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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행하는 왕이 있었다. 왕은 환자들의 환부에 직접 손을 대어 만지고 그들에게 십자가 성호를 그었다. 또는 환부에 손을 대고 "왕이 너를 만지고, 신이 너를 치료하느라" 하고 말했다. 그것만으로 병을 고쳤다. 이른바 '왕의 손대기 치료'다.

아니, 기적을 행하는 왕이 아니라 '왕이 기적을 행한다고 믿는 백성들'이 있었다. 왕의 손대기 치료가 있는 날이면, 각지에서 궁정으로 몰려든 백성들이 길게 줄을 섰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을 품고 먼 길을 오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고, 왕에게 기적을 행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왕 숭배'는 지지와 열광을 이끌어내는 통치의 놀라운 수단이었음은 물론이다. 왕의 추종자와 지지자들이 인정한 신성함이야말로 왕의 손대기 치료 기적을 만들었다. '신성하며 하느님의 도유를 받으신 왕'이라거나 '초자연적 기원을 지니신 왕'이라는 등 각종 신화들은 왕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와 믿음을 바탕으로 날조되었다.

절대적 지지와 열광이라는 오래된 전염병

박사모, 탄기국 등  박근혜 지지자들이 모여 지난 4월 5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새누리당 중앙당창당대회를 열고 있다.
 박사모, 탄기국 등 박근혜 지지자들이 모여 지난 4월 5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새누리당 중앙당창당대회를 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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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1886~1944)의 <기적을 행하는 왕>의 내용이다. 블로크는 아날학파의 창시자이자, 심성사 또는 인류학적 역사학을 개척한 선구자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왕>에서 기적이 어떻게 널리 받아들여졌는지를 연구한다.

루이 9세, 에드워드 1세, 루이 14세 등 위대한 왕들을 포함해 과거의 왕들은 단순히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왕이 손을 대서 치료하는 기적은 프랑스에서는 1000년경, 영국에서는 1100년경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3세기 중반 이후 관습으로 정착되었고, 1500년에 들어서 왕의 손대기 치료가 만개했다.

왕은 국가의 우두머리이고 판사이며 전쟁의 사령관이다. 무엇보다도 왕은 백성들의 눈에 '신비로운 무언가'가 있어서 고위 공무원과는 다른 사람이어야 했다. 이리하여 왕을 둘러싼 '숭배'가 시작된다.

치료 기적은 '왕위의 적법한 계승자'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니까 왕의 기적을 믿는 역사는 기실 왕을 추종하고 지지하는 이들이 왕권에 경이롭고 신성한 성격을 부여하는 왕권 강화의 역사였던 것이다.

<기적을 행하는 왕>이 흥미로운 것은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쪽만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피지배층의 관점에서도 설명한다는 것이다. 심성사를 개척한 저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블로크는 책의 끄트머리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진정한 의문점은 왕이 치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람들은 왕이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는가 하는 데에 있다."(465~466쪽)

유권자를 동원 대상으로 전락 시키는 선거

중앙선관위 주최 제19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합동토론회가 지난 4월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스튜디오에서 열린 가운데,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정의당 심상정, 바른정당 유승민, 국민의당 안철수,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토론에 앞서 손을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토론 앞두고 손 잡은 대선후보들 중앙선관위 주최 제19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합동토론회가 지난 4월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스튜디오에서 열린 가운데,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정의당 심상정, 바른정당 유승민, 국민의당 안철수,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토론에 앞서 손을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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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통령 선거는 곧잘 국민 주권이 행사되는 듯한 착각을 만들어낸다. 거리에는 흥행을 위한 갖가지 쇼, 이를테면 시선을 끌려고 노력하는 음악, 춤, 영상, 요란한 구호 등이 넘쳐난다. 그 요란한 쇼의 흥분 속에서 실제 내용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선거 때야말로 감정적 고조 상태에 이르러 이성이 마비되곤 하는 일이 곧잘 벌어진다.

후보에 대한 신화화 작업 역시 빠지지 않는다. 마치 대한민국의 여러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여겨지며, 모든 것이 후보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된다. 지지자들을 최대한 모아 놓고 군중의 흥분 속에서 이루어지는 후보의 연설도 그러한 신화화 작업 가운데 하나다.

무엇보다 이미지를 다루는 최고 전문가들이 내놓는 각 후보들의 티브이 광고야말로 기적이 실현된 미래를 체험하는 엑스타시를 제공한다. 그저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갖가지 스펙타클의 제공으로, 후보가 내세우는 구호 아래 지지자들이 집결된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가능한 이유는 아직도 이를 받아들이는 지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쫓겨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신화를 열광적으로 믿는 지지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과연 선거 과정에서 신화화된 후보를 향한 열광적 지지와 믿음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선거 시기 집단의 심성'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그러니까 '기적을 행하시는 대통령에 대한 믿음'은 계속되고 있다.

애초 선거는 시민을 정책 결정의 주체가 아닌 단순한 소비자, 후보가 내세우는 구호를 따라 외치는 동원된 자로 전락시키는 한계가 있다고 오랜 시간 지적받아 왔다.

개인에 대한 열광적 지지와 믿음은 민주주의에 반해

선거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정책 토론이 도입되었지만, 때로 그런 토론조차 무력하다. 후보에 대한 열광과 믿음이 공약과 정책 방향에 대한 검증을 뛰어넘기도 한다. 대선 후보 토론회 다음날이면, 각 지지자들은 가치와 내용이 아닌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흥분하며 격해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인터넷상에서는 열광적인 지지자들의 '떼거리 댓글 폭력'이 난무한 지 이미 오래다. 심지어 4월 19일 대선 후보 토론회 다음날에는 다수 정당의 지지자들이 소수 정당에 '집단 린치'를 가하는 일까지 있었다.

뿐만 아니다. 4월 25일 대선 후보 토론회 다음날에도 다수 정당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어하는 '가짜 뉴스'를 퍼뜨리며 격앙된 감정으로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폭력적인 언사'를 쏟아낸 일마저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이들의 이런 모습은 과연 기적을 행하는 왕을 믿은 과거의 백성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이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지지 후보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깔려 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는 훗날의 역사가는 아마도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다. '어떻게 사람들은 대통령이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는가?', '왜 그들은 정책의 방향과 공약을 찬찬히 따져보지 않고 후보를 살아 있는 신화로 여겼을까?', '열광적인 지지자들은 어찌하여 왕권 강화의 충실한 신도를 자처했을까?'

촛불이 진전시킨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다음 날인 지난해 12월 10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정권 끝장내는 날'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근혜 즉각퇴진'을 외치고 있다.
▲ 탄핵 가결 후에도 꺼지지 않은 '촛불의 바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다음 날인 지난해 12월 10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정권 끝장내는 날'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근혜 즉각퇴진'을 외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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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에 대해 열광하는 지지자들의 집단 심성은 확실히 연구 대상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모습이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것이다.

정치인의 열성적인 '팬'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정인에 대한 열광적 지지와 믿음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 촛불 항쟁의 주권자는 결코 정치인을 따라다니는 열광적인 팬이 아니었다.

선거 과정은 주권자를 소비자나 동원자로 전락시키고 갖가지 흥행쇼와 스펙타클로 열광적 지지와 믿음을 만들어 내며, 이로 인해 촛불 항쟁이 전진시킨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

나아가 선거 이후에도 신화화된 개인에 대한 믿음과 지지가 계속될까 염려스럽다. 열광적인 지지자들은 기적이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로 사회의 소수자를 지목해 그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 우리 사회를 좋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검증'에 있다. 또한 선거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으려면, 소수자에 대한 모욕과 억압이 아닌 '다양한 의견의 드러남'이 가능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길이며 우리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소양이 아닐까. 선거날을 앞두고 차분해질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태그:#대통령_선거, #대선, #지지자, #유권자, #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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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2002년, 오마이뉴스 2.22상 수상 2003~2004년, 클럽기자 활동 2008~2016년 3월, 출판 편집자. 2017년 5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자유기고가. tmfprlansgh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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