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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체헬소툰 궁전

체헬소툰 궁전
 체헬소툰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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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헬소툰(Chehelsotun) 궁전은 사파비시대 대관식 같은 의전과 의식이 행해지던 궁전이다. 정원이 궁전 건물을 둘러싸고 있고, 궁전 앞에 직사각형의 긴 연못이 있다. 사파비시대 전형적인 정원 양식을 보여준다. 체헬소툰 궁전의 정문은 동쪽에 있다. 정문 옆에는 박물관이 있어, 전시된 석조물을 볼 수 있다. 주춧돌, 벽, 기둥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조각이 상당히 정교하다.

판형 벽체에는 왕족으로 보이는 인물, 새, 꽃이 새겨져 있다. 주춧돌의 상단부에는 사자 네 마리가 입체적으로 등을 맞대고 있다. 사자의 모습이 용맹스럽다기 보다는 친근하다. 그리고 가로 16m, 세로 110m의 긴 연못 양쪽으로 네 명의 여인의 받치고 있는 네 마리 사자 두상이 세워져 있다. 건물을 지키는 호위천사와 사자로 여겨진다. 이 연못 앞으로 높이가 15m인 4층짜리 궁전이 서 있다.

체헬소툰 궁전의 현관 겸 주랑
 체헬소툰 궁전의 현관 겸 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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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연못을 돌아 동쪽 주랑 겸 현관으로 들어간다. 주랑은 6개의 기둥이 3줄로 이어져 있고, 가운데 거울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2개의 기둥이 더 있다. 그러므로 모두 20개의 기둥이 현관을 받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20개의 기둥이 앞 연못에 반사되어 모두 40개의 기둥이 보인다고 해서 체헬소툰 궁전이 되었다.

네 마리 사자부조
 네 마리 사자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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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주랑 한 가운데 대리석으로 된 직사각형의 수조가 또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건물 내부에도 수조와 분수를 만드는 페르시아 양식에 따른 것이다. 수조를 감싸고 있는 네 개의 기둥받침이 네 마리 사자로 이루어져 있다. 한쪽 면에서 보면 부조형식인데, 사방을 돌아보면 환조형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자의 입에서 물이 분출되어 수조가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물은 특별한 행사 때만 분출되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채워진 수조를 볼 수 없다.

거울의 방은 동쪽으로 트여있고, 서쪽에 이완 형식의 거울 장식이 있다. 이 이완의 가운데 문을 통해 메인홀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이 문이 열리지 않고 의식이 있을 때만 열린다. 그러므로 메인홀로 가기 위해서는 거울의 방을 양쪽에서 감싸고 있는 측면의 방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측면방은 현재 벽화와 타일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궁전 내부 벽화를 통해 사파비제국의 역사를 알게 되다

칼도란 전투도
 칼도란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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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홀은 가운데 연회실이 있고, 사방으로 네 개의 방이 있는 형태다. 이들 방에는 왕과 왕족 그리고 초대받은 손님들이 머물도록 되어 있다. 사방 벽 중 동쪽과 서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위쪽에는 사파비제국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 대형 벽화로 표현되어 있다. 황제가 참가한 전쟁과 외빈 접대 장면들이다. 아래쪽에는 왕족의 생활이 소형 그림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형 벽화는 동쪽과 서쪽 벽면에 세 개씩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모두 6개가 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서쪽 벽면 한 가운데 있는 칼도란(Chaldoran) 전투도다.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Ismail) 1세와 오스만 투르크의 셀림(Selim) 1세 사이에 벌어진 전투 모습이다. 주인공인 이스마일이 백마를 타고 방패와 칼을 든 채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오른쪽 위로 셀림이 지휘하는 투르크 군대가 총과 대포를 쏘아댄다.

백마를 탄 이스마일 1세
 백마를 탄 이스마일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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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제국의 말기인 1501년 이스마일은 타브리즈(Tabriz)에서 아제르바이잔 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영토를 동쪽으로 넓혀 1511년 호라산(Khorasan) 지방까지 지배하면서 사파비제국을 건설했다. 사파비제국과 시아파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경계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셀림 1세는 1514년 8월 칼도란에서 이스마일 1세와 맞붙는다. 이 전투는 병력과 화력에서 우세한 셀림의 승리로 끝난다.

전쟁에서 진 이스마일은 동부 아나톨리아와 북부 이라크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이 지역을 다시 차지한 것은 거의 100년이 지난 1602년 압바스 1세 때였다. 칼도란 전투는 패배한 전투지만, 사파비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것은 초창기 건국과 영토 확장이라는 명분과 시아파 패권을 차지하려는 종교적인 대의 때문이었다.

타마습의 후마윤 영접
 타마습의 후마윤 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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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 1세와 관련된 또 하나의 그림이 동쪽벽 오른쪽에 있는 타헤르아바드(Taherabad) 전투도다. 이 전투는 1511년 우즈베키스탄의 타헤르아바드에서 이스마일 1세와 우즈벡의 칸 쉬박(Shibak) 사이에 벌어진다. 이스마일은 쉬박을 죽이고 승리를 거둔다. 그래선지 그림에서 백마를 탄 이스마일이 도망치는 쉬박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다.

서쪽 벽에 있는 나머지 두 개의 벽화는 사파비제국 황제가 다른 나라 왕과 왕자를 대접하는 그림이다. 하나는 1550년 타마습(Thamasb) 1세가 인도로부터 피난 와 도움을 요청하는 무굴제국의 왕자 후마윤(Humayun)을 영접하는 모습이다. 둘의 만남은 찬잔(Zanjan)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오른쪽 붉은 옷을 입는 사람이 타마습이다.

압바스 1세의 발리 무함마드 영접
 압바스 1세의 발리 무함마드 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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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1621년 압바스 1세가 자신의 궁전에서 투르키스탄의 칸 발리 무하마드(Vali Muhammad)를 영접하는 모습이다. 그도 역시 투르키스탄에서 권력을 잃고 사파비 황제의 도움을 받으러 온 것이다. 붉은 옷을 입고 칼을 찬 오른쪽 사람이 압바스다. 왼쪽에 발리 무함마드가 앉아 있다. 이 그림에는 음주가무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카르날 전투도
 카르날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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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벽 가운데 있는 그림이 카르날(Karnal) 전투도다. 1739년 아프샤르(Afshar) 왕조의 나데르 샤(Nader Shah)가 인도의 무굴제국을 공격해 델리 근교 카르날에서 무함마드 샤에게 승리를 거두는 모습이다. 그림에서 나데르 샤는 왼쪽에 적토마를 타고 도끼를 든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에 비해 무함마드 샤는 오른쪽에 흰 코끼리를 탄 모습으로 나타난다.

동쪽벽에 있는 또 하나의 그림은 1658년 압바스 2세가 투르키스탄의 왕 나데르 무함마드를 접대하는 모습이다. 그는 앞에서 본 발리 무함마드와 같이 투르키스탄에서 권력을 잃고 압바스 2세의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다. 왼쪽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압바스 2세고, 오른쪽에 보라색 옷에 황금색 외투를 걸친 사람이 나데르 무함마드다.

벽화를 그린 화가들 이야기

체헬소툰 궁전의 벽화
 체헬소툰 궁전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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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렇게 세밀하게 벽화를 그린 화가는 누구일까? 이러한 세밀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화가가 레자 압바시(Reza Abbasi: 1565-1634)다. 그는 압바스 1세 때 궁정화가가 되어 알리 카프(Ali Qapu) 궁전, 체헬소툰 궁전 등 궁정의 벽화를 그렸다. 그의 세밀화는 세부적인 인물묘사, 구체적인 주제, 화려한 채색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세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가 그의 뛰어난 스케치 능력이다. 둘째가 다소 도식적이면서도 독특한 초상화 기법이다. 수많은 인물을 한 화면에 그려 넣으면서도 개성이 있는 인물을 창조했다. 셋째가 화려한 색채를 선택해 그려내는 능력이다. 서양의 인상파나 야수파보다 더 인상적이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했다.

레자 압바시
 레자 압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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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제자로는 무함마드 카심(Muhammad Qasim), 모인 모사파르(Moin Mosafar), 샤피 압바시(Shafi Abbasi) 등이 있다. 이러한 양식과 기법은 거의 100년 가까이 사파비 시대를 지배한다. 그리고 1600년대 중반 유럽의 회화양식이 소개되면서 그림이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변화된 양식은 체헬소툰 궁전의 외벽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체헬소툰 궁전을 나와 이맘 광장으로 가는 도중, 공원에서 사파비시대 위대한 예술가들의 조각상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레자 압바시가 있었다. 설명을 보니 1565년 카즈빈(Qazvin)에서 태어나 1634년 이스파한에서 죽었다.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초상화의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다. 38세 때부터 압바스 1세에 의해 궁정화가가 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곧 궁정을 떠난다. 그러나 1610년 다시 궁정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궁정화가로 활동했다.

미르 에미드
 미르 에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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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중에는 서예가(Calligrapher) 미르 에마드(Mir Emad: 1554-1615)와 알리레자 압바시(Alireza Abbasi: 1558-1628)가 있다. 이들은 화가인 레자 압바시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미르 에마드는 나스탈릭(Nastaliq) 글씨체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나스탈릭체는 14세기 티무르의 서예가 미르 알리 타브리지(Mir Ali Tabrizi)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나스탈릭체는 아랍식 나스크(Naskh) 글씨체와 페르시아식 탈릭(Taliq) 글씨체를 결합한 것이다. 나스탈릭체는 페르시아 시를 표기하는 방식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허페즈의 시가 표현된 방식이 나스탈릭체다. 그 후 나스탈릭체는 쉬라즈, 타브리즈,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압바스 1세 때인 1600년 전후 미르 에마드와 알리레자 압바시에 의해 최고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알리레자 압바시
 알리레자 압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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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 에마드는 시인이자 서예가였다. 그리고 알리레자 압바시는 화가이자 서예가였다. 이들 두 사람은 라이벌로 궁정에서 경쟁관계였다고 한다. 그런데 알리레자가 압바스 1세의 사랑을 더 받았던 것 같다. 이맘 마스지드와 셰이크 로트폴라 마스지드의 글씨를 알리레자가 썼기 때문이다. 알리레자가 밤에 글씨를 쓸 때 압바스 1세가 램프를 들고 그를 도울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데 미르 에마드는 1615년 수니파라는 이유로 고발되어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이 알리레자와 관계있다는 설이 있다. 압바스 1세에 의해 지어진 궁전과 마스지드에 누가 글씨를 쓸 것인가로 두 사람 사이에 경쟁이 붙었고, 알리레자가 미르 에마드를 고발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옛 기록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겠다.

이란 이슬람 세계의 서예(Calligraphy)

쿠파체
 쿠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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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서예가 문자의 독해뿐 아니라 지식의 습득을 위해 중요했다. 더 나아가 마음의 수양을 위해서 필요한 소양으로 여겼다.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라 해서 예술의 장르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더욱이 이슬람 세계에서는 종교적으로 대상을 형상화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예의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예술적인 서체가 개발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이슬람 글씨체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쿠파체(Kufic script)다. 꾸란을 표기하고 공적인 문서를 기록할 목적으로 7세기말 쿠파지방에서 개발되었다. 쿠파는 4대 칼리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립이 이슬람 세계의 새 수도로 정한 곳이다. 쿠파체는 직선과 각을 중시해 딱딱하고 경직된 느낌이 난다. 이 글씨체는 10세기까지 이슬람 글씨체의 전형이었다.

미르 에마드의 나스탈릭체
 미르 에마드의 나스탈릭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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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0세기에 새로운 글씨체인 나스크체(Naskh script)가 개발되었다. 이 글자체를 개발한 사람은 이븐 무클라(Ibn Muqla: 886-940)로 알려져 있다. 나스크에서 파생된 글씨체가 톨트(Tholth), 레카(Reqa), 무하칵(Muhaqqaq)체다. 13세기에 이르러 페르시아 지역에서 탈릭체(Taliq script)가 개발되었다. 이어 14세기 티무르제국의 서예가 미르 알리 타브리지가 나스크체와 탈릭체를 결합해 나스탈릭체를 만들었다. 
  
나스탈릭체는 페르시아어를 표기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아주 유려한 글씨체로 수직이 짧고 수평이 긴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스탈릭체는 페르시아 시문학을 표현하는 글씨체로 선호되었다. 이러한 나스탈릭체를 최고의 경지에 올려놓은 서예가가 앞에 언급한 미르 에마드와 알리레자 압바시다. 나스탈릭체는 현재도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위구르 지방에서 가장 선호되는 글씨체다. 그것은 사파비제국과 무굴제국이 공식적으로 나스탈릭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태그:#이스파한, #체헬소툰 궁전, #세밀화, #레자 압바시, #글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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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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