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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불가리아를 여행할 때 만난 일본인 아카시.
 6년 전 불가리아를 여행할 때 만난 일본인 아카시.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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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옇게 하늘을 뒤덮은 미세먼지와는 무관하게 다시 봄이 왔다. 시인 이성부(1942~2012)에 의하면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온다"는 봄.

나른함을 부르는 햇볕 아래서 상념에 빠지다 보니 봄 햇살을 닮은 사내 하나가 갑자기 떠올랐다. 뜨거운 모로코의 태양 아래서 벽화를 그리며 살고 싶다던 일본인 아카시. 시계는 6년 전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머물던 때로 돌아간다.

불가리아는 내가 여행한 첫 번째 유럽국가다. 보통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첫 유럽 여행지로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을 찾는 것과 달리 조금은 특별한 선택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간 살아온 아시아가 아닌 낯선 대륙, 낯선 나라, 낯선 도시를 향한다는 일종의 설렘 때문에 며칠 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터키 이스탄불을 출발한 기차는 12시간이면 불가리아 소피아에 도착한다고 했다. 그러나, 낡고 느린 기차는 4~5시간을 연착했다. 하지만, 게으른 여행자에게 그건 큰 불편이 될 수 없었다. 기차 침대칸에서 잠드는 체험도 나쁘지 않았다.

깨어나 차창 밖으로 내다본 불가리아의 시골마을 풍경은 한국의 1970년대 혹은, 1980년대와 판박이로 닮아있었다. 빨간색 기와를 얹은 야트막한 집과 콧물을 흘리며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 넓이를 가늠키 힘든 광활한 감자밭과 옥수수밭, 거기에 낡은 트랙터로 농사짓는 사람들까지.

소피아는 한국의 중소도시 읍내 같은 분위기였다. 낡은 노면전차가 덜컹거리며 오가고, 사람들은 동구권에서 오래 살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웃음에 인색했다.

아카시와 함께 한 산책길에서 만난 불가리아의 성 니콜라스 정교회.
 아카시와 함께 한 산책길에서 만난 불가리아의 성 니콜라스 정교회.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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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지구를 떠돌고 싶다"던 사내를 만나다

소피아 근교엔 소비에트연방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공장이 창문이 깨지고 벽이 허물어진 채 방치돼 있었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이방인을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길로 묵묵히 바라봤고, 아이들은 동양인을 신기해하며 힐끗거렸다.

인터넷을 통해 얻은 정보로 저렴한 숙소를 찾아갔다. 머물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유럽인으로 추정되는 백인들이고, 동양인으로 보이는 건 나를 포함해 3~4명에 불과했다. 거기서 서른두 살 일본 사내 아카시를 만났다. "끊임없이 지구를 떠돌고 싶다"고 말하는.

소피아에 도착한 둘째 날 점심 무렵. 시내로 산책을 나가보니 중국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었다. 한국에서 먹던 탕수육과 자장면 생각이 나서 얼른 들어갔다. 거기 아카시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앉아있었다.

둘 다 혼자였기에 "합석하는 게 어떨까?"라고 먼저 제의했다. 흔쾌히 "그럽시다"라고 응수하는 아카시. 푸른 눈동자의 백인 주방장이 요리한 볶음밥과 중국식으로 양념한 돼지고기 튀김을 먹었다. 곁들인 불가리아 맥주의 풍미가 좋았다.

당시 아카시는 18개월째 혼자서 아시아와 유럽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일상의 삶을 이어가기도 지겨울 1년 반을 여행에 투자하다니...

일본에서 게이오대학을 다니다가 '아등바등 다녀 이 학교를 졸업해봐야 겨우 샐러리맨인데, 그렇게 인생을 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건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날로 학교를 그만뒀다고 했다.

그 이후에는 "잠시 일을 해서 돈이 좀 모이면 여행을 다니고, 돈이 떨어지면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 일자리를 찾는 과정을 반복해왔다"며 깔깔거리는 아카시. 내가 라오스에서 만난 또 다른 '여행자' 일본인 사내와 비슷했다. 그의 웃음에 거짓이 없어 보여 말의 진의도 의심되지 않았다. 뿐인가? 한없는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 같아 부럽기도 했다.

아마도 아카시는 지중해의 햇살처럼 화려하고 선명한 벽화를 그리며 모로코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아카시는 지중해의 햇살처럼 화려하고 선명한 벽화를 그리며 모로코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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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봄날의 햇살

아주 오래 알아온 사람처럼 죽이 맞은 우리는 낮술에 취해 한 나라의 수도답지 않게 고적하고 조용한 소피아를 함께 싸돌아 다녔다. 황금빛 지붕이 빛나는 성 니콜라스 정교회를 지나 면도날 같은 사회주의의 비례대칭이 그대로 드러나는 불가리아 국회의사당 앞에서 담배를 나눠 피웠고, 16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성 게오르기 교회에서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의 허망함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튿날. 노면전차를 타고 소피아 외곽으로 소풍을 떠난 두 사내는 이름 모를 새가 노래하는 조용한 공원에 앉아 서로의 첫사랑 이야기까지를 주고받았다. 그날도 오늘처럼 나른한 햇살이 나와 아카시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에겐 저마다 각기 다른 '삶의 이유'가 있다. 아카시 역시 그랬다. 그가 꿈꾸는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내가 태어난 별 지구를 끊임없이 떠돌고 싶다"고.

봄이 오니 잡상(雜想)이 비등한다. 아... 아카시. 그가 말했다. "짙푸른 지중해가 펼쳐진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벽화를 그리고 싶다"고. 아카시의 꿈은 지금쯤 이뤄졌을까? 문득 궁금하다. 더불어, 마흔일곱 살이 된 나는 어떤 꿈을 꾸면서 세상을 버텨내야 할지도 동시에 궁금해진다.


태그:#불가리아, #모로코, #벽화, #아카시,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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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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