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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장관, 접시꽃 당신 그리고 '참으로 딱한' 나

17.06.29 15:45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작고하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께서는,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본인이 젊은 시절, 고려대 도서관 공사장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고대 도서관은 자신이 지은 거나 마찬가지라고….공사장에서 한 일이라고는 막노동에 불과하였겠지만, 듣기에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사실 남자들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 하는 것을 들으면, 대한민국은 자기들이 다 지킨 듯하다.

그런 점에서 나도 할 말이 있는데..

대한민국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밀리언셀러 시집이   [접시꽃 당신]이다.

[접시꽃 당신] 위 사진이 초판본과 같다. 다만 초판 1쇄인지의 여부는 모른다. ⓒ 이재선

이 시집은 1986년 실천문학사의 실천시선 37번째로 간행된 시집으로, 도종환 장관의 대표적 시인 <접시꽃 당신> 을 비롯하여 약 70여편의 시가 담겨 있다.

나는  그 당시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 재학중이었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실천문학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의 실천문학사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일명 자실) 회원들이 출자하여 설립한 출판사였다.

창작과 비평사와 더불어, 진보적 문인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소위 "사회과학 출판사"이자, 그들의 소굴(?)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책이 사회과학 서적이거나, 진보 성향 문인들의 작품이었다.

사장은 지금은 작고하신 [관촌수필]의 이문구님, 주간은 [다시 월문리에서]를 쓴 송기원님, 나는 편집부 막내….출판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신입사원격이었는데..

당시 출판 환경은 현재와 매우 달라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지금은 전부 컴퓨터로 편집을 하고, 필름을 출력하여, 인쇄한다.

그러나 1986년에는 납활자로 편집을 하고, 지형이라는 틀을 만든 다음, 인쇄소로 넘겨서 인쇄를 하는 활판인쇄 시절이다.

활자 편집은 서체 지정이나, 자간 설정 등 복잡한 과정이 있어서, 능숙한 편집인이 되려면 어느정도 도제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나같은 촛자 편집인에게는 아주 쉬운 편집물이 배당된다.

시집이 편집하기에 상대적으로 쉬운 것이라, 나에게 첫 업무로 배당된 것이 바로  [접시꽃 당신]이었다.

당시는 86년…

전두환의 철권정치에 수많은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매일매일 거리로 나와서 싸우던 시절이었다.

실천문학사에 입사하기 전에, 내가 한 일도, 학내에서 열심히 "독재타도"를 외치던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읽은 책은 대부분 사회과학 서적이었고, 문학에 별 소양이 없는 내가, 그나마  읽은 시도 대부분 김지하, 황동규, 양성우, 황지우, 김남주,박노해 등등의 시였는데,
특히 김지하의 황토길,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비, 양성우의 겨울공화국,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등은 아주 감동이 깊었다.

따라서 시라면, 안타까운 조국의 현실을 다루는 내용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
………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황토길 일부>

대부분 이런 류의 시였는데

첫 직장에서, 첫 업무로 받은 원고가….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
...................
..................
당신과 내가 갈아 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덩을 덮은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접시꽃 당신 앞부분>

이런 내용이었으니.

원고를 읽고, 나도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섰다.

헐!

그동안 읽은 시와는 너무 달랐다.

이 엄중한 시절에 실천문학에서 발간하는 시집이니 최소한  "민주주의","자유" 같은 단어가 행간을 가득 메우고 줄을 설줄 알았는데.

내 나이 당시 25세.

시절은 참으로 하수상하던 독재정권 시절.

아는 것이라고는, "민주주의", "투쟁", "노동해방" 뭐 이런 단어뿐인데..
갑자기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리"다니…

아무튼 문학 문외한에다가 너무 낯설은 싯귀를 보자, 이건 뭐지 하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원고를 편집하여, 조판소로 넘겼다.

그리고 나면 조판된 원고본(교정쇄)이 다시 출판사로 넘어온다.

이것을 초교라고 하고, 3교 정도를 본 이후에 인쇄소로 넘기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시집의 경우는 교열, 교정이 간단하여 대부분 재교 상태에서 인쇄소로 넘긴다.

당시 나는 출판 업무도 익힐 겸하여, 다른 직원들이 퇴근 한 후에 [접시꽃 당신]원고를 교정보고 있었다.

오탈자는 없는지, 행갈이는 제대로 되었는지, 교정쇄를 이리저리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저녁 8시쯤이었다.

이 시간에 누굴까?

전화를 받으니, 전화기 너머로 여성분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자신은 조판집(당시는 조판소를 이렇게 불렀다) 직원이라고 한다.

"실천문학사죠?"

"그렇습니다만.."

"[접시꽃 당신] 편집하는 분 계신가요?"

"전데요…"

"이 시집이 언제 출판되나요?"

" 보름 후 정도가 될 듯한데요..왜 그러시는데요?"

"시집이 나오면 꼭 사서 읽고 싶어서요"

"………"

이런 전화는 처음 받았을 뿐더러, 원고를 문선,교열하는 분이 직접 전화해서 책이 출판되면 직접 사겠다는 얘기도 처음 들었다.

사실 출판사에서는 가끔 이런분들에게 증정본을 주기 때문에, 굳이 돈을 주고 살 필요가 없었다.

며칠 후, [접시꽃 당신] 재교 원고가 넘어서와 교정을 보고 있는데, 이문구 사장님이 뒷편에서 내 원고를 유심히 보고 계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군"

"네?"

"시(詩)가 어떤가?"

편집자 입장에서 시가 어떤지 묻고 계신다.

"글쎄요..잘 모르겠는데요"

난 솔직히 대답했다.

"참 딱하네"

딱 한마디하시더니, 그대로 방으로 가신다.

내가 이문구 사장님이 말씀하신 "참 딱하네"라는 말의 의미를 깨닭은 것은 며칠 걸리지 않았다.

[접시꽃 당신]이 출간되고, 서점에 배포된 다음날부터, 출판사 전화통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당시는 초판을 3천부 정도 발간하여, 서점에 배포하는데, 그 다음날 주문만 5천부가 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 다음날 , 그 다음날에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주문이 쏟아지고, 서적 도매상에서는 직접 차를 몰고 시집을 가져가겠다고 왔다.

언론에서도 난리가 났다.

내 업무는 편집에서, 책 배달로 바뀌었다.

그야말로 장안(長安)의 지가(紙價)가 뛰는 형국이었다.

초등학교 국어교사 출신 무명 시인 도종환도 "자고 나니" 명사이자 전국구 시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시인은 승승장구하여, 국회의원이 되고, 마침내는 대한민국 문화와 예술을 관장하는 문화관광부 장관이 되었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라는 구절을 빌리자면, 오늘의 도종환 장관을 키운 8할은 [접시꽃 당신]인 셈이다.

시집 출간 이후 4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엄청난 기회를 날린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으로 "참으로 딱"하기는 도종환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부인을 사별한,  초등학교 교사 , 가난한 시인 도종환…

그 때, "참으로 딱한"나는, 앞뒷집 처지인 "참으로 딱한" 시인 도종환을 알아봤어야 했다.

후회는 왜 항상 뒤에 오는 것인지….

나는 가끔 술자리에서 회한에 잠겨,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뻥을 깐다.

"………..그러니 사실 말이야, 오늘의 도종환은 팔할이 내 덕이야…"

그러면 친구들은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

"도종환 장관 잘 알겠네"

"나는 도종환 장관을 잘 아는데, 도종환 장관은 날 모르지, 요게 좀 흠인데…어쩌구 저쩌구…궁시렁 궁시렁…"

한가지 이야기 더…

[접시꽃 당신] 시집에는 <열 두가지 기도>라는 시가 있다.

나는 지금 나의 아픔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아픔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나의 절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절망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
………….<열 두가지 기도 중>




책이 날개돋히듯 팔리던 어느날, 독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접시꽃 당신] 편집자와 통화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편집자입니다."


'반갑습니다."


"네"


"그런데 시집 가운데 <열 두가지 기도>라는 시가 있지요"


"네"


"그런데 왜 열가지 기도만 들어 있나요?  제목을 보면 열 두가지 기도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당황한 나는 시집을 펼쳤다.


그리고 세어보니 정말로 열가지 기도밖에 없는 것이다.


"잠간만 기다려 주세요, 원본 원고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처음에 넘어온 시집 원고를 찾아보았다.


아! 독자의 지적대로 열두가지 기도가 있던 것이다.


내가 교열을 보면서 두개의 싯귀를 조판소에 넘기지 않은 것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추가 인쇄본에서 정정토록 하겠습니다."


이래서 [접시꽃 당신] 초판본에는 <열 두가지 기도>의 시에 <열가지 기도>만 실렸다.






그런데 한마디 더…


이 글을 쓰기 위해, 서점에서 30여년 만에 [접시꽃 당신]을 찾았다.


그리고 옛 생각에 <열 두가지 기도>를 다시 읽어보려고 펼쳤더니…


헐…<아홉가지 기도>로  제목이 바뀌었다.


이건 뭥미?








덧붙이는 글 | 1. 접시꽃 당신은 이후 이덕화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수많은 관객을 울렸다.
2. 왜 <열두가지 기도>의 제목이 <아홉가지 기도>로 바뀌었는지 나는 모른다.
3. <열두가지 기도>건은 나의 무협지와 같은 낭만적 기억이라, 굳이 출판사에 확인하지 않았다.
4. 나에게는 현재 초판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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