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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이후 입대를 하고, 지난 2017년 2월 전역한 나는 말년 휴가 때부터 계약직을 구하러 나섰다. 지금 목표로 삼고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스스로 전공에 필요한 어학실력을 갖추기 위한 공부도 필요하지만, 금전적 준비 역시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대학 시절 생활비 용도로 받은 학자금 대출금도 갚아야 했다.

특히 서울이 지방을 식민지화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지방 출신인 내가 서울에 소재한 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하려면 무엇보다 주거비 부담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나는 전역 이후 1~2년간은 공부와 금전적 준비를 병행한다는 구상을 세웠다.

이에 나는 말년 휴가 때부터 계약직 위주로 여러 곳에 면접을 치렀다. 처음에는 개인 공부시간을 확보할 요량으로 출근 시간대가 오후인 학원 쪽을 알아봤지만, 강사 경험이 없는 날 써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도서관·박물관 같은 공공기관부터 시작해 법인 사업체까지 두루 면접을 보러 돌아다녔다. 하지만, 서류전형에서 탈락하거나, 면접에서 탈락하거나, 혹은 나와 맞지 않는 작업장이었다. 제대로 된 계약직 구하기도 참 어려운 시대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시간이었다.

금전 고갈 그리고 인턴의 고달픔

늘 '밥줄'이, '생존'이 걱정입니다.
 늘 '밥줄'이, '생존'이 걱정입니다.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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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나는 어느 시민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됐다. 비록 내 전공과 관련이 없고 월급은 적었지만, 의미 있는 일인 만큼 의욕이 났다. 금전적인 부분은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해 보충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주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바로 여행 가이드 일이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었다. 처음 세 번은 급여 없이 식대만 제공되며, 가이드와 동행해 일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일당이 셌을 뿐만 아니라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런 조건에 개의치 않았다. 어느 토요일날, 여행객들을 태운 버스가 출발하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나는 여행팀에 동승해 일을 배웠다. 하지만 이후 해당 여행사에선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경기가 좋지 않은 지금, 여행사에 돈을 지불해가며 국내 체험여행에 나서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탓이었다.

이와 같이 금전적인 부분이 해결되지 못하는 데다, 차츰 인턴 생활의 고달픔까지 겹치면서 결국 나는 시민단체 일마저 관두게 됐다. 사실 그곳의 급여 조건은 '주40시간 근무·최저시급·주휴수당·월차'와 같은 법정 기준은 다 준수했으니 꼭 나쁘다고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 급여 총액은 140만 원에 그쳤고, 거기서 4대보험료를 떼고 나면 128만 원에 불과했다.

이 금액으로는 대출금 일부를 상환하고 나면, 매달 넣고 있는 적금조차 12만 원가량 모자랄 판이었다. 노동을 하고도 정작 내가 쓰거나 저축할 여윳돈이 생기지 않는 기이한 현실. 하기야 일용직으로 일하는 우리 어머니 역시 하루 12시간 일을 하는데도 한 달 월급이 고작 190만 원에 불과하니, 차라리 나의 경우는 조금 나은 처지였는지도 모른다.

대기업 계약직이었던 형의 사연

그 무렵 나는, 아는 형을 만났다. 20대 후반인 형은 자신이 모 대기업 공연단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다 한때 정직원으로 채용됐으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정리해고 당한 사연을 들려줬다. 형은 자신이 정리해고 당한 까닭을 '최순실 사태'의 유탄을 맞은 결과라 했다. 이미 한국의 대기업들은 인력감축을 통한 수익 확대의 기조를 훨씬 전부터 유지해왔던 터인데, 때마침 최순실 사태가 터지자 회사 측에서 이를 '구실'삼아 정리해고 방침을 실현해버렸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부양하는 30, 40대 노동자들도 잘려나갔단다. 그나마 본인은 나이라도 적으니 나은 편이었다고 했다. 지금 청년들이 공무원이나 공기업 취직에 그토록 매달리는 것도 이런 까닭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자신도 앞으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것이라 했다.

이후 나는 다시 계약직 일을 시작했다. 바로 어느 유력 일간지의 디지타이징(전산입력의 일종) 작업이었다. 전공이 역사인 나로선 사료 공부를 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지만, 실상 하루 온종일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쉬는 시간도 없이 컴퓨터 앞에 들어붙어 앉아 글자 한 자 한 자와 사투를 벌여야 하는, '앉아서 하는 중노동'에 다름없었다.

며칠 쯤 지나자 눈은 금세 침침해지고, 두통과 함께 목, 허리, 어깨, 손가락에 이따금씩 통증이 찾아왔다. 다른 작업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환기가 잘 되지 않는 까닭에 호흡기 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콧물을 흘려가며 일하는 실정이고, 사무실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필기도구 하나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때이른 더위가 시작됐지만, 에어컨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 수십 대가 되는 컴퓨터 열기 앞에 오후가 되면 사람들은 지치게 마련이다. 또 작업량 채우기에 바빠 신문지면의 문맥을 이해하기는커녕, 애초 계약서에 제시돼 있지 않았던 야근과 토요일 근무까지 시작됐다. 심지어 5월 초 연휴 때도 계속 출근해야 했다. 회사의 대표는 대신 휴가를 주겠다고 언급했지만, 그 약속이 지켜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푼이 아쉬운, 나를 포함한 20명 가까이 되는 우리 작업자들은 다들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요구에 따랐다.

그런데 어제 퇴근하기 직전, 갑자기 회사 대표가 작업장에 찾아와 약 15분 간 '연설 아닌 연설'을 했다. 대략 그 내용은 이러했다.

"작업량 못 채워 손해 막심... 평균 미달은 자르겠다"

"일주일 지켜보겠다, 평균 미달은 자르겠다"라는 대표.
 "일주일 지켜보겠다, 평균 미달은 자르겠다"라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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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계획보다 서울에 있는 본사와의 계약에 따른 작업량이 채워지지 않아 회사의 손해가 막심하다. 원래 일정 정도의 손해는 예상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지금 계획보다 손해가 훨씬 크다. 이런 식의 손해가 지속된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그냥 이 사업 자체를 아예 없던 일로 정리하고 우리와의 계약을 해지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일주일 간 지켜보고 능률이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르겠다. 회사 입장에서는 인건비 부담이 엄청나다. 그러니 앞으로 인건비 부담이 큰 야근과 토요일 근무도 없앨 것이다."

그의 입장에선 작업자 한 명 한 명이 인건비로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와 함께 대표의 말 속에는 작업자들의 현실을 잘 모르고 하는 말들도 많았다. 특히 "자기가 해보니 1시간에 1면은 완성해내겠더라"는 말은 작업자들의 신경선을 건드린 발언이었다.

그리고 지난 24일, 작업자 한 명이 잘려 나갔다. 사실 이런 식으로 해고된 사람이 벌써 세 번째다. 이곳 일이 시작된 지 한 달 조금 넘은 시점에서 벌써 세 명이 잘려 나간 것이다. 사실 이날 잘린 작업자의 경우 평균치에 크게 못 미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고지식한 성격 탓에 너무 정확하게 입력하려다 보니 평균치에 좀 미달했을 뿐이었다. 결코 불성실하거나 딴청을 부려서 작업량이 적은 것이 아니었다.

출퇴근길, 작업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분노를 쏟았다. "정말 빈정 상했다"는 반응부터 시작해 "우리를 부품 취급한다" "대표는 우리 실정을 전혀 모른다" "그래도 있던 사람 적응할 시간을 좀 더 주고 쓰는 게 낫지, 새로운 사람 쓴다고 잘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우리가 그만둔다는 생각은 못하나? 나는 새로운 알바 구하기가 귀찮아서 여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가 취직을 못해서 그렇지 계약직, 아르바이트 자리는 널려있다. 어디 여기 아니면 일할 데 없나?" "친구들이 그런 곳에서 일하지 말라하더라. 나는 그만둘 것이다" 등등.

그런 속에서 어떤 1명은 "나도 잘리면 어쩌지, 작업량이 나지 않는데"라며 내게 걱정을 털어놨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도 탈출구를 찾아야겠지요."

기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신뢰하다, 그러니까 인간을 신뢰하다 침몰하던 세월호를 끝내 탈출하지 못한 채 희생된 아이들을 떠올리면, 지금 같은 세상에선 우선 1차적으로 탈출 궁리부터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를 무력화시키고 계약과 돈으로 관계를 설정하는 지금의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밥줄' 불안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온종일 활자와 씨름해야 하는 나는 계약직입니다.
 온종일 활자와 씨름해야 하는 나는 계약직입니다.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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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금 나와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20대 후반에서 심지어 30대 중반인 사람들도 있다. 이 자체 지금의 취업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이지만, 비록 계약직에 불과하나 앞서 언급한대로 열악한 사무실 환경에서도 사람들은, 그래도 나름 정확하게, 정직하게 해당 신문 지면의 좌표를 설정하고 글자를 입력하는 노력을 해오던 터였다. 게다가 회사는 4대보험을 들어준다는 애초 계약서 내용과 달리 지금까지 고용보험만 가입해주었을 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치졸한 짓이 '밥줄의 불확실성'으로 공포를 자극하며 장난치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을 돈과 이익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게 자본주의라면, 우리는 이런 체제를 타파해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회사 입장에서는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따를 수 있다. 하지만 철저히 그러한 관점에서만 서 있던 대표의 발언 당시 우리들이 느꼈던 '감각'과 '감수성'이 나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내재된 '인간으로서의 자각'이며, 그것이 언젠가는 이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종식시킬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 20대는 '도시의 강제 유목민 세대'인지도 모른다. 원하든 원치않든 우리는 이미 유목민이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붕괴는, 바로 이 도시의 강제 유목민 세대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이제부터 사람들은 이 작업장을 한 명씩 떠나갈 것이다. 당장 나부터 어제 다른 일터에 면접을 봤다. 물론 면접 담당자의 고압적인 태도에 결국 내심 화를 참지 못한 채, 당장 내일부터 출근해달라는 말을 거절해 채용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면 언젠가 이 사업은 존망의 기로에 몰릴 것이다.

인간을 신뢰하고, 용기를 북돋고 격려하며, 기술을 익히고, 연습하고, 적응할 시간을 충분히 주고, 노동의 대가를 충분히 지급하며, 사람을 돈이 아닌 사람으로 보는 방식이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의 '상전'들은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


태그:#계약직, #도시 유목민, #자본주의, #정리해고,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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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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