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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검찰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영장을 청구한 27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 전 대통령 자택 앞에 영장청구 소식을 들은 지지자들이 몰려와 탄핵무효를 외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검찰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영장을 청구한 27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 전 대통령 자택 앞에 영장청구 소식을 들은 지지자들이 몰려와 탄핵무효를 외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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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가 더러워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기에서 고르시오.
① 물에 빤다.
② 불에 태운다.
③ 땅에 파묻는다.
④ 걸레로 만들어 쓴다.

주입식 교육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곱셈도 익히기 전에 푼 시험문제가 뇌에 문신처럼 박혀 지워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주입식 교육은 한계도 분명해서, 선생님이 그렇다니 그런 줄 알았을 뿐,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거나 토론할 기회는 없었다.

그래도 난 '애국자'였음이 분명하다. 국기 하강식 때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나는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얼어붙듯 서 있었다. 태극기가 보이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장엄하게 펄럭이는 국기를 그려보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행여 주위에 또래 애들이 그냥 지나가는 '해국(害國) 행위'를 저지를 때,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야, 너는 한국인 아냐?" 이 한심한 비애국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멈춰섰다. 지은 죄 때문이었는지, '애국 파수꾼'의 험악한 표정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그들은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였다.

바쁜 일이 있어 불가피하게 길을 서두르거나, 무언가에 골몰해서 못 들은 사람들도 있겠으나, 그런 건 변명거리가 못되었다. 국민의 삶에 '애국'보다 중요한 게 있는가? 등대가 숨 가쁘게 돌며 밤바다를 지키듯, 애국심은 한 시도 놓치지 말고 우리 삶을 비춰야 한다.

나는 애국심의 우위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애국가가 끝난 뒤에도 남들보다 한 박자 늦게 부동자세를 풀었다. 그러는 가운데 내가 뭐라도 된 듯 의기양양해졌다. 국기에 대한 경례 잘해, 애국가 4절까지 외워 불러, 그 어려운 태극기의 건·곤·감·리도 그려, 거기에 국기가 낡으면 바르게 처리할 줄도 알아, 이보다 더 완벽한 '애국의 화신'을 본 일이 있는가?

'애국' 외치며 탈법·부정·폭력 옹호하는 모순

완벽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이 소년은 이제 제 또래를 넘어, 중고등학교 언니들까지 호령하기 시작했다. '애국심 부족'을 지적하면, 나이가 많고 몸집이 커도 쩔쩔맸다. 이 '완장질'이 거듭될수록 소년의 마음에는 묘한 도덕적 우월감 같은 게 자라났다. 그 어린 나이에도 '애국질'은 강력한 권력행사의 쾌감을 선사해주었다.

따라서 나는 이해한다. '애국'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기만 하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도 애국 행위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해되는 건 아니다. 예컨대 태극기가 훼손될 때 경악하며 몸을 부르르 떠는 '섬세한' 애국자들이, 국가 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부정선거에 눈을 감고, 국가재난 사태 때 사라진 대통령을 옹호하고, 수백 억대의 뇌물 혐의까지 감싸는 '통 큰'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뒤, 자칭 '태극기 시위대' 가운데는 '죽여버리겠다'며 태극기를 죽창에 달고 나온 이들도 있었다. 박근혜에게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지지자들은 취재 중인 기자들에게 발길질하고 커피를 뿌리고, 등굣길 학생들에게까지 행패를 부렸다. <한겨레>에 실린 기사는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녹색어머니회의 한 어머니가 '아이들 등굣길입니다'라며 물러나 달라고 요구하자 태극기를 든 50대 남성이 '한 나라 대통령이 구속될 판인데 학생이 중요하냐 이X아'라며 욕설을 했다. 뒤이어 지지자들이 '학교에서 공부 배우면 뭐하냐. 빨갱이 나라에서' '씨X, 이 땅을 너네가 샀냐?' 등 막말을 이어갔다. 등교하던 초등학생들은 욕설과 고성이 들리자 어깨를 움츠리고 얼굴을 찌푸리며 교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한겨레> 3월 30일, "'죽어도 못 보낸다' 박 전 대통령 자택 앞 아수라장")

2015년 4월, 청와대, 여당, 경찰, 검찰은 세월호 1주년 추모집회를 '폭력집회'로 규정하고, 참가자를 그냥 두지 않겠다며 으르기 시작했다. 정부가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데 한몫을 한 것은 불붙은 태극기였다. 시위대 가운데 한 명이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에 대한 항의표시로 국기에 불을 붙인 것이다.

새누리당의 김진태 의원은 '태극기를 불태운 것은 국민을 불태운 것'이라며 조속한 체포와 처벌을 주문했다. 물론, '국민을 불태운 것'이라면 살인이나 최소한 살인미수에 해당할 테니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였을 터이다. 

기이하게도, '국민'의 상징에 불붙인 행위에 대해서는 열렬히 흥분하던 그가, 실제 국민을 물에 수장시킨 정부의 과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다. 그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목소리를 높인 순간은 '세월호 인양 반대'를 외칠 때 정도였다. 이제 그는 '애국세력'으로부터 추앙받는 대선 후보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자유한국당 대선주자로 나선 김진태 의원이 22일 오전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제19대 대통령 후보 선거 후보자 부산·울산·경남 비전대회'를 마친 후 태극기를 든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 '태극기부대'에 둘러싸인 김진태 자유한국당 대선주자로 나선 김진태 의원이 22일 오전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제19대 대통령 후보 선거 후보자 부산·울산·경남 비전대회'를 마친 후 태극기를 든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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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세력'은 애국자들일까

아무리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람이 곤란을 겪는 상황이라 해도, 극단적 무례, 폭언, 협박, 폭행을 '애국'의 이름으로 자랑스레 저지르는 심리 기제는 무엇일까?

프랑스 사회심리학자인 로랑베그가 단서를 준다. 그는 자신의 책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에서, 도덕적 우월감이 도리어 사람들을 부도덕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로랑 베그는 이 모순적 결과를 '가혹한 역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베그는 책에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의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인용한다. 먼저 실험대상자에게 '공정', '관대' 등의 언어로 자신을 높이 평가하게 한다. 그런 뒤 이런 '자뻑'이 자신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관찰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자신을 도덕적으로 칭찬한 사람들은 타인들의 도덕적 결함을 가혹하게 비난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기부나 자원봉사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착각이 타인에게는 모질고 자신에게는 터무니없이 관대한 태도를 유발하는 것이다.

스스로 '도덕적'이라고 믿는다고 남들보다 더 도덕적인 것은 아니듯, 자신들을 '애국세력'이라고 부르고, 태극기를 시도 때도 없이 흔든다고 애국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베그의 설명대로라면, '애국'을 자임하는 이들일수록 애국과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빨면 되는 태극기, 빨아도 안 되는 태극기

- 태극기가 더러워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기에서 고르시오.
① 물에 빤다.
② 불에 태운다.
③ 땅에 파묻는다.
④ 걸레로 만들어 쓴다.

답이 뭐라고 생각하시는가? ②가 유일한 정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태극기는 세탁이 가능하다.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 제22조(국기의 관리)는 "국기에 때가 묻거나 구겨진 경우에는 국기를 훼손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국기를 세탁하거나 다림질하여 게양·보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태극기가 더러워지면 조심스레 물에 빨면 된다. 문제는 '패악질'과 '부패한 권력 옹호'의 상징으로 전락하고 있는 태극기다. 박근혜의 구속으로, 삼성동 자택 앞은 침통한 분위기일 것이다. 이제 지지자들이 할 일은 '애국'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3월의 마지막 날, 피의자 박근혜가 서울구치소로 떠나는 순간, 세월호는 돌아오기 위해 목포신항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박근혜를 보내고 세월호 유족과 원혼을 맞는 데 써야 한다. 그게 정의고, 그게 나라며, 그래야만 태극기가 부끄럽지 않은 국가의 상징이 된다. 


태그:#태극기, #박근혜 구속, #애국세력, #가혹한 역설, #친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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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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