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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금오산
 구미 금오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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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桑田碧海)의 고장

"짐승은 모르나니 고향이나마
사람은 못 잊는 것 고향입니다."

소월의 시 <고향>의 일 절이다. 하지만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고향 쪽으로 두고(首丘初心), 연어도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고향이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게는 심령의 본향(本鄕)으로, 그래서 그리워하나 보다.

내 어찌 고향을 잊을 수 있으랴! 내 고향 구미, 그곳을 차마 꿈엔들 잊을 수 있겠는가. 고향을 떠나온 지 벌써 50여 년. 그새 강산이 다섯 번 바뀌는 세월이 흘렀다. 나는 고향 구미에서 태어나 구미초등학교, 구미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교부터는 서울에서 다녔다.

고교 재학 때 학급에서 경상도 촌놈은 나 혼자뿐이라 학급친구들에게 많은 놀림과 호기심의 대상이 됐다. 나의 사투리가 그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입니다' '우야꼬' '와이카노'… 등 그들은 내 사투리를 흉내 내며 매우 재미있어 했다.

금오산 기슭에서 태어난 박정희 전 대통령
 금오산 기슭에서 태어난 박정희 전 대통령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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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 친구들이 고향을 물어 오면 나는 자랑스럽게 '경북 선산 구미' 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친구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내 고향을 몰라주는 그들이 매우 섭섭했다.

그래서 내 고향 구미는 "고려 말 충신 야은 길재(吉再) 선생이 충절을 지키고자 은둔하신, 금오산이 높고 낙동강 물이 매우 맑은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애써 설명해도 그들은 구미를 경상도 어느 두메산골로만 알아줄 뿐이었다.

하기는 그때 구미는 급행열차조차도 외면했던 인구 1만 정도의 자그마한 한촌(閑村)이었다. 그런 고향 구미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로는 '박정희 대통령 고향'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이후 구미 낙동강 유역 일대 평야에 공단이 들어서자 신흥 공업도시로, 전 국민의 귀에 익은, 한때는 '한국의 실리콘'으로 불리곤 했다.

그새 내 고향 구미는 인구 1만 안팎의 면소재지에서 현재는 40여만 명의 대인구로 내륙 최대 산업도시가 됐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도시 발달사에 초고속으로 발전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고장이 됐다.

금오산 도선굴에서 내려다 본 구미시가지
 금오산 도선굴에서 내려다 본 구미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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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의 제의

올 봄, 구미에 산다는 한 청년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지난해 연말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고상만 시민기자의 "박정희만 알고 허형식을 모르는 그대에게"라는 리뷰기사를 읽고, 그 무렵에 발간된 <허형식 장군>을 읽었다고 하면서 원주 내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구미에서 원주는 먼 길이기에 정중히 사양을 했으나, 그 얼마 후 그 청년은 자기 차를 몰고 굳이 원주 내 집까지 찾아왔다. 구미 들판에서 생산된 고향 쌀 한 부대 메고서.

[관련 기사] 박정희만 알고 허형식을 모르는 그대에게

구미 삼일문고 김기중 대표
 구미 삼일문고 김기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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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도 구미초등학교 출신으로 까마득한 후배가 된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어려서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귀에 익도록 듣고 자랐지만 허형식 장군 존함은 몰랐다고, 내가 쓴 <허형식 장군>을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다.

그는 2017년 5월 중에 구미 시내 번화가에다 '삼일문고'라는 서점을 개업하는데, <허형식 장군>으로 개업기념 특별전시회를 만들고 싶다는 복안을 말했다.

그러면서 구미 출신 작가가 고향 출신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썼기에 여러 가지로 의미 있을 것 같다고 내게 동의를 구했다.

인문이 죽어버린, 서적도매상들이 부도를 내고 퍽퍽 쓰러지고, 동네 서점들마저 온라인서점에 밀려 줄줄이 문을 닫는 작금의 현실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특히 내 고향 구미는, 그 언제부터 역사와 문화, 학문이 매몰돼버렸다. 

그런 인문과 역사가 메마른 구미에서 서점을 개업한다고 하니, 나는 그 뜻이 가상하면서도 어찌 잘못된 사람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원거리를 마다 않고 찾아온 그의 열정에다 맨 바닥에 헤딩을 하려는 한 젊은이 도전정신에 크게 감복하여 그 제의를 흠쾌하게 받아들였다.

사실 세상의 역사는 무모해 보이는, 말도 안 되는 몇 안 되는 젊은이의 열정으로 바뀌었고, 그들의 도전으로 인류문화는 줄곧 발전해 왔다. 그는 <허형식 장군>과 함께 그동안 내가 펴낸 저서들로 개업기념 특별코너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구미 삼일문고 특별전시실에 마련된 『허형식 장군』 전
 구미 삼일문고 특별전시실에 마련된 『허형식 장군』 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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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

지난 17일, 그는 전화로 오는 20일 서점을 열 예정이라면서 이미 <허형식 장군>을 30부 주문해 구비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내 저서 가운데 절판된 것이 많다고, 서재에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보내주면 전시회 후 돌려주겠다고 청했다.

『허형식 장군』 표지
 『허형식 장군』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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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약속한 바라 전화를 받은 이튿날(18일) 소장 작품을 한 박스에 담아 택배로 보냈다.

그런 다음, 개업 기념식에 참석하느냐 마느냐로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불현듯 1942년 8월 3일 북만주 산골짜기에서 위만국(만주국) 토벌대의 총알을 벌집처럼 맞고 산화한 동북항일연군 허형식 장군이 떠올랐다.

그분의 작품이 고향사람들에게 처음 소개되는 그 자리에는 저자가 가는 게 당연한 도리라고 여겨졌다. 그분은 김일성을 비롯한 다른 항일연군 지도자들이 목숨을 구하고자 소련으로 넘어가도 결코 당신은 동북의 백성들과 자기 전구(戰區)를 지키고자 단 한번도 소련 국경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그의 신념은 금오산인 자존심이요, 또 다른 외세의 앞잡이가 되지 않겠다는 거룩한, 눈물겨운 확집 때문이었다. 그분은 일제를 당신 손으로 물리친 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 264번지 고향 집으로 돌아가 앞 금오산을 오르는 게 가장 큰 당신의 소원이었다.

하지만 허형식 장군은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부하를 살리고 대신 희생했다. 허 장군의 영령이 하늘에서 고향 작가의 손으로 구미 땅에 당신의 이야기가 소개된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뻐하실까?

나는 그런 생각이 미치자 곧장 20일 행사장 참석을 통보했다. 그러자 김 대표는 10분 정도의 스피치를 부탁했다. 나는 그마저도 승낙했다. 그때부터 만감이 교차했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후 100년이 지나야 제대로 된다고 한다. 그새 허형식 장군이 순국하신지 꼭 75년이 지났다. 허형식 장군은 1909년에 태어났다. 허 장군이 태어나기 바로 전해에 큰집 당숙 왕산 허위 13도 창의군 군사장이 1908년 서울진공작전에서 패한 나머지 경기도 영평군 서면 유동(현,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유동리)에서 일제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그 후 왕산은 그해 10월 21일 경성감옥(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러자 임은동 허씨 일족들은 일제 군경들의 감시와 학대에 견딜 수 없어 한일병합 후 1912년부터 만주로 망명했다. 1915년 2피(避, 제2차 만주로 망명)로 만주로 간 허형식은 1930년 5월 1일,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습격을 주도해 투옥된 이후 항일전선에 떠오르는 샛별이 됐다.

허형식 장군은 1939년 30세의 나이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군장에 오를 만큼 가열한 투쟁을 벌여 당시 만주 사람들은 아이들이 울면 이희산(허형식의 이명)이 온다고 하면 그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분은 일찍이 육사가 말한 '백마 탄 초인'이었다.

나는 1999년 중국대륙 항일유적답사길에 그런 사실을 그제야 알고 이듬해 나 혼자 북만주를 여러 날 헤맨 끝에 그분의 희생지를 찾아 들꽃을 바친 바 있었다. 귀국 후 허위, 허형식 생가를 찾자 쓰레기더미로 방치돼 있었기에 아픔을 금할 수 없었다.

마침 그 무렵 온 나라가 상암동 박정희 기념관 건립 문제로 논란이 분분할 때였다. 나는 당시 김관용 구미시장에게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앞서 쓰레기더미로 방치된 왕산, 허형식 생가 복원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자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박정희 기념관에 앞서 2009년 9월 28일 구미 임은동에 왕산기념관에 세워졌다.

[관련 기사] 왕산 선생님 영전에 무릎 꿇고 사죄드립니다

2000년 당시 쓰레기더미로 방치된 왕산 생가 터
 2000년 당시 쓰레기더미로 방치된 왕산 생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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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눈물

나는 강의나 강연을 요청받으면 사전에 강의 자료와 연설문을 늘 작성했는데 이번에는 도시 글이 쓰이지 않았다. 아마도 여러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향에 가는데, 고향사람들과 후배들에게 그때 떠오른 대로 말하면 되지 굳이 미리 준비된, 정제된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20일 아침 원주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구미로 가는데 문득 '역사란 무엇인가'란 말에서부터 '권불십년(權不十年)' '유방백세(流芳百世)' '사람의 평가는 사후 백년이 지나야 한다' 그런 말들과 근현대사 답사 길에 생전에 세운 비석과 동상들이 파괴된 모습들이 내 머리를 스쳐갔다.

원주에서 버스를 탄지 3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차창 밖으로 금오산이 문득 나타났다. 그 순간 내 입에서는 "창공에 우뚝 솟은 금오산 아래 야은 선생 끼치신 덕화 갸륵타…"라는 구미중학교 시절 운동장조회 때마다 불렀던 교가가 중얼거려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와 함께 할아버지의 생전 모습과 평생 힘들게 사셨던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눈앞에 어렸다. 곧 나의 뺨에는 주르르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누워있는 성인의 모습인 금오산
 누워있는 성인의 모습인 금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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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 회 더 이어질 예정입니다.



태그:#허형식, #박정희 , #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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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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