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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항쟁.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의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사진.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사진전 때 찍은 사진이다.
 6월항쟁.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의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사진.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사진전 때 찍은 사진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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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이 한창일 때였다.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에 이어 6월 11일 넥타이 부대의 시위 참여를 계기로,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항쟁이 중산층으로까지 번져갔다. 6월 10일 켜진 '빨간 신호등'은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그대로 켜져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시위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읍면 단위의 파출소 순경들까지 도시로 불러내 시위 진압에 투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군대 투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도달하게 됐다.

권력 핵심부가 느낀 이런 긴박한 정황이 당시의 언론 보도에 잘 나타난다. 일례로, 1987년 6월 19일자 <매일경제신문>은 "정부는 이 날 일련의 대책 회의를 갖고 ······ 경우에 따라서는 비상수단도 강구하는 등, 이에 강력 대처하기로 방침을 세웠다"며 정권이 비상수단 즉 군대 투입까지 고려하고 있음을 알렸다.

또 6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이한기 국무총리서리(국회동의 안 거친 총리)가 특별담화를 발표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이 총리서리는 '끝내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법과 질서의 회복이 불가능해진다면, 정부로서는 불가피하게 비상한 각오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현행 헌법에는 비상계엄·경비계엄과 긴급처분·긴급명령이 있지만, 6월항쟁 당시의 헌법(1980년 헌법, 1988년 2월 24일까지 시행)에는 비상계엄·경비계엄과 비상조치가 있었다. 비상조치는 지금의 긴급처분·긴급명령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권한이었다.

당시의 헌법질서 하에서 이한기가 언급한 '비상한 각오'는 듣는 이에 따라 비상계엄 발동으로 들릴 수도 있고 비상조치 발동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알아서 해석하라는 식의 발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비상한 각오'라는 말로 국민을 겁주고 헷갈리게 해야 할 만큼 정권 위기가 가중됐던 것이다.

이런 흐름에 특히 당황한 쪽이 있었다. 바로 주한미국대사관과 백악관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강경대응 움직임에 당황한 제임스 릴리 주한미국대사의 우려는 국무성을 거쳐서 백악관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달됐고, 레이건의 우려는 국무성을 거쳐 릴리에게 다시 전달됐다. 릴리는 레이건의 뜻이 담긴 서신을 들고 전두환을 찾아갔다. 이 상황이 1987년 7월 5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이렇게 설명되었다.

"6월 19일, 이한기 신임 총리는 '비상한 조치'가 요구될 수도 있는 사회혼란으로 국가가 빠지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릴리는 레이건의 편지를 전두환에게 전달했다."

전두환의 손에 전달된 편지의 요점은 이랬다.

"그 편지는 시위 대처에서 자제력의 발휘, 정치범의 석방, 야당에 대한 탄압의 중지, 반대세력과의 대화 재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열거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제력의 발휘'였다. 이것의 의미에 관해 <워싱턴 포스트>는 바로 뒤 문장에서 부연 설명을 했다.

"미국은 비밀 메시지와 공개 메시지를 통해, 어떤 형태건 간에 계엄령 하에서의 군대 사용이 더욱 심각한 위기를 조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임스 릴리. 위키백과
 제임스 릴리. 위키백과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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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두환 정권은 장세동이 이끄는 강경파와 노태우가 이끄는 온건파로 갈려 있었다. 강경파 장세동은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1987년 4·13 호헌조치를 주도했다가 국민적 반발을 초래하고 5월 26일 전격 경질됐다.

하지만 6월 중순까지도 장세동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군부 안에 동조자들이 많았다. 6월 19일 청와대에 전달된 레이건의 뜻은 그런 장세동을 한층 더 약화시키는 동시에 노태우한테 한층 더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군대 동원을 제외한 나머지 수단만으로 민중의 저항을 진압하든지 마무리하든지 하라'는 가이드라인을 노태우 온건파에게 설정해주었다.

월간 <말> 1987년 8월호에 따르면, 장세동 일파는 레이건의 경고를 받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레이건의 경고는 그들이 군부에서 대거 축출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6월 21일, 대대적인 육군 인사개편에서 장성급 3분의 1 정도가 교체되면서 장세동 쪽 장군들이 군복을 벗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개입이 강경파를 억제하는 쪽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6월항쟁이 격화되기 이전만 해도 미국은 재야·종교·학생과 야당을 억제하는 쪽에 좀더 주안점을 뒀다. 6월항쟁 이전부터 슐츠 국무장관, 시거 국무부 차관보, 릴리 대사 등은 '한국 헌법의 개정을 가급적 저지하되 불가피할 경우에는 직선제가 아닌 내각제로 유도하는 한편, 재야·종교·학생·야당의 장외투쟁을 억제한다'는 방침 하에 한국 문제에 개입했다.

그러다가 1987년 상반기에 한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장세동 강경파를 억제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강경파를 억제해야만 한국 국민들의 분노가 수그러들고 그래야만 한국의 체제를 보존하며 미국의 영향력도 보존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그렇게 한 것이다.

고려왕조의 내정에 간섭한 1270년대 이후로 몽골 정부는, 인기 없는 고려왕이 백성들의 분노를 촉발시키고 이로 인해 몽골의 영향력이 약해질 가능성을 끊임없이 경계했다. 고려판 국정농단 주범인 충혜왕을 탄핵한 것도 그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6월항쟁 당시의 미국도 동일한 판단을 했다. 전두환 정권의 강경 태도가 한국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한국 정치체제가 일순간에 뒤집어지면 결과적으로 미국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자신들이 손을 쓸 수 없는 방향으로 사태가 확산되면 한반도에 대한 기존의 영향력이 일순간에 제거될지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미국이 이렇게 한국 국민을 무서워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80년의 경험이다. 그해 5월 21일 시민군이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를 장악하자, 전두환 신군부는 존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한국군을 광주 학살에 동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뒤늦은 요청이었지만, 위컴 사령관은 5월 23일 광주 학살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승인했다. 미국의 공식 승인으로 힘을 얻은 신군부는 시민군과의 전투를 재개해서 광주를 장악했다.  

이 같은 미국의 개입이 알려지면서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반미감정이 급속히 확산됐고, 이것은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1980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1982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사건(1985년) 등으로 표출되었다.

 미국문화원 점거.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사진.
 미국문화원 점거.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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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전개는 미국 정부가 한국인들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었다. 한국인들을 잘못 건드리면 미국 문화원에 불이 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가진 것이다. 이런 경험은 6월항쟁 당시의 미국이 한국 국민들을 극도로 두려워하도록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이것이 6월 19일의 개입으로 나타난 것이다.

제45대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는 레이건 대통령의 열혈 팬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의 꿈을 키운 때는 레이건의 재임 기간이었다. 레이건을 보면서 자기도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 경선 참여를 최초로 고려한 시점은 레이건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나가던 1987년이다. 또 트럼프는 금년 1월 20일의 취임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레이건의 연설 스타일을 모방하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자신이 그렇게 존경하는 레이건이 한국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하다. 6월항쟁 당시의 레이건은 한국 국민들의 혁명 가능성을 억제하되 한국 국민들을 분노케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의 군대 동원 가능성도 차단하고 장세동 일파도 군대에서 몰아냈다. 레이건 정권은 립서비스로라도 한국의 민주화를 후원하고 한국 국민들을 걱정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자 애썼다. 

그에 비해 트럼프는, 하는 일마다 한국 국민들을 실망케 하거나 분노하게 하고 있다. 2016년 4월의 위스콘신주 유세에서는 '북한이 한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벌이더라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거라고 철석 같이 믿고 있는 보수 성향의 한국인들을 실망시킬 만한 발언이었다.

또 트럼프는 한국의 주한미군 비용 분담을 높이고 싶어 한다. 또 쉽지는 않지만 할 수만 있다면, 미군한테 필요한 사드 배치 비용도 한국한테서 받아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래저래 한국인들의 마음을 미국한테서 떠나게 하고 있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이익을 얻으려면 한국 국민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트럼프는 레이건과 달리 한국 국민들을 화나게 하는 일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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