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이것이 '정치 정의' 개념의 핵심이자 영화 속 '서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이것이 '정치 정의' 개념의 핵심이자 영화 속 '서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메인타이틀 픽쳐스


현대사회에서 자본주의가 가져온 부작용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진행 중이고, 우리 역시 이런 부작용들을 느끼며 살고 있다. 사회학자인 에릭 W. 라이트는 <리얼 유토피아>라는 저서에서 불평등 구조에 저항하기 위한 원칙 중 '정치 정의'를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로 내세운다. 이는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니까, 현대사회는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가 구현된 것처럼 보이는데 정작 시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요소들에 대해 시민들이 개입하거나 정보공개를 청구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영화 <더 서클>의 중심공간인 소셜 미디어 그룹 '서클'이 지향하는 바가 이런 '접근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부에, 정치인에, 언론에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접근권을 보장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서클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모든 것을 공개하는 것이다. 그것이 잘 나타난 구호가 '비밀은 거짓말이다(Secret is lie)'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문장은 일면 맞는 말이다. 어떤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평등하게 주지 않는 사회에서 폐쇄성과 비밀스러움은 많은 경우 주권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온전하게 행사하는 데에 어려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선한 의도가 낳은 파시즘

 머서를 조리돌림으로 단죄하는 대목에서 서클러들이 기술이 자신들에게 어떤 힘을 부여해주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지점이 읽힌다.

머서를 조리돌림으로 단죄하는 대목에서 서클러들이 기술이 자신들에게 어떤 힘을 부여해주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지점이 읽힌다. ⓒ ㈜메인타이틀 픽쳐스


영화는 예상 가능한 서사를 타고 흐른다. 모든 것을 공개하기 위한 노력을 하다가 사소한 실수 하나가 누군가의 일상을 망친다. 주인공은 후에 각성하여 반격을 시도한다. 뻔해 보이는 플롯이지만 씁쓸하게 읽혔던 지점에 대해 복기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하다.

메이(엠마 왓슨 분)는 '화장실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결국, 메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친구인 에이미와 말을 나누기 위해서는 화장실 변기 칸에 들어가야 했다. 정말 말 그대로 화장실에 가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공개되는 셈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공개될 수 있는데 화장실이라고 공개되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혹시 아는가? 화장실도 공개되지만 정작 당사자인 메이는 알 수 없는 상태일지? 그렇다면 이것은 접근권을 향한 욕망이 성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또 다른 장면. 메이의 친구인 머서가 만든 사슴뿔 샹들리에가 포착되고 머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족족 동물학대범, 범죄자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를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메이를 만나러 서클에 들어서자마자 서클러들이 폰으로 그를 촬영하면서 조리돌림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는 겁에 질려 도망간다. 서클러들이 기술이 자신들에게 어떤 힘을 부여해주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단죄할 수 있다.

소울캐쳐(SoulCathcher) 시스템에 의해 위치가 발각된 머서가 추격전 끝에 사고로 사망하는 장면. 이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 영화는 딱히 시간을 쓰지 않는다. 메이와 에이몬의 대화에서 유가족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는 것 이외에 이 심각한 문제에 걸맞은 논쟁이 없다. 영화가 직접 말하지 않지만, 특정 개인에게 문제의 직접적인 책임을 지울 수 없을 때 문제는 어떻게 무마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기술을 성찰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에서 생겨난다. 좋은 기술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기술을 성찰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에서 생겨난다. 좋은 기술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 ㈜메인타이틀 픽쳐스


사실 이런 디스토피아 적인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은 공포를 조장하는 자극성이 돋보이곤 한다. 기계가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다거나, 모든 사람이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거나, 끔찍한 대학살이 일어난다나. <더 서클> 역시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모든 것을 공개하려는 욕망이 이런 파국을 낳는다!

기술에 대한 열광은 분명 비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 머서를 조리돌림 하는 데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메이 부모님의 사생활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기술과 야만성의 공존이 엿보인다. 하지만 처음에 이야기한 '정치 정의'의 문제로 돌아가면, 서클이 요구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현대사회의 국가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주권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서클의 선한 의도가 개인을 억압하고 파국을 낳는 공동체로 향하게 하는 파시즘이 되는 지점은 서클이 만든 기술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기술을 성찰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에서 생겨난다. 좋은 기술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어떤 맥락에서 쓰여야 하는지, 어떤 공적인 가치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는 기술은 폭력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의 결말은 사실 갸우뚱하게 만든다. 메이가 복수를 한답시고 서클의 두 경영자의 비밀 메일도 모두 공개하겠다고 밝히고 모든 내용을 배포하는 장면. 이것은 복수의 형태로 올바른가? 만약 감독이 이 장면을 카타르시스를 주는 대목으로 넣은 것이라면 심히 유감이다. 성찰이 부족한 서클이 만들어낸 기술을 역이용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라면 누구든지 사적인 내용을 보호받지 못하지 않을까? 경영진이 처벌받아야 한다면 머서가 당했던 것처럼 사적인 단죄가 아니라 법적인 해결이 필요하지 않을까? 서클의 기술이 낳은 파국의 본질은 '우리가 모든 것을 판단 내릴 수 있다'는 신념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서클 정치정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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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읽고 보고 쓰고 있습니다. 활동가이면서 활동을 지원하는 사람입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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