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의병장 김석견을 기리는 두산서당, 경주시 양북면 송전리 149-2 소재.
 의병장 김석견을 기리는 두산서당, 경주시 양북면 송전리 149-2 소재.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경주시 양북면 송전리 149-2에 있는 두산서당은 임진왜란 경주 지역 의병장 김석견(金石堅, 1546∼1614)을 기려 세워진 제향 공간이다. 두산서당은 강당 경의당(景義堂)과 사당 상절사(尙節祠) 등을 거느리고 있다. 본래 1798년(정조 22) 사당 두산사(斗山祠)가 세워져 김석견을 모셔 왔으나 1872년(고종 9) 서월 철폐령 때 훼철되었고, 1919년 중건하면서 '斗山書堂(두산서당)'이라 편액했다.

1592년 4월 21일 경주가 함락되자 김석견은 5월 1일 세 아들과 가동(집의 종) 등 열 명을 거느리고 문천에서 창의했다. 그가 개인 재산으로 군자금을 마련하고 말 다섯 필을 내놓자 의병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김석견 등 경주 일원 선비들이 문천에서 회동을 하며 전쟁 발발 기운이 높은 시국을 걱정하고 토론할 때 바닷가에 거주하는 선비들은 공암 일대에 모여 의기를 다지며 나라를 지킬 각오를 다졌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를 이루는 공암 일원(사진)에서는 의병들과 일본군 사이에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김석견 등 경주 일원 선비들이 문천에서 회동을 하며 전쟁 발발 기운이 높은 시국을 걱정하고 토론할 때 바닷가에 거주하는 선비들은 공암 일대에 모여 의기를 다지며 나라를 지킬 각오를 다졌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를 이루는 공암 일원(사진)에서는 의병들과 일본군 사이에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양동마을 수졸당 주인 이의잠의 『동호일고』 등 경주 지역 의병장들의 문집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난 해(1592년) '봄에 김석견, 손시, 권사악, 최봉천, 백이소, 이의잠, 이준, 이눌(김석견의 사위), 김윤복, 황희안 등은 남천 문옹정(김석견의 정자)에서 시국을 의논했다.' 그 무렵 동해안에 거주하는 김득복, 박춘영, 박인국, 황희안, 김응택, 김몽택 등은 바닷가 공암(孔岩)에 모여 단합을 도모했다. 지식인들은 이미 전쟁 발발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5월 16일 명활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첫 전투를 치른 김석견은 7월의 영천성 수복전, 9월의 경주성 수복전에 참전했고, 그 외 유포 전투, 휴항퇴 전투 등을 치르며 1592년을 보냈다. 그 후 김석견은 조선 정부를 배제한 채 명과 일본 두 나라가 강화 회담을 진행한 1594∼1596년이 지나갈 무렵인 1596년 9월 팔공산 회맹에 사위 이눌(李訥)과 아들을 참가시켰다. 일본이 재차 전쟁(정유재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의병장들이 회동을 한 것이 팔공산 회맹이다.

김석견의 차남 김몽량은 경주 내남면을 흐르는 곽천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지점을 알아낼 수는 없으나 곽천은 둘러볼 수 있다. 사진은 신라 임금들의 무덤 중 (경순왕을 제외하고) 시내에서 유일하게 멀리 위치하고 있는 경덕왕릉 앞에서 바라본 곽천 일원과 남산의 풍경이다.
 김석견의 차남 김몽량은 경주 내남면을 흐르는 곽천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지점을 알아낼 수는 없으나 곽천은 둘러볼 수 있다. 사진은 신라 임금들의 무덤 중 (경순왕을 제외하고) 시내에서 유일하게 멀리 위치하고 있는 경덕왕릉 앞에서 바라본 곽천 일원과 남산의 풍경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그해 11월 김석견은 왜적과 전투 중 차남을 잃는 아픔을 겪는다. 3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 의병의 군량미를 옮기던 중 곽천(내남면 일원 형산강 상류)에서 일본군 수백 명의 기습을 받았다. 아버지 김석견을 지키기 위해 용맹 분투하던 차남 김몽량이 26세의 나이로 전사하는 비극이 이 전투에서 빚어졌다.   


두 달 전인 1596년 9월 29일 창암(영천 동쪽 끝) 전투에서 김석견은 동지 최봉천과 백소이 의병장을 잃었다. 함께 창의를 했던 두 의병장과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헤어진 김석견은 본인도 이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두 동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에 찬 김석견은 구미산 서쪽 끝 능선 작산 비탈에 창암 전투 참전 일본군의 잔여 병력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김석견은 기병 10명을 보내어 적을 유인, 매복지로 끌어들인 후 수십 명을 죽였다.

두산서당의 사당 상절사
 두산서당의 사당 상절사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전쟁이 끝나고 김석견은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고 훈련원정(정3품) 벼슬이 내렸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과거 급제 후 의병 활동을 했던 장남 김몽수와 막내아들 김몽남도 3등공신으로 인정받았고, 장남은 고부현감에 임명되었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사위 이눌도 1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이눌은 1597년 팔공산 전투 때 입은 총상이 악화되어 1599년 병사했다.) 김석견은 전쟁 중 세상을 떠난 둘째아들을 그리워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1614년 향년 69세로 삶을 마감했다. 김석견이 세상을 떠나자 경주 선비들은 지역 유일의 유림장(儒林葬)을 치러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였다.   

짙은 숲에 가린 두산서당은 차도에서 150m 거리인데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김석견과 그의 세 아들, 그리고 사위 이눌의 임진왜란 당시 붉은 마음을 거의 잊은 후세인들을 책망이라도 하는 듯한 정경이다. 사당 앞에 서니 문득 의병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벼슬도 다 사양했는데…. 다만 살아생전 적과 싸울 때 우리 다섯이 전장에 함께 섰던 것처럼 지금도 상절사 안에 나란히 있었으면 좋겠어."

팔공산은 대구 지역은 물론 경상도 일원의 의병들이 모여 전체 전략을 논의한 곳이었다. 전쟁 중 세 차례 의병장 모임이 있었는데 이를 "팔공산 회맹"이라 한다. 대구 의병들은 팔공산 부인사(사진)에 의병소(의병 본부)를 설치하여 산으로 피란온 대구 부민들을 보호하였다. 1592년 내내 일본군은 팔공산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눌은 경주 의병장이지만 팔공산 아래 전투에 참전했고, 그때 부상을 입어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팔공산은 대구 지역은 물론 경상도 일원의 의병들이 모여 전체 전략을 논의한 곳이었다. 전쟁 중 세 차례 의병장 모임이 있었는데 이를 "팔공산 회맹"이라 한다. 대구 의병들은 팔공산 부인사(사진)에 의병소(의병 본부)를 설치하여 산으로 피란온 대구 부민들을 보호하였다. 1592년 내내 일본군은 팔공산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눌은 경주 의병장이지만 팔공산 아래 전투에 참전했고, 그때 부상을 입어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태그:#김석견, #두산서당, #이눌, #임진왜란, #팔공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