답니까?"
"본인은 꼬임에 넘어갔다고 해. 그래서 남조선에 도착하자마자 북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이미 남조선 국적을 취득해 불가능한 거지. 북으로 오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다 잡혀 감옥에 갔다 오기도 했고. 참 안됐어."


"좀 돌려보내 주면 좋겠구만."
"그래서 오늘 인터넷으로 모녀를 연결해 줬어. 남으로 간 후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거지."
"네?"


왼쪽부터 설경이와 경미.
 왼쪽부터 설경이와 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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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경미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끼어든다.

"말도 맙시다, 설경 동무. 인터뷰하시갔다고 해서 조직을 했는데 갑자기 기자 완장을 내려놓고 인터네트로 남조선의 김련희씨를 불러내지 않갔습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경이가 묻는다.

"기래 오케 됐습니까?"
"나도 옆에서 보면서 눈물은 나지, 보고는 해야 갔지, 뭐 죽을 맛이었지요."
"모녀가 대화는 나눴습니까?"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문제는 없었습니까?"

"잘 됐습니다. 긴데 이제는 신 선생님도 안심을 못하겠단 말입니다. 이제까진 정 선생님(남편)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신 선생님 자유주의도 대단합니다. 한 번 했다 하면 쎄게 하시니까 말입니다."

경미가 오늘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찻집에서 설경이 부부와 함께.
 찻집에서 설경이 부부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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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찻집으로 옮겨 못다한 정을 나눈다. 설경이가 경미에게 다음날 일정을 묻는다.

"내일은 오데 일정이 있습니까?"
"자강도에 갑니다."
"자강도엘 말입니까? 거게는 왜?"
"정 선생님께서 다른 데는 다 보셨는데 자강도만 못 가보셨다고 해서 희천까지 다녀오려고 합니다. 희천댐까지 말입니다."

"조심 단단히 하십시요. 우리 아바이 자강도에서 잃어버리면 양강도에나 가서 찾아야 합니다."
"찾으면 다행이지 싶습니다."


남편은 수양딸들 사이에서 '자유주의'로 악명이 높다. 그래도 엄청 나아졌다. 마구 이탈하는 일도 없고, 절이나 교회에 가서 이제는 "이거 가짜 아닙니까?" 같은 막말도 절대 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남편의 시한폭탄 같은 성격 때문에 어딜 가나 조마조마하긴 한다.

설경이 부부와 작별 인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온다. 서운함 그득 담긴 설경이의 눈망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 하루다.

설경이 부부와 헤어지며.
 설경이 부부와 헤어지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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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북한, #평양, #김련희, #신은미,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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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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