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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에서 집계한 재외선거 비용은 평균 1인당 23만 원가량이다. 이날 우리 가족은 교통비까지 합쳐 80만 원짜리 값비싼 참정권을 행사했다.
▲ 제 19대 대통령 선거 투표완료 선관위에서 집계한 재외선거 비용은 평균 1인당 23만 원가량이다. 이날 우리 가족은 교통비까지 합쳐 80만 원짜리 값비싼 참정권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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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깨워 기저귀 갈고 옷을 입혔다. 신분증을 챙겼는지 다시 확인했다. 가방과 유모차를 챙겨 집에서 로바니에미역으로 갔다. 하지를 두 달 앞둔 해는 일찌감치 떠 있었다. 새벽 5시 55분, 기차는 헬싱키로 향했다. 겨우,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뽑아보자고, 산타마을 유권자 두 명이 두 살배기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재외국민 투표를 신청해두고도 출발 전날까지 고민했다. 시간도 문제지만 일단 교통비가 비쌌다. 마침 핀란드의 노동절 연휴 기간이라 항공편 가격은 1인당 왕복 100만 원을 넘었다. 직접 운전을 하자니 하루 꼬박 걸리는 데다 기름값과 숙박비가 만만찮았다. 기차만한 대안이 없었지만 이 역시 두 사람 열차표가 280유로 (한화 35만 원). "그냥 마음으로 투표할까?" 아내한테 넌지시 포기를 제안했다. "그래도 가자" 웬일인지 아내가 투표에 적극적이었다.

한 살 갓 지난 아기, 놀이방 열차 덕분에 버텼다

아이를 위해 놀이방 열차 칸을 선택했다. 핀란드 기차를 탈 때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다. 열차는 복층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중 한 칸에 미끄럼틀과 장난감, 책을 마련해둔 공간이 있다. 다행히 연휴를 맞이해 곳곳으로 가는 어린이 승객이 많았다. 아기는 이 친구 저 친구와 놀면서 9시간을 버텼다. 기저귀 두 번을 갈았고, 밥을 세 번 먹었다. 가끔 창밖을 보여주면 "이야!" 하고 소리를 냈다. 여전히 눈이 녹지 않은 숲과 들판이 많았다. 기차는 오후 2시 반에 헬싱키 중앙역에 도착했다. 쌀쌀한 기운은 여전했지만 화창한 날씨였다.

핀란드 열차(VR) 2층에는 보호자와 함께 아이들이 탈 수 있는 어린이용 열차칸이 있다. 기차 모양 놀이기구와 미끄럼틀, 그리고 아동문고가 마련돼 있다. 해당 열차칸에는 앞뒤로 아이들이 계단으로 나갈 수 없도록 별도의 칸막이가 설치돼 있다.
▲ 아이들이 뛰어노는 열차칸 핀란드 열차(VR) 2층에는 보호자와 함께 아이들이 탈 수 있는 어린이용 열차칸이 있다. 기차 모양 놀이기구와 미끄럼틀, 그리고 아동문고가 마련돼 있다. 해당 열차칸에는 앞뒤로 아이들이 계단으로 나갈 수 없도록 별도의 칸막이가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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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핀란드 한국대사관은 중앙역에서 15분 거리에 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다른 대사관들이 모인 거리에 있고, 아일랜드 대사관과 한 건물을 쓴다. 길목에 들어서 건물 쪽으로 걷자 태극기가 보였다. '대한민국 대사관'이라 쓰인 안내판 옆으로 '재외투표소' 표지문이 붙어있었다. 건물 입구 계단이 다소 가파른 탓에 아기가 탄 유모차를 통째를 들고 건물로 들어갔다. 왠지 기운이 났다. 새벽 5시 반에 집에서 나와 꼭 9시간 30분 만에 도착한 투표소는 정말 반가웠다.

9시간 30분 만에 도착한 '재외선거' 투표소 

"투표하러 오셨어요?" 대사관 입구로 들어서자 교민으로 보이는 안내원 한 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대답을 하곤 어쩐지 웃음이 나와 아내와 함께 웃었다. "로바니에미에서 왔어요."하고 덧붙였다. 대사관 직원과 안내원이 놀라며 투표 마치고 나오면 커피 한 잔 주시겠다고 하신다.

입구에 놓인 책자를 열어 후보자 14명 명단과 공약을 훑어봤다. 재외선거용 홍보물이라 그런지 몇몇 후보 홍보물은 따로 제작한 듯 보였고, 대부분은 국내용 홍보물과 같았다. 공약도 당명도 없는 그 화제의 포스터도 있었다. 재외동포청 신설, 한글학교 지원 확대 등은 공통적인 공약이었고, 각종 테러로부터 재외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법 제정 공약이 눈에 띄었다. 우편과 인터넷 투표 도입으로 재외국민 참정권을 확대하겠다는 후보는 한 명뿐이었다.

선관위에서 파견된 직원 및 대사관 공무원, 교민들이 투표를 안내하고 도왔다.
▲ 주핀란드대사관 재외투표소 선관위에서 파견된 직원 및 대사관 공무원, 교민들이 투표를 안내하고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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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아기는 유모차에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여권을 꺼내 투표소로 들어갔다. '주핀란드대사관재외선거관리위원회'라는 공식 명칭에 걸맞게 투표소는 국내에서 투표할 때와 같은 형태로 구성돼 있었다. 신분증 확인 인원 두 명, 투표 가림막 두 곳, 선관위에서 파견된 직원과 외교관까지 포함해 참관인 다섯 명가량이 앉아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국내 투표와 달리 투표용지와 함께 우편봉투를 함께 받았다는 점이었다.

봉투 겉면에는 국내 주민등록 주소지 관할 선관위 이름이 적혀 있었다. 투표를 마치면 용지를 반으로 접고, 접착 테이프가 붙어 있는 봉투에 넣어 밀봉한 뒤 투표함에 넣는 식이었다. 이름을 한번 더 훑어보고 도장을 찍었다. 투표함에 봉투를 넣으니 참관인들이 "애쓰셨습니다"하고 인사한다.

민낯, 변명, 몰락 그리고 촛불이 준 교훈들 

투표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기분이 묘했다. 내 손으로 뽑는 대통령이 대체 뭐라고, 울컥거림이 느껴졌을까. 어차피 누군가는 그간의 정치 경력과 노력에 걸맞는 득표를 하게 될 것일 텐데. 내가 투표하든 안 하든, 민심이 속았든 믿었든 그건 그것대로 한국 사회의 현재일 텐데. 그것이 51%의 민심이든 어떻든 결국 그를 대통령이라 불러야 할 텐데. 누가 일하든 내 삶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공약과 정책만으로는 알 수도 없을 텐데.

이런 여러 가지 마음을 모두 누르고 9시간 기차를 타게 했던 건 역시 지난 몇 달 동안 목격한 역사적 순간들일 것이다. 그 민낯과 변명들, 진실과 몰락, 그리고 함성과 촛불들이 뒤섞였던 반년. 현재진행형이어야만 하는 부패 청산과 개혁. 이 모든 일들이 더 많은 삶에 도움이 될 수 있으려면, 투표는 결국 가장 기본일 수밖에 없다고 난 생각했다.

투표 자체는 길어야 1분이지만, 내 한 표는 누군가 나 대신 복잡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계약이다. 선거는 결국 교육, 복지, 경제, 국방, 문화와 외교 등등 내가 손대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니, 계약을 하고 난 뒤에야 기대도 하고 질타도 할 자격이 생긴다. 그 자격을 한번 갖겠다고, 우린 눈도 안 녹은 도시에서 새벽같이 열차를 탔다. 가까운 지인 부부는 아기 둘을 데리고 7시간 거리를 직접 운전해서 투표했다. 모두 이만큼 더 나은 한국 사회를 절박하게 희망한다는 뜻이 아닐까.

새벽 5시 55분 북부 도시 로바니에미에서 헬싱키로 가는 열차를 탔다. 재외선거 투표소는 오후 5시에 닫기 때문에, 가장 이른 열차를 타야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새벽 5시 55분 헬싱키행 열차를 타다 새벽 5시 55분 북부 도시 로바니에미에서 헬싱키로 가는 열차를 탔다. 재외선거 투표소는 오후 5시에 닫기 때문에, 가장 이른 열차를 타야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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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참정권... 우리도 최선을 다하겠다

누구 말대로 재외국민 선거는 특별한 권리다. 1인당 재외선거 비용만 평균 23만 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투표용지가 오가는 비용이 아니라 선관위 참관인 파견비용, 각종 홍보물과 선거 안내문 배송 비용, 또 재외선거 기간 동안 동원되는 안내원 고용 및 운용 비용 등이 포함된 금액이다. 한국 내 유권자 한 표당 책정된 선거비용 7113원의 30배라고 하니, 분명 수치만으로도 꽤 큰 지출이다.

하지만 교민뿐 아니라 출장 업무와 사업, 혹은 유학과 여행 등 갖은 이유로 해외에 나와 있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인 만큼,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보장하는 굉장한 투자라고 할 수 있겠다. 국가에서 이런 투자를 해가며 내 참정권을 인정하겠다고 하니, 나도 최선을 다해 투표하는 것일 뿐.

▲ 헬싱키에서 다시 로바니에미로 4월 28일 새벽에 기차를 타고 헬싱키로 간 우리 가족은 투표를 마친 하루 뒤 29일 오후 다시 기차를 타고 로바니에미로 돌아왔다. 핀란드의 숲과 들판은 여전히 눈으로 덮힌 곳이 많았다. 장장 18시간 가까운 '투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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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교민 한분 댁에서 신세를 진 뒤 다음 날 오후 다시 9시간 기차를 타고 로바니에미로 돌아왔다. 2017년 4월 28일 새벽 5시부터 다음날 자정까지 내가 오간 먼 길만큼, 한 사회가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 게다가 실질적인 비용이 많이 들어갈 테다. 이 참정권이 내 손에 주어지는 데는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아내와 나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동의했다. "투표하러 다녀오길 잘 했어." 값비싼 한 표였지만, 먼 훗날 아기가 선거권을 혹시라도 하찮게 여긴다면 두고두고 해 줄 이야기가 생겼다. 세상에는 기저귀만 대여섯 번을 갈고 왕복 20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하는 투표도 있다고.


덧붙이는 글 | 핀란드 라플란드 대학에서 미디어 교육을 공부하고 있는 YTN 최원석 기자입니다.



태그:#로바니에미, #대통령선거, #재외선거, #투표, #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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