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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의 왕비>의 연산군(이동건 분).
 <7일의 왕비>의 연산군(이동건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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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이복동생 진성대군(연우진 분) 때문에 초조해하는 연산군(이동건 분)의 불안한 심리가 묘사되고 있다. 연산군의 가슴 깊숙이에는 이복동생에 대한 형제애가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복동생한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는 점 때문에, 가슴 속 또 다른 곳에서는 경계심과 질투심이 들끓고 있다. 

그래서 연산군은 툭 하면 진성대군한테 트집을 잡았다. 목에 칼을 겨누며 금세라도 죽일 것처럼 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진성대군이 자신을 능멸했다며 머나먼 변방으로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드라마 속 내용이다.

연산군(1476년생)은 성종 임금의 두 번째 왕비인 폐비 윤씨의 아들이고, 진성대군(훗날의 중종, 1488년생)은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다. 진성대군은 정식 왕비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폐위를 당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연산군이 진성대군을 경쟁자로 의식했을 수도 있다. <7일의 왕비>에서 벌어진 위와 같은 일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연산군이 임금으로 있는 동안에 진성대군은 10대 시절을 보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국조기사>에 따르면, 10대 시절의 진성대군은 부인 신씨와의 유별난 부부애로 유명했다. 만약 이복형한테 괴롭힘을 당하며 살았다면, 세상은 그와 부인의 관계보다 그와 연산군의 관계에 좀 더 주목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신씨와의 금슬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창덕궁 인정문. 연산군은 인정문 마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창덕궁 인정문. 연산군은 인정문 마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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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신하와 백성들을 못되게 굴었다. 그런 임금이 이복동생한테 위해를 가하지 않고 편히 살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이복동생을 견제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임금과 왕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런 뒤 세자에 책봉돼 후계자수업을 받다가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왕이 됐다. 조선왕조 임금들 중에 이런 조건을 갖춘 이는 별로 없었다. 임금의 정통성이 주로 혈통에 의해 좌우되던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연산군은 조건을 완비한 정통성 있는 군주로 출발했다. 

왕이 콤플렉스를 느꼈던 이유

왕비가 아닌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왕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평생 콤플렉스를 느낀 왕이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다. 심지어 왕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왕도 있다. 선조는 '왕의 서자의 아들'이었다. 왕을 아버지로 두지 않고 할아버지로 두었던 것이다. 이 점은 선조를 콤플렉스 많은 왕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 콤플렉스는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의 불행과도 연계되었다.

이런 이들과 달리, 연산군은 왕비의 몸에서 임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윤씨가 나중에 폐위를 당하기는 했지만, 연산군이 출생할 당시에는 왕비의 신분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왕비의 아들인 동시에 임금의 아들로 태어난 왕은 많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연산군은 장남의 지위로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다.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형들을 제친 태종 이방원이나 셋째아들로 태어나 형들을 제친 세종보다 훨씬 유리했다. 세자도 아닌 세손의 지위에서 왕이 된 정조보다도 훨씬 유리했다. 

또 연산군은 세자에 책봉된 뒤 후계자 수업을 거쳤다. 정종·중종·인조처럼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후계자 수업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왕들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그뿐 아니다. 연산군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정상적 절차를 거쳐 왕이 됐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버지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왕이 된 태종,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 수양대군, 할아버지가 죽은 뒤에 왕이 된 정조와는 차원이 달랐다.

비교적 완벽한 조건 속에서 즉위했던 연산군

이처럼 연산군은 비교적 완벽한 조건 속에서 임금이 됐다. 전후의 다른 왕들과 비교할 때, 흠결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다수당의 공천을 받고 투표자 과반수의 지지로 대통령에 오른 사람과 비슷했다.

거기다 연산군은 안정적인 정치질서까지 물려받았다. 이 점은 그의 아버지가 성종(成宗)이란 묘호를 받은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묘호는 죽어서 종묘에 모셔질 때 받는 칭호다.

고대 중국의 서적 중에 <일주서>가 있다. 이 안에, 시호의 의미를 풀이한 '시법해'란 부분이 있다. 시법해에서는 성(成)의 의미를 "안민입정왈성(安民立政曰成)"으로 풀이했다.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정치를 바로 세우는 것을 성(成)이라 부른다'는 의미다. 연산군의 아버지가 죽어서 성종이란 묘호를 받은 것은, 연산군이 왕이 될 당시의 정치 질서가 비교적 안정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성종은 훈구파라 불리는 보수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고 왕권을 위협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지방 출신의 사림파(유림파)를 중용하여 정치질서의 균형을 모색했다. 훈구파와 사림파를 상호 견제시키고 그 속에서 자신은 조정자·균형자가 되었다. 이런 정치실험이 성공한 결과로, 연산군은 훈구파와 사림파 어느 쪽도 권력을 독점할 수 없는 구도 속에서 임금이 됐다. 임금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넓은 상태에서 즉위했던 것이다. 

연산군 부부의 무덤인 연산군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연산군 부부의 무덤인 연산군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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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연산군은 군주의 정통성을 비교적 완벽하게 갖춘 상태에서, 거기다가 정권이 안정적인 상태에서 주상 자리에 올랐다. 남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탄탄대로 위에서 임금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은 유리한 조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오히려 희대의 폭군으로 기억되고 말았다. 업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해 나라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문란한 사생활로 사회의 도덕관념을 떨어뜨리고, 개인적인 여가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투입하고, 전국 기생들을 끌어모아 문화예술 사업을 과도하게 벌여놓았다. 거기다가 신하들한테도 함부로 대했다. '언동을 신중히 하라'는 취지의 신언패를 허리띠에 달게 하는가 하면, 관모 앞뒤에 '충성' 글자를 새겨 넣도록 하기까지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유리한 입장에서 왕이 됐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정통성이 약하고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면, 폭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려받은 왕권이 강력한 것만 믿고 함부로 행동하다 보니 국정농단의 극단을 보여주게 됐던 것이다. 안정적인 정통성과 강력한 왕권이 오히려 그를 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박근혜의 몰락, 연산군과 닮았다

지금 감옥에 수용돼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들보다 비교적 유리한 출발점에서 직무를 개시했다. 그는 다수당의 공천을 받은 뒤, 대선에서 과반수인 51.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과반수를 얻은 대통령은 그가 처음이었다.

거기다가 그는 대통령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대통령 생활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래서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그가 애국심도 많고 일도 어느 정도 하는 줄로 알았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요인이 대선 때 프리미엄으로 작용한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대통령 당선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박근혜의 권력 기반은 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안정적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아버지와 달리, 다수당의 대선 후보가 됐고 과반수 득표율 덕분에 그는 탄탄대로 위에서 대통령 직무를 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유리한 조건들은 그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 조건들은 그가 긴장감을 잃도록 만드는 역기능만 했을 뿐이다. 그는 방심과 나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벌어진 국정농단으로 그는 연산군보다도 더한 몰락을 경험하고 있다.

연산군이 무너졌다고 해서 백성들이 연산군의 아버지까지 욕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박근혜의 경우에는, 박근혜가 탄핵을 당하는 과정에서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혐오가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육영수 추모제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충북 옥천에서까지 높아지게 되었다.

본인뿐 아니라 부모의 정치적 유산과 명예까지 함께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박근혜의 몰락은 연산군의 몰락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다수당과 과반수 득표라는 유리한 조건이 반드시 훌륭한 대통령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박근혜 사례는 잘 보여주었다. 


태그:#7일의 왕비,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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