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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만나 잘 살기 위해선 서로의 도움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내조만큼 외조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자신의 반려자를 위해 노력하는 '외조의 끝판왕'들을 만나봤습니다. [편집자말]
불조심이 강조되는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불을 조심하는 사회는 아니다. 사람들이 불을 조심하지 않기 때문에, 유난히 강조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남존여비가 강조됐다고 해서, 그것이 철저히 관철됐으리라고 볼 수는 없다. 유별나게 강조해야 할 만큼 남성의 지위가 그리 견고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가정에서 여성의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광해군의 최측근이자 대학자인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온다. 유몽인은 임진왜란 때 광해군의 미니 정부인 분조(分朝)에 참여한 사람이다. 이를 통해 그는 지방 민심을 살피고 의병 활동을 독려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실태에 대한 그의 분석은 믿을 만하다.

<어우야담>에서 유몽인은 "자고로 바꾸기 힘든 게 부인"이라면서 "남자 중에 심장이 강한 사람일지라도, 부인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몇이나 되는가?"라고 말했다. 아내한테 쩔쩔매고 사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에 회자된 우스갯소리 하나를 소개했다.

어느 장군이 십만 병사를 넓은 들판에 집결시켰다. 장군은 들판 한쪽에 푸른 깃발을 꽂게 하고 다른 쪽에 붉은 깃발을 꽂게 했다. 그런 다음 "집사람이 무서운 사람은 붉은 깃발 밑에 서고, 무섭지 않은 사람은 푸른 깃발 밑에 서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9만 9999명의 병사가 붉은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딱 한 명만 푸른 깃발 밑에 외로이 서 있었다. '저건 뭐야?'라고 생각한 장군이 전령을 보내 "너는 왜 거기 서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병사는 전령을 통해 이런 답변을 보냈다. <어우야담>에 나오는 말이다.

"제 집사람이 항상 경고했습니다. 남자 셋이 모이면 필시 여자 이야기를 하게 되니, 남자 셋 모인 자리에는 무조건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저쪽에 남자 10만 명이 모여 있지 않습니까? 집사람의 명령을 감히 어길 수 없어서 저 혼자 푸른 깃발 아래 서 있는 겁니다."

과장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남자들이 공감한 이야기다. 그래서 유몽인이 자기 책에 수록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 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남존여비 이념이 그렇게 철저히 관철되지는 못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도 대부분의 남자들이 몇 개월에서 몇 년 혹은 평생을 처갓집에서 데릴사위로 살았으니, 아내를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조선판 백과사전 <빙허각 전서>를 쓴 여성

 <규합총서>.
 <규합총서>.
ⓒ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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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각 전서>라는 전집이 있다. <규합총서> <청규박물지> <빙허각고>란 책이 담긴 전집이다. 취급하는 내용이 꽤 광범위하다. 식생활·의류·농사·민간요법·민간신앙·천문지리·세시풍속·동물·곤충·물고기·복식·음악·태교 외에 자작시까지 담겨 있다. 백과사전에 가까운 전집이다.

<빙허각 전서>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끄적거린 책이 아니다. 문헌에 기초해 실증적으로 집필된 책이다. 책의 상당부분이 저자가 51세 때인 1809년에 완성됐으니, 오랜 세월 동안의 공력이 투입됐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여성이다. 빙허각 이씨(1759~1824년)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남편은 <임원경제지>란 농학서적으로 유명한 실학자 서유구의 형인 서유본(1762~1822년)이다. 바로 이 서유본의 사례는 조선시대 남편들이 아내를 무조건 무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개중에는 아내를 열심히 외조한 남편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적절한 샘플이 된다. <빙허각 전서>가 나온 것도 서유본이 아내를 열심히 외조한 결과였다. 

달성 서씨인 서유본의 집안은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은 명문가였다. 정조가 죽은 뒤 가세가 기울기는 했지만, 이 가문은 조선시대의 최상류층 집안이었다. 이런 가문에서도 아내에 대한 남편의 외조를 중시했다. 그래서 서유본 같은 남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유명한 학자 집안인 이 가문은 15세에 시집온 빙허각 이씨에게 고된 삶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가문은 어린 며느리가 배움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배려했다. 며느리가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심지어 시댁 어른들이 나서서 며느리의 공부를 직접 지도했다.

옛날로 가면 갈수록 가문은 친족집단뿐 아니라 정치집단·기업체·학교 등의 역할까지 겸했다. 빙허각 이씨와 서유본이 살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도 그랬다. 명문가 중에는 자체적으로 서당이나 학교를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문중의 아이들을 직접 지도했다. 서씨 가문에서 며느리에게 공부를 지도한 것도 그런 차원의 일이었다.

 공부하는 조선시대 여성. 경기도 용인시의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공부하는 조선시대 여성. 경기도 용인시의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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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며느리에게 공부를 지도한 시댁 어른들은 결코 한가한 이들이 아니었다. 잠깐이기는 하지만 이씨를 직접 지도한 시할아버지 서명응은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내고 정조 때 규장각 초대 제학(장차관급)을 지낸 학자였다. 이씨를 지도한 시아버지 서호수 역시 규장각 제학의 아래인 직제학을 지낸 학자였다. 이런 학자들이 며느리의 학업을 직접 지도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태도는 서유본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 역시 아내의 공부를 도왔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아내의 집필 작업까지 열심히 지원했다. <빙허각 전서>가 바로 그런 외조의 산물이다.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에 더해 남편의 외조까지 받았으니, 빙허각은 '트리플 외조'를 받은 셈이다. 

가세 기운 뒤에도 아내의 집필 활동 도운 남편

정조시대에 번영했던 이 집안은 정조 사후에 급격히 기울었다. 이 같은 가세의 하락을 반영하는 게 빙허각 부부의 이사였다. 집안이 기운 뒤에 이 부부는 양반들이 많이 거주하는 남산 동네에서 서민들이 많이 사는 남대문 밖 용산으로 이주했다.

용산으로 이주한 뒤로 이 부부는 일반 서민과 다를 바 없이 생활했다.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청담동 며느리'처럼 살았던 빙허각도 팔을 걷어붙이고 손수 농사를 지었다. 이씨는 고소득 작물인 찻잎 농사를 지었다.  

 일하는 조선시대 여성. 경기도 여주시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일하는 조선시대 여성. 경기도 여주시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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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아내 공부를 뒷바라지하던 서유본의 태도에 변화가 생길 만도 했다.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했으니, 예전처럼 아내 공부를 뒷바라지하는 게 힘들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아내가 차 농사를 하면서도 계속 집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의 '외조 전선'에는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점은 <빙허각 전서>의 일부인 <규합총서> 서문에도 나타난다. 이 서문에서 빙허각은 자신이 남편의 서재에서 필요한 책들을 얻어 보고 그걸 기초로 책을 집필했다고 말했다. 집필에 필요한 문헌을 찾는 데 남편이 협조했음을 밝힌 것이다. 오늘날의 도서 서문에 '누구누구가 이 책의 집필에 도움을 줬다'고 밝히듯이 빙허각도 책 서문에다가 그 점을 밝힌 것이다. 

서유본의 역할이 문헌 찾아주기에 그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 그는 자기 문집인 <좌소산인 문집>에 실린 글에서, 아내의 책에다가 제목을 붙여준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밝혔다. <규합총서>라는 제목이 서유본 자신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서유본은 여러 사람도 아닌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총서'라고 불릴 만한 책이 나왔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이 평가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아무 책에나 '총서'라는 제목을 붙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총서'라는 제목을 붙여줬다는 것은, 그가 책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집필 과정에 그가 깊이 개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아내의 집필 과정을 직접 돕지 않고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유본은 그런 소극적 지원에 그치지 않고, 집필에 필요한 책을 찾아주거나 집필에 개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아내의 집필을 적극 보조했다. 이 같은 남편의 외조가 있었기에 빙허각이 집안일에 농사일까지 하면서도 <빙허각 전서>라는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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