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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올해 2월까지 근무하던 의정부여자중학교에서 내부 감사를 요청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관련 기사 :  의정부여중 학생들 "우리 영어 선생님 돌려주세요"). 해고 이후 복직을 위한 법적투쟁을 이어가면서 학교 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글을 적는다. 

사범대를 졸업하고도 극구 선생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내가 학교를 첫 직장으로 잡았던 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돈을 벌어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12년 동안 학교 안에서 닮고 싶은 어른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내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좋은 선생이 되겠다고 맘먹는 것은 오만이라고 생각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선배들의 초조하고 지친 얼굴을 떠올리면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정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는 건 당장의 불확실한 미래보다 더 불확실해 보였다.

그렇다고 사범대를 졸업하고선 딱히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사회로 들어가는 것을 무한정 유예할 수도 없었고 당장 생활비도 벌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의정부 여자 중학교라는 혁신학교에 팀티칭 교사로 지원하게 됐고, 대학교까지 도합 18년에 걸친 학교생활을 마무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이 아닌 선생이 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혁신학교에 대한 기대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단기간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좋은 선생이 되겠다는 거창한 것이라기보다는 정해진 기간 동안 민폐 끼치지 않고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뜨뜻미지근한 마음으로 들어간 학교에서 첫해에는 팀티칭 교사로 시작해 그다음 해부터는 영어회화 전문 강사로 3년을 근무하면서 4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의정부여중에서 보냈다. 그리고 계약 기간을 1년 남긴 올해, 의정부여중의 철학에 따라 행동한 결과로 나는 학교에서 쫓겨났다.

'배움으로 세우는 자존감, 실천으로 완성하는 배려 교육'

'달랐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달라 봤자 얼마나 다를까'하는 회의감이 뒤섞인 상태에서 만난 의정부여중은 내가 생각했던 학교와는 분명 달랐다. 개학 전 한 학기 수업 준비를 위한 연수 자리에서 선생님들은 타 교과와 본인의 교과를 연결해내기 위해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고, 학교 철학을 수업을 통해 실현하기 위해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고 교과서와 강의 외의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들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움의 공동체'를 표방하는 만큼 교사들도 배움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같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만큼 한 선생님의 고민이 모두의 고민이어야 한다는 합의가 있는 곳으로 보였다.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된 영어 선생님은 내가 '수업보조'가 아니라 같은 '영어 교사'임을, 그렇기에 수업 준비와 진행, 평가까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하셨다. 경력이 없고 10개월 단기계약직이었지만 선생님들은 내가 학교에 있는 모든 행사와 공개수업에 참여하길 권하셨고, 나는 나를 동료 교사로 여겨주는 그들의 대우에 기꺼이 응하며 그 분위기에 녹아 들어갔다.

아이들이 교과서가 아닌 시를 읽고 직접 쓴 시를 함께 낭독하는 풍경, 영어 문제집이 아닌 영어 동화를 친구와 함께 읽고 텃밭에서 농사를 지어 얻은 수확물로 요리 실습을 하는 풍경. 학급 임원 투표를 하기 전 정당을 만들고 공약을 만들어 토론하는 풍경. 학생들이 직접 만든 대본으로 노래와 춤을 연습하고 뮤지컬을 공연하는 풍경. 그 풍경 속에서 나는 12년의 학창시절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닮고 싶은 선생님들을 동료로 갖게 되었다.

교사라는 자신의 직업과 교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배움을 멈추지 않으며, 그 배움을 아이들 안에서 일어나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늘 서로를 챙기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런 어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 난 참 운이 좋다고, 나도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교사인가'라는 질문

계약 만료 후 영어회화 전문 강사로 계속 근무를 해온 3년은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일을 한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이 성장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존감과 배려라는 학교 철학을 중심으로 교실 안에서 수업을 하는 게 내 일이었지만, 아이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 아이들에 비춰지는 나 자신을 보는 시간이었고 친구를 배려하고 소통하는 아이들을 지켜볼 때마다 내가 쉽게 말한 그 말들을 나는 실천하고 있는지 스스로 되묻는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경험들은 분명 행복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불안과 혼란이 뒤섞여있는 경험이기도 했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모두 나를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대했지만, 내가 스스로를 영어 교사, 영어 선생님이라고 소개할 때면 묘하게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날 '영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먼저 난 강사라고 말하는 것도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선생님들과 함께 있을 때면 늘 즐거웠지만, 가끔은 그들은 정교사이고 나는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닫게 되어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맞는지 머쓱해졌다. 비슷한 나잇대의 기간제 선생님들과 어울릴 때면 같은 계약직이라 하더라도 담임이 아닌 내가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지 늘 조심스러웠고, 매년 2월이면 4년까지 계약이 갱신되는 나와는 달리 매년 새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선생님들을 말없이 지켜보는 일은 답답했다.

수업을 담당하지 않는 계약직 선생님들과는 주 업무의 차이로 수업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고,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영어 선생님들에게 대화를 청하기엔 정교사 선생님들은 언제나 바빠 보였다. 드물게나마 교과 협의회가 있었지만, 바쁘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들 앞에서 수업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건 주제넘은 짓으로 느껴졌다. 누구도 넌 비정규직이고 강사니까 알아서 기라고 명령하지 않았지만, 나는 비정규직 강사로서 선을 넘는 행동을 애써 하려 하지도, 할 수도 없었다. 수업하고 아이들을 만나면서도 '나는 교사인가'라는 질문을 늘 품고 살았다. 멍청해 보이는 이 고민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도 없었고 그 혼란과 불안이 깊어질 때면 차라리 내가 유령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며 쌓인 것들

교장 선생님이 바뀌고 혁신학교를 세우는데 헌신했던 선생님들 몇 분이 다른 학교로 가시면서 내가 넘지 말아야 할 그 선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내 신분에 맞는 옷을 입는 일이 조금씩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회의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관리자 몇 명과 그와 가까운 부장들만 모이는 기획 회의가 별도로 진행됐다. 예전과 다르게 함께 모여 결정하지 않은 행사들이 부장 회의에서 결정돼 선생님들에게 통보되기 시작했고, 이런 문제로 선생님들 사이에서 갈등이 불거졌다.

여전히 적극적으로 의견을 드러내는 선생님들이 있었지만, 다수의 선생님들은 길어지는 회의에 피로감을 호소했고 계약직 선생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열지 않았다. 보직을 맡고 있는 영어 선생님들은 늘 바쁘시니까 같은 동료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넘어갔던 일들과 관련해 애써 지우려고 했던 질문들도 마음 한쪽에 쌓이기 시작했다. 왜 영어과는 다른 교과 선생님들처럼 수업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지 않을까. 팀티칭 수업은 두 명의 교사가 함께 준비하는 것인데 왜 나 혼자만 수업을 준비하고 영어과 선생님들은 그냥 들어오기만 하시는 걸까. 정교사 수업 시수를 내가 맡는 것은 업무편람과 맞지 않는데, 정말로 이 방법밖에 없는 걸까.

의문과 답답함이 쌓여가는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도 같이 늘어갔다. 정교사 선생님들이 내게 맡기는 수업 시수가 늘어갈수록 나는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만큼 내가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교사라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교육과정을 들여다보고 대학 때 교재를 꺼내 새로운 수업 방식을 고민해 아이들을 만날 때면 반마다 각기 다른 반응을 신기해하며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정교사도, 기간제도, 행정직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교실 안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는 난 내 수업을 책임지고 아이들과 호흡하는 선생이라는 생각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늘 자존감을 이야기하면서도 좀처럼 생길 줄 모르던 내 자존감이 아이들을 통해서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 민주주의를 둘러싼 물음들

일반 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전달식 회의가 진행되고 학년부 내의 소통도 쉽지 않다는 것이 드러날 때쯤 학교 내의 민주주의가 화두로 떠올랐다. 우리 학교가 민주적이라고 주장하는 관리자와 민주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선생님들 간에 날 선 논쟁이 이어졌고 늘 그래왔듯 말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다른 학교에 비해 우리 학교는 민주적이며 모두에게 발언권이 있다고, 이 학교가 비민주적이라는 팩트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교장 선생님과 측근 선생님들의 말은 한편으론 이해가 됐지만, 이미 우리 학교가 모두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들 말없이 동의했다. 다른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건 사실이었지만, 왜 그 기준을 학교 외부에 두어야 하는 것인지, 상대적으로 민주적이라는 이야기로 가려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은 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인지 의아했다.

회의 내내 피곤한 얼굴로 말없이 앉아있는 선생님들은 다수가 계약직 선생님들이었고 나 또한 그 침묵의 일부였다. 그 침묵을 깨고 싶었지만,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내뱉는 건 엄청난 결단이 필요한 일처럼 느껴져 다른 계약직 선생님들과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최선 같아 보였다.

민주주의에서 공동체 구성원의 자유로운 발언이 핵심이라면 우리 학교는 민주적인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누구도 당신은 교장이니까 말해도 되고, 당신은 비정규직이니까 말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회의시간엔 누구나 안건을 제안할 수 있었고, 손을 들어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계약직 선생님들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회의장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선생님이라고 불렸지만, 사실 그 선생님들이 모두 다른 직위와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차이가 서로의 발언권의 위계를 결정한다는 것도, 발언에 따른 책임을 다르게 부여한다는 것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발언의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서로를 속이고 있었다. 매년 재계약을 해야 하는 계약직 선생님들이 관리자와 부장 교사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이들에게 학교 주체로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니 말을 해보라고 요구하는 건 기만일 뿐이었다.

모두가 학교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도 누구도 이 학교 안에 존재하는 위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공론장에서 위계가 있다는 사실은 침묵으로 지워낼 수 있었지만, 그 위계 자체가 만들어내는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걸 감당하는 건 개별 계약직 선생님들의 몫이었다.

단순히 구조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 안의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그 구조를 고정불변한 것으로 승인하면서 그에 맞게 행동을 했고 심지어는 그 구조를 가리기 위해 애썼다. 영화나 역사책에서 보는 것과 같은 노골적이고 잔인한 억압과 차별이 아니라면 위계를 활용하는 일쯤은 차별이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알아서 학교 전체 분위기에 반하지 않는 행동만을 골라 했고, 내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면 입을 꾹 닫았다.

굳이 애써 내가 강사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은 늘 부담스러웠고, 정교사 선생님들에게 어떤 요구를 하는 것이 선을 넘는 일처럼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동료라고, 동료니까 이해해야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내가 비정규직이라는 것을,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이 학교에 필요한 존재이고 아이들 앞에 선 한 명의 선생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권리를 찾기 위한 첫 목소리 내기

교사로서 자존감과 내가 비정규직이란 인식이 쌓여갈 즈음, 내가 동료로서 정교사들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활용되어왔음을 확인하게 되는 일이 터졌다. 지금까지 내가 정교사 대신 진행해온 수업 시수를 자신들의 수업 시수로 포함해 교사 평가를 받아왔다는 사실과 그간 출제했던 시험문제의 출제자란에 단 한 번도 내 이름이 올라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영전강으로 근무한 지 3년 만에 알게 되었다.

누구도 이에 대해 내게 말해준 적이 없었고, 서류상으로는 내가 3년 동안 근무한 내용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관례이고 동료 간에 이해할 수 있는 범위라고 생각해 정교사 수업을 대신 해왔던 것이 애초부터 잘못되었음을, 그걸 원래의 방식대로 바꿔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내게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고, 나는 교육청에 시정을 위한 감사를 요청하는 동시에 학교에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학교 메신저를 통해 공론화를 하면서 내가 요구했던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재발 방지를 위한 서면사과와 학교 측의 방안을 함께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출제자란에 내 이름을 누락하고 교사평가와 관련해 미리 이야기하지 않은 문제에서 교사들의 의도성 여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타인을 이용할 만큼 악한 사람이 선생을 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의도와 상관없이 부작위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으면 그것을 수정하겠다는 의지와 대책만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업무편람에 나와 있는 대로 정교사 수업 시수를 맡기지 말고 소규모 수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내 수업권과 평가권이 보장될 수 있게 해달라는 내 요구에 영어과 교사들은 황당해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내가 이 사안을 학교에 공개했다는 것 자체를 자신들에 대한 인격적 모독과 공격으로 받아들여 감정적으로 대응했고, 도리어 내가 갑질을 하고 있다고 분해했다. 메신저로 양측의 주장에 대한 사실 확인이 이뤄지는 도중에도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은 이 문제를 책임져달라는 내 요구를 묵살한 채 단 한 번도 입장을 표명하거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낸 것에 대한 대가

절차에 따라 민주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내 요구는 결과적으로 해고 통보로 마무리되었다. 감사가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 결과도 나오기도 전에 영어 부장은 내게 전화로 계약 가능 기간이 1년 남았지만, 내년엔 계약이 없다는 사실을 알렸다. 영전강 사업이 축소되어 내가 일을 그만두면 이후에 신규 강사 채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도 학교 측에선 내 요구를 들어주기보다는 '주제넘게' 요구를 한 강사를 잘라내는 선택을 했다. 2월 말 해고를 앞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사안을 학교 안팎으로 알려내고 노조의 도움을 받아 법적 투쟁을 진행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해고 통보를 받은 후 학교에 부착한 대자보
 해고 통보를 받은 후 학교에 부착한 대자보
ⓒ 윤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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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를 붙이고, 언론사에 이 사건을 알리고, 학생들과 시민단체의 지지 서명을 받고, 학교 앞에서 1인 시위를 해도 영어과 선생님들과 교장 선생님은 결정을 돌리지 않았다. 내가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사 주체인 교육청에서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학교 측에 책임을 넘겼고, 서류에 도장을 찍은 교장은 영어과 선생님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아이들과 동료 선생님들의 지지가 있었지만 2월 말 결국 나는 학교를 떠나야 했다.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구제신청을 넣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교육 지원청으로부터 해당 교사와 관리자들에게 주의, 경고를 하는 것으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4년 동안 이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학교에 목소리를 높여 내 권리를 요구한 것에 대한 대가는 해고였고, 내 노동을 부당하게 활용해온 교사들에 대한 처벌은 주의라는 가벼운 행정처분뿐이었다.

선례를 남겨두고 싶지 않아 시작한 싸움은 결국 감사를 진행하는 장학사조차 다른 학교에서도 이런 식으로 부당운영하는 사례가 많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함에도 누구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유를 증명하는 사례가 되어버렸다. 민주적이기로 유명한 혁신 학교에서조차도 학내 비정규직 문제와 고용 형태에 따른 위계가 얼마나 만연한지에 대해 전시하는 사례로 남아버렸다.

여러 선생님들이 이렇게 될 줄 몰랐냐고 묻는다. 마치 비정규직 강사가 '주제넘게' 자기 목소리를 낼 때에는 해고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내게 그냥 임용고시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비정규직의 처우 문제를 해결하는 건 개인의 노력으로 힘 있는 정규직이 되는 것밖에 없다는 것처럼. 한 선생님은 내가 비정규직 대표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나서냐고 날 나무랐다. 내가 겪은 개인의 문제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비정규직 분쟁과 분리된 사적인 일인 것처럼. 영어과 선생님은 내게 배후가 있고 그 배후에 의해 내가 이용되는 거라 말하기도 했다. 배후가 없으면 나는 주체적으로 결정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할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처럼.

내가 남들처럼 감내하거나 혹은 이 직장을 떠나는 식으로 문제를 마무리 짓지 않고 끝까지 복직을 요구했던 이유는 이 학교에서 4년간 선생님들과 아이들 안에서 배운 가치를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실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되어있지만 그럼에도 날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해줬던 선생님들의 배려에 보답하는 것이 나와 그들의 같음을 강조하는 일이 아니라 다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름을 드러낸 후에 다름 속에서도 교육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의정부여중의 철학처럼 이 학교에서 배움을 통해 세운 내 자존감을 실천으로 완성하고 싶었다. 그게 날 한 명의 선생으로 따라줬던 아이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의여중 안에서 배운 신념과 예의를 실천하기 위한 대가는 결국 해고였지만 말이다.

비정규직이 있는 한 학교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위계가 없는 공동체를 향한 지향이지, 존재하는 위계를 지워내는 위선이 아니다. 이는 차이와 다름을 지워 전체주의적인 집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름이 위아래로 구분된 위계로 이어지지 않도록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권력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위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만 해도 서로가 부도덕한 존재가 된 것 마냥 시선을 피하고 말을 삼간다.

보이지 않는 위계와 싸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위계와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교 내에 교사와 학생 혹은 관리자와 교사라는 권력 관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학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정규직 교사 간에도 위계가 존재하며, 비정규직 간에도 아주 촘촘하게 위계가 존재한다. 이 위계는 여타 요인과 상호작용하며 순서가 변화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관리자를 정점으로 학교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하청업체를 통해 고용되어있는 숙직실 선생님까지 피라미드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피라미드에 따라 서로에게 다른 권리와 권한을 부여하며 자신의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한다. 이런 위계가 존재하는 한, 위계에 따라 권력이 차별적으로 분배되는 집단 내에서 학교 민주주의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위계의 존재를 일상에서 찾아내 드러내려는 노력 없이는 민주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결코,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사회적 구조는 일상에 녹아있는 위계를 무너뜨리고 발 디디고 서 있는 곳에서 민주적인 공동체를 형성해내는 일을 통해 녹이 슬기 시작한다. 민주주의가 고정된 제도나 성취해야 하는 목표점이 아니라 계속되는 지향이라는 것을, 당장은 지리멸렬하더라도 그 지향을 놓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민주시민을 키워내는 곳이 학교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해고 그 후

의여중 후문에서 3월에 진행한 기자회견
 의여중 후문에서 3월에 진행한 기자회견
ⓒ 윤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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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계약직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약속된 4년의 시간은 채우고 아이들과 함께 졸업하고 싶었다. 삶의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아이들과 함께 고생했다고, 너희들이 크는 도중에 나도 함께 컸다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다. 또 아이들에게 이 일을 알린 만큼,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한 게 아니라고, 선생님이 옳았다고 복직을 통해 증명하고 싶기도 했다.

근데 그것이 큰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본 건 자기 요구를 한 비정규직 선생님이 여러 시도 끝에 해고를 당한 풍경이었으니, 학교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다 거짓말이라고, 비정규직은 직장에서 어떤 요구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일어난 이 작은 소동에 대해 어떤 배움을 얻고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내가 알아낼 수도 없고 문제 당사자로서 함부로 접근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이미 학교 밖으로 내몰린 사람이기에 내가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역할은 질문을 던지는 일까지이다. 깊든 얕든 자기 나름의 해석을 하고 질문을 연결해내는 일은 아이들의 몫으로 넘겨야 할 듯싶다. 다만 수업시간에 심심찮게 토론 주제로 등장하는 '비정규직'의 문제가 학교 내에서도 존재한다는 것, 정치와 사회문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거라는 것만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요청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기각되어 학교로 돌아갈 길이 막힌다고 하더라도, 이기지는 못했지만 졌다고 믿지는 않을 생각이다. 만나 뵌 적은 없지만, 광주와 제주에서도 여러 영전강 선생님들이 싸우고 있고, 인천에서도 영전강 선생님들과 스포츠 강사 선생님들이 싸우고 있다.

많은 분들이 곳곳에서 싸우고 있고, 또 학교가 비정규직들의 백화점인 이상 이 싸움은 계속 누군가에 의해서 이어질 것이다. 내가 의정부여중에서 배웠듯이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학교에서 일한다면 자신이 학교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자존감, 그리고 위계와 상관없이 각자의 역할과 다름을 존중할 줄 아는 배려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싸움이 더 많아지기를 기원한다.


태그:#학교 비정규직, #의정부여중, #영어회화전문강사, #교육, #부당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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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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