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원더 우먼> 메인 포스터

<원더 우먼> 메인 포스터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1.

마블 스튜디오와는 확실히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락성보다는 철학과 사유에 더 집중한다. 그것의 깊이에 대해 논하는 것은 다음 문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철저한 계획에 따라 지난 10년간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단계를 따라 진행되고 있는 마블 스튜디오의 세계관에 비하면 DCEU(DC Extended Universe, 이하 DC) 진영의 그것은 이제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때문에 이번 작품 <원더 우먼> 역시 과거와의 연결고리에 상당히 신경을 쓴 모습이다. 영화 전체가 액자식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시작과 끝이 브루스 웨인(벤 애플렉 역)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이 부분이 DC의 지난 작품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2016)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 이는 두 작품 모두를 제작한 잭 스나이더 감독이 이미 그 전부터 원더우먼(갤 가돗 역)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등장시킬 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 사진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야기는 이 사진으로부터 시작된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02.

사실 이 원더우먼 캐릭터는 지난 2006년 조스 웨던 감독에 의해 영화화가 추진된 적이 있었다. 당시에 이미 유명한 여배우들이 이 역할을 탐내고 있었다는 소문이 컸었는데, 일정 상의 문제로 무산되었던 것. 이후에도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과 데이빗 고이어 감독이 연출을 원했으나, 워너 브러더스와 DC는 <맨 오브 스틸>의 성적을 통해 원더우먼의 이야기를 <저스티스 리그>와 연계하여 제작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맨 오브 스틸>이 당시 6억 6천만 불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이면서 DC의 세계관 역시 관객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마블과 DC로 양분되는 히어로 무비의 세계관은 각 스튜디오에 무한한 확장성을 기대할 수 있는 일종의 시리즈물이다. 관객들이 세계관을 한 번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 이후에는 새로운 캐릭터를 추가하더라도 큰 무리 없이 마블 혹은 DC라는 깃발 아래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것. 실제로 마블 스튜디오는 매년 2편 이상의 작품을 끊임없이 시장에 내놓고 있다.

03.

기본적으로 이번 작품 <원더 우먼>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3개의 시즌으로 나누어 방영된 동명의 TV드라마의 설정과 거의 동일하다고 알려져 있다(실제 방영 분은 필자 역시 관람하지는 못했다). 원작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배경으로 제시되는 것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앞서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DC의 입장에서는 아직 자신들이 새롭게 구축할 세계관이 관객들에게 제대로 어필이 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쉽게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지가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방법.

어차피 젊은 세대들의 시장 신규 진입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도 새로운 도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점은 과거에 DC 코믹스를 접하며 자라온 기성 세대들을 얼마나 끌어 안을 수 있느냐가 아닐까? 물론 이런 원작의 내용을 따라 작품을 그리는 것이 월드와이드 성적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롯이 북미의 관객들을 얼마나 더 몰입할 수 있게 만드냐의 문제. 팬들의 향수를 건드려 추억을 회상하게 만드는 방식이 이 작품에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국내 관객들에게는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했을 부분이다.

04.

그 동안의 DC 작품들이 그랬듯이 이번 작품 <원더우먼>역시 인물의 내면과 가치관을 그려내는 데 더욱 무게를 두고 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 동안 나온 시리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오락성을 보여준다고 이야기 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어디까지나 DC에서 내놓은 라인업에 한해서이다. 고대 아마존 종족이 설립한 데미스키라 섬에서만 자란 다이애나 공주가 인간 세계를 처음 접하며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보여주지만 태생적으로 <시빌 워>에서 등장하는 스파이디의 깐족거림이나 <데드풀>의 B급 묘사들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DC의 주인공들이 갖고 있는 능력이 일종의 신화로부터 비롯되기에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면이 약하게 설정되는 것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여진다.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써 인간적 고뇌와 철학을 이해하는 과정을 그려가는 모습이야말로 그런 오락성을 버린 DC의 매력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시리즈가 칭송 받는 것은 이 두 가치의 균형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했던 작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문명을 처음 접하게 되는 원더우먼

인류의 문명을 처음 접하게 되는 원더우먼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05.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주인공인 원더우먼이 '선택의 주체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헤아려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전쟁의 신 아레스만이 절대 악이라 믿으며 힘을 길러 온 그녀는 인간 세계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선과 악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나아가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 역)의 죽음은 결국 선택의 몫은 타인이 아닌 주체 스스로의 것임을 깨닫게 만든다.

사실 이 부분은 그녀의 어머니이자 데미스키라 섬의 여왕이었던 히폴리타(코니 닐슨 역)의 모습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섬의 다른 전사들처럼 자신 역시 무술을 배우겠다는 어린 다이애나를 그녀가 어떤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막는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선택은 주체인 다이애나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이 가장 옳다는 맹신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물론 히폴리타 여왕의 입장에서는 부모의 입장일 수도 있었겠으나, 미약한 인간 앞에서 선악의 정의에 대해 생각하는 원더우먼의 모습은 결코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 결과적으로는 무언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역시 말이다.

06.

그녀가 인간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 혹은 간접적 경험에 의해서만 학습되어 있다는 것 역시 영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일부는 영화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환기의 용도로 이용되고 있지만 이는 한 나라의 공주였던 다이애나가 인류를 지키기 위한 원더우먼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을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적국의 공격으로 추락한 트레버 대위와의 만남은 그 과정의 시작이며, 독일군과의 전쟁에서 안티오페(로빈 라이트 역)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변화를 깨닫게 되는 지점이다. 결국 이 작품은 작품 내적으로는 원더우먼 자신이 스스로의 역할과 능력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외적으로는 개인의 가치와 신념이 무엇을 통해,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원더우먼

인간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원더우먼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07.

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적진에 직접 뛰어들거나, 트레버 대위와 처음 조우하는 장면에서의 액션 장면들은 상당히 즐길 만했으나, 역시 신들의 조우, 아레스와의 전투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기에는 그 스케일이 조금 벅찬 느낌이다. 이미 <맨 오브 스틸>에서 느껴 본 적이 있었던 위화감과 유사하다. DC 작품들의 고질적인 문제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전체를 주인공의 탄생과 개인사, 심리와 같은 것들에 할애하다 보니 빌런(악당)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영화 후반부로 그대로 이어져 마지막 대결 장면에 부담을 주고 만다.

물론 여기에서 역시 <다크나이트> 시리즈는 논외로 한다. 이 작품 <원더 우먼>에서도 전쟁의 신 아레스가 닥터 포이즌(엘레나 아나야 역)과 루덴도르프 장군(대니 휴스턴 역)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왜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지 등의 설명이 더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인류의 전쟁이 일어난 이유가 전쟁의 신 아레스가 나타난 상황과 동일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다.

08.

지금까지는 <원더 우먼>의 시작이 상당히 순조로운 것으로 보인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이 흥행과 별개로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던 부분을 만회했고, 남성 본위의 히어로물 시장에서 가장 성공적인 데뷔를 한 여성 캐릭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슈퍼히어로 영화의 역사 상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게 된 여성 감독 패티 젠킨슨 존재감 역시 이 작품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더한다.

다만 주인공인 원더우먼을 연기한 갤 가돗의 시오니스트 논란은 이 작품의 유일한 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배우와 작품을 개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지만, 꼭 이번 작품이 아니더라도 DC 유니버스에서 앞으로 원더우먼이라는 캐릭터가 짊어져야 할 역할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앞으로 원더우먼이 어떤 행보를 보이게 될지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 계정 https://brunch.co.kr/@joyjun7 에 중복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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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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