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통 영화사 니카츠 스튜디오는 1970년대에 들어 텔레비전으로 불황을 맞은 영화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예술성을 갖춘 에로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일명 '로망 포르노'다. 니카츠는 10여 년 동안 1100편이 넘는 로망 포르노 영화를 생산했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2016년, 니카츠 스튜디오는 당시 로망 포르노 작품들의 조감독으로 데뷔하여 지금은 일본의 메이저 감독이 된 소노 시온, 나카다 히데오 등과 함께 과거의 '로망'을 기억하고 부활시키는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중 한 작품인 <화이트 릴리>는 <링>과 <다크 워터> 등 공포영화로 J-Horror의 제왕으로 불린 나카다 히데오의 작품이다.

8월 17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히데오 감독이 영화 홍보차 지난 5월 31일에 내한했다. <화이트 릴리>는 여선생과 여제자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과거 로망 포르노의 기존 포맷 (70분가량의 러닝타임, 10분마다 한 번씩의 섹스 신)을 따르지만, 남녀 사이의 가학적인 섹스가 아닌, 여자 주인공들의 심미적이고 섬세한 섹스 신과 심리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참신한 소재와 더불어 히데오 감독의 호러 전작들에서 보지 못한 탐미주의적 미장센이 영화 곳곳을 장식한다. 히데오 감독을 만났다.

 나카다 히데오 감독

나카다 히데오 감독 ⓒ 오렌지 옐로우 하임 영화사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로망 포르노 리부트

- 1970년대 황금기 로망 포르노 중 좋아하는 작품과 감독이 있나?
"굉장히 많다. 특히 소네 추세이 감독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천사의 창자 시리즈' 중 <붉은 교실>을 꼽고 싶다. 미장센이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 이번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를 만들 때 가장 신경 썼거나 신경이 쓰였던 요소는 어떤 부분인가?
"저는 로망 포르노를 크게 세 개로 분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70년대 황금기의 로망 포르노, 그리고 내가 조감독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 참여했던 80년대 (하향기) 로망 포르노, 마지막으로 이번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다. 일단 이 세 부류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많이 고민했다.

이번 프로젝트에 투입되면서 놀랐던 것은 같이 참여했던 젊은 스태프들이 전통 로망 포르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이 과거 로망 포르노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이 이번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신선한 에너지가 됐다. 만들면서 그들의 새로운 접근을 기대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과거 황금기 로망 포르노의 감독들이 보아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화이트 릴리>를 일본에서 상영했을 때 전통 로망 포르노 영화에 출연했던 두 여배우가 시사회에 참여했었는데, 그들이 이 영화를 보고 과거 영화 제작을 추억하며 즐겁게 보았다는 칭찬을 해준 것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 <화이트 릴리>

영화 <화이트 릴리> ⓒ 홀리가든


- <화이트 릴리>는 리부트 프로젝트 작품 중 주인공 커플의 설정(여제자와 여선생의 관계)으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인 것 같다. 왜 사제지간으로 설정했나? 스승과 제자 사이이기 때문에 권력 관계가 능동적으로 드러난다고 느꼈다.
"혼자 각본을 쓴 것은 아니다. 여성 프로듀서 두 명과 두 명의 남성 각본가, 그리고 내가 함께 고안한 이야기다. 일단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이 두 여성이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관계여야 하는데 무언가 도제 시스템 안에 있는 관계를 생각하다 보니 도예 선생과 그 집에 같이 살며 선생을 보좌하는 제자가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권력 관계가 잘 드러날 수 있는 관계를 고려했다. 작년에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봤는데 그 영화에서처럼 일상생활, 즉, 집 안에서도 권력 관계가 뚜렷하고 때로는 전복되는 그런 관계를 떠올린 것이 바로 이 도예 선생과 제자다."

- 강한 여성들에 비해 남성 캐릭터들은 상대적으로 나약하거나, 변변치 못한 주변 인물로 등장한다. 남성이 열등해 보일 정도로 미미한 존재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감독의 의도였나?
"(웃음) 두 레즈비언 주인공들을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하고 싶었다. 특히 남자 제자의 역할은 이 커플을 방해하는 역이지만 삼각관계는 아니기에 커플을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

- 감독의 전작들, 예를 들어 <링>이나 <다크 워터> 같은 호러 영화에서 '사운드'의 쓰임은 가히 혁신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손톱 소리라든지, 마룻바닥이 갈라지는 소리 등이 영화 안에서 극대화되거나 독립적으로 공포의 소스로 기능하는 것은 기존 호러 영화 장르의 관습을 전복할 정도의 선구적인 예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번 <화이트 릴리>가 호러 영화는 아니지만, 감독의 '사운드'에 대한 애착이 여실히 드러난 듯하다(<링>의 사운드 디렉터가 참여했다). 가령, 초반 백합을 배경으로 한 정사 장면에서의 입술소리라든지, 그 외 신체가 부딪히는 소리는 로맨틱하다기보다는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적나라하거나 다소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사운드는 어떤 기능을 하나.
"일본어로 '생음'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직접 치거나 부딪혀서 만드는 소리를 말한다. 그러한 기법을 사용했다. <링>의 사운드 디렉터가 이번 <화이트 릴리>도 참여했는데 사실 그분은 과거 니카츠 로망 포르노 영화들에서 사운드를 담당했던 분이다. 사실 과거에 너무 많이 해서 섹스 신에 등장하는 소리 같은 것들은 더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을 제가 집요하게 조르고 요구했다(웃음).

러브 신 같은 경우 배우 숨소리를 따로 녹음해서 입힌 것이다. 사운드 디렉터가 미이케 다카시 영화도 했었는데, 거친 소리를 만들어 내고 강조하는 사람이라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그의 경향이 묻어 나온 것 같다. 관객들이 볼 때 흥미로운 포인트가 될 것 같다."

ⓒ 오렌지 옐로우 하임 영화사


- 이번 리부트 프로젝트의 아젠다가 "여성을 위한 로망 포르노"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화이트 릴리>도 캐스팅 대부분이 여성이다. 물론 감독의 전작들도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고 심리묘사가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다크 워터> 같은 작품. 이번 작품에서 여성의 심리를 해석하는 데 있어 염두에 둔 요소가 있나.
"생각한 것이 따로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를 찍을 때 항상 여배우를 더 섬세하게 그리고자 하는 게 있다. 남성 배우, 여성 배우가 나란히 있으면 90% 정도는 여배우에게 더 신경을 쓴다. 남자 배우는 그냥 연기만 틀리지 않으면 된다. 뭐 그 정도다(웃음)."

- 호러 영화가 히데오 감독의 필모에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1990년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 호러(J-Horror)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는데 지금은 다소 꺾인 것 같다. 호러를 제외한 정말 도전해 보고 싶은 장르가 있나?
"항상 생각한다. 사실 이번 7월에 크랭크 인이 들어가는 작품이 있는데 그 영화는 그냥 드라마 장르다. 전작들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기대할 만할 것이다(웃음)."

"노출 신 없는 에로티시즘, 좋았다는 소리 듣고파"

- 일본 영화 산업에서 작품 만들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들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내한했을 때 한 이야기인데, 감독이 행사할 수 있는 (창작자적) 권리가 점점 작아진다고 했다. 히데오 감독도 그렇게 느끼는지?
"고레에다 감독님이 한국에서 한 인터뷰를 일본 언론에서도 다루어서 잘 알고 있다. 그와 비슷한 나이이기도 하고 몇 번 만난 적도 있어서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을지 잘 이해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영화가 손익분기를 넘었을 때 감독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현저하게 작다. 아마도 전체 수익의 1% 정도? 그러므로 다음 작품을 구상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을 수 있다. 합당한 리워드가 없으니까.

또한, 일본 영화 시장 자체가 흥행작이 나오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요즘 제작되는 작품들을 보면 아주 큰 예산의 영화 아니면 아주 저 예산의 영화로 양분화되어 있다. 중간 예산 정도의 영화들이 많이 나와야 장르도 풍성해지고 하는데 말이다."

- 마지막으로 한국의 관객들이 <화이트 릴리>를 어떻게 보길, 어떤 점을 놓치지 않길 원하시는지 말해달라.
"아무래도 제 영화다 보니 모든 점이 다 소중하다(웃음). 그러나 특히 오프닝을 유심히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 시퀀스가 이 두 여주인공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선생이 외출하고 돌아와서 도자기를 만들던 제자에게 원피스 지퍼를 좀 내려 달라고 얘기하는 부분에서, 제자는 손이 더러워진 상태라 입으로 지퍼를 내려주는 설정이 있지 않나? 일본 상영 당시 여성 관객들이 특히 그 대목을 좋아했다고 들었다. 사실 노출 장면도 아니고 스킨십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동작이 만들어 내는 에로티시즘이 좋았다고 한다. 한국 여성 관객들도 좋아할 거로 생각한다."

 영화 <화이트 릴리>

ⓒ 홀리가든


히데오 감독은 '공포 영화의 거장'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조용한 목소리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그가 만든 영화의 장면 장면을 겸손하게 서술했고, 말하는 그의 태도로만 봐도 그가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지를 느끼게 했다. 다행인 것은 그의 <화이트 릴리>에서 이런 감독의 성품과 재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많은 관객이 히데오의 다른 눈부신 면면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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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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