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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시간, 저녁이 있는 삶
▲ 한 줌의 시간, 저녁이 있는 삶 한 줌의 시간, 저녁이 있는 삶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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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소설 『모모』에서 나오는 회색 신사들이 시간을 잡아가듯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다.

오래전 선거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 캐치프레이즈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일터에서 돌아오면 자녀들과 오붓하게 저녁을 먹고, 동네 산책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주어지는 삶을 말한다.

이 문장은 어느 한 정치인의 슬로건이 아니라 국가에 온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됐다. 그러나 근로시간 단축 법안이 언제 어떻게 국회를 통과할지, 설령 법이 생기더라도 또 어떤 식으로 회사에서는 초과근무를 시킬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저녁에 다 처리하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 아침 7시에 사무실에 나와 일하고 있다고 모 은행에서 업무 상담 중이던 창구 직원이 말해준 적이 있다. 내가 다녔던 회사도 규정상 업무 시작 시각은 9시인데 7시 50분까지 출근을 한다. 저녁 7시만 되면 초과근무 시스템이 실행되어 연장근무 신청을 해야 한다.

초과근무 신청 현황은 부서별로 관리되어 인사고과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다 보니 저녁에 PC를 일찍 끄는 대신 아침에 일찍 나와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PC를 끄고 할 수 있는 업무는 저녁에 마저 처리한다. 이런 꼼수로 초과근무는 얼마든지 더 시행될 수 있다.

OECD 국가 중 가장 긴 근로시간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짧은 휴가 사용일수를 자랑하는 우리의 근로 현실은 아이들의 보육과 교육을 사회가 아닌 부모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한 줌의 시간, 저녁이 있는 삶
▲ 한 줌의 시간, 저녁이 있는 삶 한 줌의 시간, 저녁이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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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회색 신사들의 시간 수집으로 어른들의 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바쁜 어른들로 인해 방치되는 아이들이 "탁아소"에 수용되어 창의적으로 놀지 못하고 교육을 받는 내용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더 오랜 시간 회사에서 일해야 하는 어른들을 위해 보육 시설은 더 오랜 시간 아이들을 맡아주어야 한다. 긴 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시설 담당자들은 아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학습으로 시간을 촘촘히 채운다.

게다가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아이들의 숫자도 한정되어있거니와 시설의 돌봄 시간은 부모의 근로시간을 충분히 커버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시설의 돌봄'밖에 있는 아이들 혹은 '시설의 돌봄' 이후에 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퇴근하는 시각까지 부모 이외의 가족, 개인 시터의 돌봄을 추가해야 하고 조금 나이가 들면 학원 뺑뺑이 그것도 안되면 결국 부부 중 한쪽, 대개 엄마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보육 시설이나 학교에서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을 돌봐주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미취학 아동의 경우 무상보육이 시작되자 오랜 시간 시설에 맡겨져야 하는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을 기피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맞벌이 부부의 자녀를 우선하는 쪽으로 문제 해결을 하고자 나섰으나 이미 앞당겨진 아이들의 시설 퇴소 시각과 무상보육의 혜택 - 즉 보육 시설에 아이들을 맡기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이 맞물려 무상보육은 워킹맘과 전업맘이라는 집단 갈등을 야기했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들의 상황도 고달프다. 방학 혹은 얼마 전 시행된 임시공휴일 등에 아이를 맡길 데가 없다는 맞벌이부부의 어려움에 대한 기사가 보도될 때마다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는 나쁜 조직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맞벌이 부부와 전업맘 아이들의 보육비 차이 때문에 시설 및 아이들 관리에 어려움이 있음은 물론이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각각 보건복지부와 교육부라는 서로 다른 소관부처를 가진 점 방과 후 수업 비용이나 방학기간의 차이를 유발하며 지속적으로 부모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아이들이 늦게까지 시설에 남아있지 않게 근무시간을 줄이거나, 시설에 보낼 수 없으면 며칠간 직장에서 휴가를 내면 해결되는 문제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근무시간을 줄이거나 휴가를 다녀올 생각은 안 하고 시설 탓만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쌍둥이 남매가 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거의 쓰레기통 수준으로 물건은 어질러져 있었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미술관 고깃집' 놀이를 하고 있었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설명을 듣고 음식을 주문하는 컨셉의 놀이였다.

표를 받는 주인, 도슨트, 요리사 등의 역할 놀이를 하면서 엄마 아빠가 손님이 되어 자기네들이 차린 상점에 와주기를 기다린다. 장난감이 모자라니 종이에 그려서 그런 걸로 치자며 소곤소곤한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모모』에서 아이들이 탁아소에 수용되기 전에 모모와 함께 놀았던 것처럼 상상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아이들이 일정 연령 이상으로 성장하면 상상의 세계는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강요하지 않아도 해야 할 많은 공부와 지켜야 할 많은 규칙 속에 놓이기 때문이다. 한두해 먼저 학교에 간 이웃의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만 그런 시스템 밖에 놓아둘 자신도 없고.

현실은 개선의 여지가 많지 않다. 아이들이 버텨내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임과 동시에 부모인 나 역시 버텨내야 한다. 이만큼 장황하게 글을 벌려 써놓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교과서적인 교훈 외에 사실 없다.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하느라 늦은 밤까지 길거리를 헤매지 않아도 되는 아이들과 야근과 저녁 회식으로 날마다 새벽달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아빠와 홀로 육아를 책임지느라 날마다 기진맥진하지 않은 엄마.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골고루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사회가 만들어지길 기대해본다.

너무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주위에 있는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진다. 심지어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방향이 맞는지조차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와 이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모모』에 나오는 회색 신사들이 훔쳐 간 '한 줌의 시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 개인 블로그, 포스트(http://post.naver.com/nyyii)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70점엄마, #워킹맘육아, #쌍둥이육아, #저녁이있는삶, #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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