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놓인 <전두환 회고록>과 <이순자 자서전>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매장에 <전두환 회고록>과 <이순자 자서전 - 당신은 외롭지 않다>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 나란히 놓인 <전두환 회고록>과 <이순자 자서전>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매장에 <전두환 회고록>과 <이순자 자서전 - 당신은 외롭지 않다>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 권우성


한 전직 대통령이 회고록을 출간했다. 자신의 30년을 "험난한 풍파"와 "인고의 세월"로 규정했다. 거기까진 좋다. 위세 좋았던 시절을 회고하는 어느 노인의 줄글로 넘어가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팩트'를 왜곡하는 순간, 그 전직 대통령은 역사의 진실을 등지는 협잡꾼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런 시대다. 이러한 역사 왜곡들이 극성이다. "5·18 유공자 자녀는 금수저"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들이 기사 형태로 떠돈다. 탄핵 정국을 지나오면서 더없이 횡행한 가짜뉴스들의 폐해는 이미 수없이 제기돼 왔다. 이례적으로, 지난 6일 제61회 신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가짜뉴스는 정보를 왜곡시키고, 진실을 가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며 가짜뉴스를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가짜뉴스, 이른바 '페이크 뉴스'의 범람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애먼 기존 언론들을 "페이크 뉴스"라고 공격하기도 하지만, 이미 가짜뉴스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있는 상태다. 또한, 독일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문제시 되는 가짜뉴스에 철퇴를 내리기로 했다. 독일 정부는 가짜 뉴스를 제때 삭제하지 않는 소셜미디어 회사에 대해서 최고 600억 원에 달하는 벌금을 물리는 법안을 입법하기로 했다.

독일이야말로 이러한 가짜뉴스의 범람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는 국가일 것이다. 이미 '네오나치' 세력의 부응에 일조하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의 역사 왜곡에 데일 대로 데인 국가 아니겠는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 세력의 유대인 학살을 끝끝내 부정하는 이들이야말로 작금의 '가짜뉴스', '페이크뉴스'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26일 개봉하는 <나는 부정한다>는 이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부인하는 세력과 맞서는 한 역사학자와 그를 도운 변호사들의 재판 과정을 정직하고 묵직하게 다룬다. 역사 왜곡이 왜 문제인지, 그들은 왜 돈과 노력이라는 수고와 공을 들이면서까지 역사를 왜곡하려 하는지, 특히나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은 피해자들을 고려하면서 어떻게 싸워 나가야 하는지를 정면으로 그리고 있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화라는 표현이 절대 의례적이거나 아깝지 않은 그런 영화다. 이미 짐작했을지 모르겠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기도 하다.

"재판에 오른 역사"를 영화화하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에서 주인공 역사학자를 연기한 레이첼 와이즈.

영화 <나는 부정한다>에서 주인공 역사학자를 연기한 레이첼 와이즈. ⓒ 티캐스트


미 애틀랜타에 위치한 에모리 대학의 현대 유대사학과 교수 데버러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 분). 그는 <재판에 오른 역사: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와 법정에서 보낸 나날들>의 저자로서 웹사이트 'HDOT: 홀로코스트 다니이얼 재판'(www.hdot.org)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나는 부정한다>의 제작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립스타트 교수는 유대인 역사학자로서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파헤쳐왔다.

영화의 시작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립스타트 교수 한창 홀로코스트 관련 강연에 몰두해 있던 찰라, 한 백인 중년 남성이 손을 들고 질문을 퍼붓는다. 홀로코스트가 진짜 행해졌는지 증명해낼 수 있느냐고. 히틀러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부인해온 데이비드 우빙(티머시 스폴 분)은 청중들에게 현찰을 들이대며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립스타트 교수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핏대를 세우고 난동을 부린다.

얼마 뒤 걸려오는 출판사의 전화. 데이비드 우빙은 저서 안에서 자신을 언급한 립스타트 교수와 출판사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 하지만 미국인인 립스타트 교수가 재판을 받으려면 영국으로 건너가야 한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국의 법을 데이비드 우빙이 이용했고, 결국 립스타트 교수는 명예훼손죄를 입증하기 위해 피고소인인 자신이 홀로코스트의 존재 여부를 증명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황당한 상황 맞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는 주장도 그렇거니와 그 주장의 진위를 피고소인 측이 증명해야 하는 상황도 곤혹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더군다나 상대방은 네오나치를 선동하고, 홀로코스트 피해자와 생존자들을 조롱하는 쇼맨십에 가득 찬 "타락한 역사학자"다. 거액의 소송비는 문제가 아니다.

2년 뒤, 립스타트 교수는 역사의 진실이란 대명제를 품에 안은 채 전 세계의 이목이 걸린 재판에 나서게 된다. 그것도 영국 땅에서. 다행히도, 립스타트 교수가 만난 영국 변호인들은 능력과 정의감,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함께 지닌 인물들이었다. <나는 부정한다>는 이 재판 과정의 안과 밖을 성실히, 진중하게 그려낸다.

품위있고, 역사 앞에 정당한 법정 투쟁 

 영화 <나는 부정한다>의 배우진은 화려하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의 배우진은 화려하다. ⓒ 티캐스트


피고소인이 무죄를 증명해야 한다. 심판청구인, 그러니까 데이비드 우빙은 명예훼손을 당한 내용을 재판부에 소명하기만 해도 된다. 그러니까, 홀로코스트가 실제로 벌어졌고, 우빙이란 얼치기 역사학자가 히틀러 숭배자며, 그러한 관점을 관철하기 위해 사실을 조작했다는 립스타트의 서술 내용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것은 립스타트와 변호인들의 몫이었다.

이를 위해 두 변호사, 즉 사무 변호사 앤서니 줄리어스(앤드루 스콧 분)와 법정 변호사 리처드 랜프턴(톰 윌킨슨 분)이 나선다. 영국은 대체로 법적 전략과 서류나 합의들을 담당하는 사무 변호사와 법정 내 변호와 법률적 조언을 제공하는 법정 변호사가 따로 존재한다. <나는 부정한다>는 이들 변호사가 어떻게 립스타트가 추구하는 진실과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 대한 존중을 합리적으로 해나가는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두 변호인이 선택한 전략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립스타트를 증언대에 세우지 않는 것이었다. 쇼맨십에 강한 데이비드 우빙이 자신의 존재와 주장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그들을 모욕하는 질문을 퍼부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또한, 말의 휘발성과 기억의 불완전성을 의심해서였기도 했다.

그렇기에 변호인들은 증인들을 주로 역사학자와 지식인들 위주로 꾸린다. 립스타트는 처음엔 이 차가운 영국 변호사들을 불신하지만, 그들의 진의와 진심을 알아차리고 나서는 안심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립스타트와 랜프턴이 아우슈비츠를 찾는 장면이다.

여전히 차갑고 어두운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그곳에서 립스타트는 감정적으로 행동하지만, 랜프턴은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희생자들과 생존자들 입장을 고려하는 역사가와 단순하게 애도가 아닌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집중하는 변호인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그 아우슈비츠의 회색빛 공기를 담담하게 포착한다.

결국, 랜프턴은 그렇게 확보한 증거를 토대로 법정에서 데이비드 우빙의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철저하게 무시로 일관하면서 그의 논리를 철저하게 깨부순다. 그렇게, 1996년에 시작한 재판은 32번의 공판 끝에 2000년 4월 종료된다.

립스타트 측 변호인들의 조언에 따라 배심원 없이 1명의 판사가 판결을 내렸다. 판사는 심사숙고했고, 판결문은 총 334페이지에 달했다. 마지막까지, 판사는 우빙이 한 거짓말이 순수한 의도였다면 그것 또한 진실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나는 부정한다>는 총 2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비용이 들었던 이 세기의 재판의 끝을 통해 "진실을 왜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어떤 모범답안을 던져 준다.

역사 왜곡에 맞서라, 부정을 부정하라

 영화 <나는 부정한다> 속 아우슈비츠 장면. 그들은 진실에 접근해 나간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 속 아우슈비츠 장면. 그들은 진실에 접근해 나간다. ⓒ 티캐스트


법정 공방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원작과 재판기록을 참조했다는 법정 장면은 딱히 형식미를 강조하지 않아도 생동감 넘친다. 생존자들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으면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변론은 펼치는 두 변호인의 활약 또한 그 자체로 극적이다. 거기에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이들의 논리는 무엇인지, 또 왜 그러한 역사 왜곡을 철저히 막아야 하는지를 곱씹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한 줌 이익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 당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법적으로든, 현실 차원이든, 이들과 싸우는 행위는 역사의 존엄이라는 거시적인 명제 외에도 '역사 왜곡'으로 인해 신음하는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역사적인 발자국일 수 있다.

<나는 부정한다>는 립스타트 역시 데이비드 우빙이란 "타락한 역사가"에 맞서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싸운 개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재판에서 이기는 것과 품위 있게 싸우는 것 자체가 '역사 왜곡'의 피해자들을 위하는 것이라는 '방법론'까지 제시한다. 그 쉽지 않은 길을 먼저 갔던 이들의 활약과 내면을 고루 보듬으면서 말이다. 맞다. 이 영화는 립스타트 교수 본인의 저서와 재판 기록을 참고한 '실화 영화'다.

'옛날 그' 영화 <보디가드>의 감독 믹 잭슨이 연출한 이 영국영화는 레이첼 와이즈와 톰 윌킨슨의 호연과 함께 드라마 <셜록>의 '모리아티' 앤드루 스콧, <해리포터> 시리즈의 티머시 스폴 등 배우진도 화려하다. 하워드 쇼워의 음악과 더불어 아우슈비츠를 재현한 세트나 실제 영국 왕립재판소에서 촬영한 법정신도 품위를 더한다. 스피디하고 감각적인 영상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만큼 진중하고 묵직하게 주제에 접근하는 정공법과 같은 연출이 무게를 더한다.

이 재판의 시작이 벌써 20여 년 전이었다. 그 사이, '역사 왜곡'을 지속하는 이들은 변치 않았다. 한일 위안부 합의를 보라. 회고록을 출간한 전두환씨는 또 어떠한가. 그리고 그 역사와 사실 왜곡을 무기 삼은 가짜뉴스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부정한다>는 "부정을 부정하라"고 말한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분명 영화 같은 현실이지만, 현실을 토대로 한 영화다. 2017년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꼭 필요한 원칙과 능력, 철학을 겸비한 '승리자'들의 역사가 바로 여기 있다.

 부정을 부정하며, 결국 역사의 진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승리했다.

부정을 부정하며, 결국 역사의 진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승리했다. ⓒ 티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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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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