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악녀>의 메인 포스터.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비판이 여럿 나오고 있다.

영화 <악녀>의 메인 포스터.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비판이 여럿 나오고 있다. ⓒ NEW


01.
액션 장면이 조금만 더 명확하게 잡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1인칭 시점과 현장감을 살리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는 충분히 알겠지만 대부분의 액션 장면이 흔들리고 흐릿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카메라 역시 핸드헬드(Handheld) 촬영이 꼭 필요했던 부분만 그렇게 표현했다면 그 장면의 의도가 더욱 도드라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영화 <악녀>의 액션 장면들이 저급하다는 의미로 전달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영화는 그동안 한국 영화가 보여준 수많은 액션 장르의 작품들 가운데 놓더라도 모자람이 없고, 특히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들 가운데서는 가장 뛰어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다. 다만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비롯한 몇몇 지점의 롱테이크 장면들이 일부 관객들에게는 과도한 역동성으로 높은 피로도를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02.
이 작품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김옥빈이라는 배우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와 작품 러닝타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액션 장면들 때문에 영화 <악녀>는 단순한 액션물로 소개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의 핵심은 그 많은 액션 장면들에 인과성을 부여하는 드라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그 복수로 가혹할 정도로 아픈 기억을 가진 주인공 숙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다시 한번 자신을 내던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의 평범한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를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 그 운명조차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잃었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작품들 가운데 이 작품만큼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작품이 있었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이 영화가 숙희(김옥빈 역)를 들여다보는 시선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고 복수를 하고자 했으나 또 한 번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캐릭터.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여겨졌을 감정이 누군가에게는 퍼즐 놀이의 한 조각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감정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심지어 그 퍼즐 조각을 지켜내기 위해 숱한 고비들을 이겨냈음에도 자신의 처지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면 말이다.

 진정으로 그녀를 위했던 인물들은 누구였을까?

진정으로 그녀를 위했던 인물들은 누구였을까? ⓒ NEW


03.
결국에는 인간의 안정에 대한 욕구를 지독하게 표현한 영화이기도 하다. 지옥과도 같은 그 수라장을 지나온 숙희 역시 처음에는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며 책상 앞에 마주한 국정원 직원 권숙(김서형 역)을 향해 악을 내지른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그 무엇도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었던, 과거 조직의 보스이자 연인이었던 중상(신하균 역)의 죽음 역시 자신을 위한 희생이라 생각했을 그녀였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던 그녀의 삶에 새로운 의미가 생기고, 또 다른 이유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물론 그 의미와 이유가 나중에는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어 남고 말지만.

04.
간접적으로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개인의 변하지 않는 성향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숙희라는 인물이 소위 말하는 킬러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그 내면까지 완전히 바뀌지는 못했다는 것의 표현들이 가장 대표적이다. 타깃의 죽음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떨고 있는 소녀를 보며 자신이 유사한 상황에 괴로워했던 과거의 기억에 힘들어하고, 사랑했던 이와 동일한 인물의 등장에 처음으로 임무에 실패한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숙희에 대한 진짜 마음을 고백하는 현수(성준 역)에게 권숙은 그가 자신과는 다르기를 바랐다는 말을 건넨다. 그녀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 전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유추할 수 있는 지점. 그동안 두 사람에게 그녀가 매몰찬 모습을 보였던 까닭 또한 여기에서 설명이 된다. 자신을 사랑한 적이 있었냐고 묻는 숙희 앞에 예전과 똑같은 색의 넥타이를 매고 서 있던 중상의 모습 역시 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내면이 이토록 변하기 힘든 존재라면 우리는 왜 같은 사람으로부터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또 분노를 느끼기도 하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의 본성과 다른 행동을 끌어내는지 이 영화는 궁금해하는 듯 보인다.

 영화 <니키타>와 유사한 장면들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영화 <니키타>와 유사한 장면들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 NEW


05.
그동안 영화를 많이 봐왔던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가 뤽 베송 감독의 <니키타>(1990)와 유사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시네21> 1108호에 실린 정병길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그가 실제로 <니키타>라는 작품을 좋아했으며 자신의 작품 속 인물인 숙희가 태생적으로 비슷한 과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영화 <악녀> 속에 유사한 장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숙희가 예식장의 화장실에서 환풍기 밖으로 저격을 시도하는 장면이나, 차를 타고 건물 창문으로 뛰어들어가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과 같은 부분들이 그렇다. 감독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느 정도의 오마주는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굳이 기존의 작품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장면들을 삽입했어야 했는지에 대해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이 지점에 대해서는 작품 외적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06.

앞서 언급한 영화의 역동적인 부분과 더불어 전체적인 분위기가 거친 것과 관련해 관객들에게 편하고 친절한 종류의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시점과 관점이 계속해서 전환되고 있고, 숙희의 심리 또한 그 전환에 따라 변하고 있으므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 반대로 이는 영화 <악녀>가 그만큼 철저하게 계획된 작품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짝을 이루어 반복되는 숙희의 과거와 현재. 그녀가 맹신하고 있었던 지점의 이야기와 진실한 이야기의 간극. 과거에는 의도적이었지만 현재에는 그렇지 않은 감정들이 조금도 버려지지 않고 갈무리 되는 점은 이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녀의 액션 장면들은 박수가 아깝지 않다.

그녀의 액션 장면들은 박수가 아깝지 않다. ⓒ NEW


07.
가장 놀라운 것은 역시 김옥빈이라는 배우의 새로운 발견이다. 칸영화제를 이유로 <박쥐>(2009)와 이번 작품이 함께 많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 이후에 그녀가 보여준 모습들을 보면 한 작품의 롤 타이틀을 맡아 러닝타임 모두를 소화해 낼 수 있는 정도의 배우는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 <박쥐> 때만 해도 송강호라는 대배우가 곁에 있었지 않나. 이번엔 확실히 다르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히 거친 액션을 해내서가 아니라, 작품의 어느 순간에서도 호흡에 흐트러짐이 없다. 같은 배우들이 혀를 내두르는 그 신하균의 연기 앞에서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멜로/로맨스 장르에서의 역할을 분명히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이 작품과 유사한 장르에 있어서만큼은 그녀를 대체할만한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08.
영화의 처음에서도.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숙희는 자신의 할 일을 마치고는 마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무서운 미소를 짓는다. 과거에도 지금도 자신을 체포하러 온 경찰들 사이에서 어떤 반항도 하지 않는다. 마치 동력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어쩌면 그녀의 웃음에는 그 잔인한 학살의 순간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이 지난 지금 자신의 모습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 그녀가 의지하고 사랑했던 이들은 모두 그녀를 떠난 뒤였으니까. 애초에 그녀가 원했던 삶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기에 그녀에게 명명된 악녀라는 이름이 그녀의 눈빛을 더욱 공허하게 만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무비 악녀 김옥빈 넘버링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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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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