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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선글라스와 스카프가 외출 필수 아이템이던 시절의 자화상
▲ 자화상 커다란 선글라스와 스카프가 외출 필수 아이템이던 시절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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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절반을 가릴 정도로 스카프를 칭칭 두르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썼다. 거울 속 얼굴이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만하면 됐어. 씩씩한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지하철 1호선은 한낮인데도 꽤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여전히 선글라스를 낀 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장에 고개를 처박았다. 누군가 내 팔을 덥석 잡았다.

"으이그, 어쩌나…… 우리 동네에도 아토피로 고생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뭐냐, 알로에즙으로 씻고 마시고 했더니 싸악 나았대. 내가 소개해 줄까?"

생판 모르는 아줌마다. 오지랖 넓은 아줌마의 탄식에 전철 안 사람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느껴진다. 젠장. 스카프도 선글라스도 말짱 도루묵이다. 생각 같아서는 아줌마의 손길을 뿌리치고 당장 전철에서 내리고 싶다. 제발 신경 끄시라고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 가방을 뒤적거리던 아줌마는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로 한번 연락하고 가 봐요."
"네, 고맙습니다."


이를 앙 문 채 명함을 받아들고 전철에서 내렸다. 명함은 읽어보지도 않고 바로 휴지통으로 던져 버렸다. 지긋지긋했다.

엄마에게 어린 나는 가장 아픈 자식이었다.
▲ Kathe Kollwitz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모작 엄마에게 어린 나는 가장 아픈 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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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는 갓난아기 때부터 안고 살던 지병이었다. 기억엔 없지만 엄마 말로는 돌이 채 지나기도 전에 온몸에 붉은 열꽃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그때는 아토피란 말도 없었고, 태열이라 불렀다. 내가 기억하기에도 겨울에는 손바닥과 발바닥이 거북이 등가죽처럼 쩍쩍 갈라져 피가 났고 여름에는 관절이 접히는 부분과 목 부위에 땀띠처럼 붉은 열꽃이 피어올라 피가 흐르곤 했다. 1년에 수십 번씩 허물이 벗겨져서 벌겋고 얇은, 그러나 촌로의 손처럼 뻣뻣하기 짝이 없는 손바닥 때문에 사람들과 손잡기를 꺼려했다.

엄마는 갓난쟁이 나를 업고 용하다는 약방이란 약방은 다 찾아다녔다. 나 때문에 날린 약값이 소 두 마리 값은 될 거라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엄마의 정성 덕분이었을까, 스테로이드에 내성이 생겨 어지간히 독한 약은 듣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중에야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에 대해 알게 된 엄마는 두고두고 "무식한 엄마 때문에 병을 키웠다"며 가슴을 쳤다.

약만 찾아다닌 게 아니었다. '카더라' 통신으로 떠돌던 무수한 민간요법이 내 몸을 거쳐 갔다. 기독교 집안만 아니었어도 무당을 찾아가 굿이라도 했을 것이다. 엄마는 나를 둘러업고 '용하다는' 기도원을 찾아가 안수기도를 받았다. 발진이 가장 심했던 고등학생 때는 저녁마다 기도를 '받으러' 가야 해서 야간 자율학습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는 부모님과 함께 가족예배를 드리곤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울면서 기도했다.

다행히 고등학교 3학년 이후 발진은 잦아들었다. 물론 여름에 햇볕을 오래 쐬거나 땀을 많이 흘리면 어김없이 발진이 시작됐지만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다. 아주 심할 때만 스테로이드제와 항히스타민제를 쓰면서 넘길 만한 수준이었다. 태열은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없어진다던 어른들의 말이 맞는가 싶었다.

벗어날 수 없는 자기연민의 굴레, 살기 위해 명랑해졌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발진으로 몇 달씩 꼼짝없는 감금생활을 해야 했다.
▲ 감금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발진으로 몇 달씩 꼼짝없는 감금생활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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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다시 발진이 시작되었다. 어릴 적 발진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번에 찾아온 발진은 유독 얼굴을 중심으로 퍼졌다. 어릴 때 손바닥 허물을 벗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얼굴의 허물이 수십 번씩 벗겨졌고, 허물이 벗겨진 자리에 드러난 벌건 속살에선 진물이 흘렀다.

해진 피부에 바깥 공기만 닿아도 쓰라려서 아예 외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럴 때마다 두세 달씩 집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깥바람도 쐬지 못한 채 틀어박혀 지내기란 여간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씩씩하게 지내다가도 자기연민에 빠지는 때가 꼭 찾아왔다. 그럴 때면 누워서 이제 숨을 그만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스스로 안 됐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다. 발진으로 인한 통증보다 견디기 어려웠다.

바깥바람을 쐴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어 외출하게 되면 누구보다 명랑하고 쾌활한 에너자이저가 되었다. 내가 불쌍해 보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나를 향한 걱정스러운 인사는 절대 사절이었다. 난 괜찮다고! 피켓이라도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물여덟 이후로 1~2년에 한 번씩은 발진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칩거, 자기연민, 에너자이저의 사이클을 돌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괜찮은 척, 씩씩한 척 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지만 자기연민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게 허물어질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 살기 위해 명랑했고 살기 위해 씩씩했다.

'너, 또왔니?' 더이상 인사할 필요 없지만

살기 위해 명랑했고 살기 위해 씩씩했다.
▲ 개그캐릭 탄생사 살기 위해 명랑했고 살기 위해 씩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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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계속 같은 배역을 하다 보면 배역과 자신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던가. 나 역시 그랬다. 아토피 때문에 써야 했던 씩씩함과 명랑함의 가면은 나의 성격이 되었다. 발진이 시작되어도 오랜 친구를 만난 양 그러려니 했다. 또 왔어? 이번엔 얼마나 있다 가려고?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거나 진행해야 할 때는 나의 벌건 얼굴을 소재 삼아 농담도 던질 만큼 배포도 생겼다. 병을 낫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짓도 그만두었다. 아토피는 평생 함께 갈 친구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토피를 친구로 받아들이니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고마움도 발견했다. 발진 덕분에 남들은 평생 한 번도 갖기 힘들다는 장기 휴가를 몇 차례나 쓸 수 있었고, 쉬는 동안 이것저것 호작질로 익힌 기술도 많았다. 남들 눈에 안쓰러워 보이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겪어보았기에 섣부른 동정과 참견을 삼가는 예의도 터득했다. 아토피가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세계를 떠올려보면 아토피를 평생지기로 만난 게 얼마나 행운인가 싶기도 하다.

마치 거짓말처럼, 나이 마흔을 넘긴 이후로는 발진이 찾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떻게 아토피가 나았냐고 비법을 물어보지만 내가 해줄 대답은 '늙어서'밖에 없다. 더 이상 발진이 없으니 칩거할 일도 없고 숨을 그만 쉬고 싶을 정도로 자기연민에 빠지는 일도 없어서 좋긴 한데, 한편으로는 아쉽다. 더 이상 핑계 대고 쉬는 것도, 가끔씩 자기만의 세계로 웅크리고 들어가는 것도 못하게 됐다. 이제는 오지랖 넓은 아줌마가 말을 걸어오면 걸쭉한 수다 한 판 풀어줄 만큼 넉살도 생겼는데.

아토피 발진이 사라진 지 5년이 넘었다. 비법은 없었다. 단지 나이가 들었을 뿐이다.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줄 알았던 아토피는 나이가 들며 그렇게 떠나갔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생명과 모든 관계는 변화한다.
▲ 봄밤 아토피 발진이 사라진 지 5년이 넘었다. 비법은 없었다. 단지 나이가 들었을 뿐이다.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줄 알았던 아토피는 나이가 들며 그렇게 떠나갔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생명과 모든 관계는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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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은유 작가의 '감응의 글쓰기' 8기 수업을 듣고 있다. 수업 중에 과제로 제출했던 글이다.



태그:#생활글, #아토피,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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