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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치민시 전쟁박물관에 있는 학살 장면.
 베트남 호치민시 전쟁박물관에 있는 학살 장면.
ⓒ 전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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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살인" "도살자"

이 험악하고 날 선 말들은 베트남 정치인 등이 대한민국을 향해 내뱉은 말이다. 한 국가가 다른 나라의 지도층에게 이처럼 악의에 찬 말을 들을 이유는 무엇인가. 난데없이 대한민국은 왜 청부살인과 도살자의 오명을 써야 했는가.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수교 이래 지금까지 사회·경제적으로 활발한 교류를 이어왔다. 현재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며 베트남은 한국의 4대 수출 시장 중 하나다. 문재인 정부도 양 국가 간 교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취임 직후 박원순 서울시장을 아세안 특사로 임명해 베트남을 방문토록 하는 등 한베 관계에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양국이 상호 교류와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이때 느닷없이 양 국가를 긴장하게 만든 것은 바로 '베트남 전쟁'의 기억이다.

사실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는 통합과 실용의 가치 아래 식민지배와 전쟁의 상처를 딛고 제국주의 당사국인 미국·중국·일본은 물론 과거 적으로 만났던 한국과도 적극적이고 활발한 교류를 벌이고 있다. 이 노선은 자칫 과거를 '덮'거나 과거를 '잊'은 듯한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키나, 사실과 다르다. 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공식적인 항의만 보더라도 그렇다.

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항의에 우리 외교부도 다음날 바로 관례적인 답변을 내놨다. 한국 외교부는 공식입장에서 "과거를 덮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공통 인식하에 한베 양국 관계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왔다"며 "보훈 차원의 예우를 강조한 것일 뿐 양국관계를 훼손할 의도는 없었다"고 말한다.

이 발언은 사안의 본질을 외면한 것임은 물론, 한베 역사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시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발언을 보면 우리 정부는 베트남이 과거를 '덮었다'고 인식한다. 상대가 '덮었다'고 해서 과오를 모른 척한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일 뿐더러, 이번 사태와 함께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베트남이 과거를 '덮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저 과거를 잠시 닫았을 뿐.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2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2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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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장 걸지 않은 문은 언제든 열리는 법

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에 대한 국내 언론의 반응은 칭찬 일색이었다. 통합을 강조하고 '보훈'과 '애국'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의미 있는 추념사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22번의 '애국' 사이에서 어떤 언론도 베트남전쟁 관련 발언에 대한 문제를 짚어내지 못했다.

문제가 된 발언은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다"라는 대목이었다. 시민사회의 반응도 일부에 그쳤다. 한베평화재단, 인권네트워크 사람들, 민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TF'에서 성명을 내고 역사인식의 오류를 지적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과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정도였다.

한국과 달리 베트남은 들끓었다. 제일 먼저 베트남 VTC NEWS가 언론인 쩐당뚜언과 전 베트남 국회사무차장 응우옌시중 박사의 목소리를 실었다. 제목부터 신랄하다. "한국 대통령의 애국심에 대한 기괴한 관점" "'청부살인'은 영원토록 부끄러운 일".

응우옌시중 박사는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에 대해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이유가 바로 돈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돈을 위한 참전 행위는 '청부살인'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박정희 부대의 베트남전 참전이 한국 경제에 기여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베트남 사람들을 모독한 것이지만 한국 사람에 대해서는 그 10배의 모독을 안겼다"고 말한다. "한국 경제는 한국 국민들의 희생과 투쟁, 그리고 창조적인 노동 정신과 국민들의 희생으로 일구어진 것이지 베트남전 참전 덕분이 아닐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비판적 기사들에 대한 베트남 네티즌의 지지 댓글과 반한 여론이 일자 베트남 외교부가 공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베트남 외교부는 12일 "한국 정부가 베트남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양국의 우호 협력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발언과 행동을 삼가 줄 것을 요청한다"는 레 티 투 항 대변인 명의의 입장을 밝혔다.

이는 베트남 외교부 대표가 이미 주 베트남 한국 대사관 대표와 문재인 대통령 현충일 추념사 발언에 대해 엄중한 교섭을 진행한 후였고, 우리 정부의 제대로 된 답변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입장이었다. 이러한 양국 외교부의 입장 발표로 표면상 이 문제는 수습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놔둔 채 또다시 봉합하는 데 그치는 모양새다.

'월남전' 문구 삭제에서부터 <태양의 후예> 논란까지

한베 역사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드라마 <태양의 후예> 신드롬이 한창일 때, 이 드라마의 방영을 앞두고 베트남 내에서 찬반 논란이 일었다. 당시 베트남 인터넷 신문 <베트남익스프레스>는 <태양의 후예>의 자국 방영이 많은 이들의 기대감과 함께 과거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지적은 베트남 쩐 꽝 티 기자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이나 중국 방송에서 일본군을 찬양하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나는 증오를 의도적으로 선동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를 다시 질문해 봐야 한다"는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이 글은 베트남 국민 사이에 9만 건 가까이 공유되면서 <태양의 후예> 방영 논란을 불러왔다. 그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후예>는 결국 베트남에서 방영됐다.

전쟁이 끝난 지 42년이 됐지만, 전쟁에 얽힌 과거사는 양국 외교 관계에 금기사항이다. 모른 척 외면해 온 진실이 불쑥 고개를 내밀 때 '불편한 동맹'은 깨지기 마련. 이로 인한 해프닝은 비단 최근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뿌리가 깊다.

2009년 이명박 정부 당시 한베정상회담을 앞두고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베트남을 당일치기로 방문했다. 베트남 전쟁 참전자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법률 개정안에 베트남 정부가 강력 반발하자 급히 수습에 나선 것이다. 해당 법안은 국가보훈처가 입법 예고한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으로, 애초에 '세계 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와 고엽제 후유증의증 환자들을…'이라는 문구를 넣으려 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을 '미 제국주의자' 등 외세를 배격한 통일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는 베트남 정부의 공식 방침과 정면으로 충돌해 '월남 전쟁'을 삭제하고, '세계 평화 유지에 공헌한 유공자~'로 바꿨다고 한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베트남 정부의 반발을 의식해 참전자들에게 보상 혜택은 주되, 법률 조문에서는 '월남 전쟁'이라는 단어를 빼기로 하고 역시 사태를 봉합한다.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지난 28일, 53개 시민사회단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베트남 유학생 응옥 루옌(40)씨는 "한국 군인에 의해 베트남의 많은 민간인이 생명을 잃었다는 것을 반성한다면,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28일, 53개 시민사회단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베트남 유학생 응옥 루옌(40)씨는 "한국 군인에 의해 베트남의 많은 민간인이 생명을 잃었다는 것을 반성한다면,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이재갑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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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53개 시민사회단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1999년부터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통해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베트남에 대한 사죄운동을 벌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한국 정부의 외면 속에 20년 가까이 의혹으로만 머물러 있다.

우리는 일본과 다르게 한베 역사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해 나아가야 한다. 그 해결은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이 평화외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것을 '기회'로 만드는 것은 우리 정부의 의지에 달려있다. 반복되는 이 문제를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지난 28일, 53개 시민사회단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 28일, 53개 시민사회단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 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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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석미화씨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입니다.



태그:#베트남 전쟁, #한베평화재단, #현충일 추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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