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소환된 박근혜 전 대통령 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뇌물수수 등 혐의의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 검찰 소환된 박근혜 전 대통령 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뇌물수수 등 혐의의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 유성호


'피의자 박근혜'씨가 21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전 국민의 이목이 생중계 중인 TV 화면과 컴퓨터 모니터, 스마트폰 화면으로 쏠렸다. 준비한 듯한 "송구스럽다"는 내용의 29자 짜리 짧은 육성 소감을 내뱉은 박 전 대통령은 냉랭한 표정을 지은 채 청사 안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 영상은 전 세계로 타전됐다. 인근 중국과 일본은 물론 주요 외신들도 '피의자 박근혜'의 첫 검찰 출석을 긴급하게 다뤘다. 앞서 한국의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 당한 '대통령 박근혜' 탄핵 인용 소식 역시 20회까지 이어진 촛불집회와 함께 '글로벌 토픽' 감으로 앞 다퉈 소개된 바 있다.  

2017년 3월 21일, 인간 박근혜의 인생에 있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대통령 취임식과 같은 역사적인 순간 말이다.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물론 3번에 걸친 대국민사과 당시나 파면 후 삼성동 자택에서 지지자들을 맞이하던 순간에서도 감회는 누구보다 특별했을 것이다. 

바로 그때, 여하튼 그러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장면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로 송출되는 카메라 앞에 선 권력자는 어떤 심정일까. '피의자 박근혜'씨는 상상도 못할 극한 체험을 한 주인공을 소개코자 한다. '극한'이란 표현으로 부족할지 모른다. 아니, 극한이라기보다 지옥 체험이 훨씬 더 적당할 것 같다. 영드 <블랙 미러> 시즌1 첫 에피소드인 'The National Anthem' 속 영국 총리 마이클 캘로우의 경우를 보자. 

권력자에게 닥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에 대하여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1  'The National Anthem' 중 한 장면.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1 'The National Anthem' 중 한 장면. ⓒ 채널4


이른 새벽, 캘로우 총리가 침대 맡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뒤이어 그의 집무실. 보좌진들이 총리 뒤로 TV를 향해 섰다. 이들의 황망한 얼굴과 잠옷 차림으로 불려 나온 총리의 표정이 묘하게 대비를 이룬다. 총리는 무슨 국가 중대사길래 꼭두새벽부터 나를 깨웠는가 하는 얼굴이다.  

"수잔나 공주가 납치됐습니다."

'프린세스' 수잔나가 누구인가. 전 국민이 사랑해 마지않는, 심지어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당대 최고의 셀러브리티다. 화면 속 공주는 "나는 죽을 거다"라면서도 납치범들의 요구 사항에 대해서는 쉽게 말을 못 꺼낸다. 아니, 꺼이꺼이 오열이 터져 나와 말 자체를 삼켜 버린다. 인질범들의 요구 사항은 이랬다.

"오늘 오후 4시 전국 방송에 나와서, 어떠한 연출도 없이 돼지와 성행위를 해야 합니다."

오타가 아니다. 그 돼지 맞다. '돼지 같은', 아니다. 총리는 "이거 장난이지?"라고 묻고, 보좌진은 참담해 한다. 게다가, 이 영상은 이미 유튜브에 올랐다가 삭제됐고, 유력 미디어도 죄다 입수한 상태다. 전 국민이 이 사상 초유의 사태를 알게 됐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지만, 현실이다. 별 큰 잘못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이 영국 총리, 어떡해야 하나.

절대 직접 쓴 시놉시스가 아니다. <블랙 미러>는 2011년부터 영국의 유력 방송사인 채널4가 기획하고 방영한 SF 풍자 드라마 시리즈다. 맞다. 그 채널4다. 1, 2시즌 공히 3편씩 방영됐다. 2016년 공개된 시즌3부터는 미 OTT 서비스인 넷플릭스가 제작하고 공개한다.

감 좋은 넷플릭스가 판권을 사갔다는 사실에서 <블랙 미러>의 반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돼지'라니. 이런 불온한(?) 내용의 드라마를 지상파에서 방영하는 영국이라는 나라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 사뭇 궁금해지지 않는가. 그래서, 그 캘로우 총리는 어떻게 됐느냐고?

이 극악무도한 드라마에 넷플릭스가 열광한 이유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1 'The National Anthem' 의 한 장면.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1 'The National Anthem' 의 한 장면. ⓒ 채널4


언론이 난리다. 이걸 '수간'이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기자들끼리 의견이 분분하다. 트위터도, 유튜브도 떠들썩하다. 전 국민의 여론이 실시간으로 술렁술렁한다. 외신? 미국에서 중동까지 사방에서 취재로 법석이다. 총리의 향후 결정은 단숨에 영국 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의 초유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답답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지경이다. 죽겠는 건 총리 본인 아니겠는가. 아내가 "미친 놈의 소행일 거라고"고 다독여주지만, 그 아내의 표정이 애잔하기 그지없다. 그 누구의 위로도 들리지 않을 수밖에 없는 총리의 시간들이다. "당장 납치범을 잡아오라"고 보좌진을 닦달하지만, 쉬이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간신히 잡은 단서로 특공대가 출동하지만, 애꿎은 기자에게 총질을 해댔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 인질범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여론은 높아져만 간다.

플랜B도 마련은 했다. '포르노 영화' 배우를 총리의 대역으로 구하고, 얼굴을 화면에서 바꿀 영상 전문가도 구해 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극비였(으나 SNS를 통해 이 소식도 알려진)다. 차차 시간은 다가오고, 결국 총리는 먹이를 먹고 있는 돼지 옆으로 다가선다. 전 세계가 각자의 모니터와 화면 앞에 집중하고 있는 영국 시간으로 오후 4시, 약에 취한 공주가 사람 한 명 없는 거리에 풀려난다. 

그리하여 1년 뒤, 캘로우 총리는 아내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선다. 낙마도 하지 않았다. 지지율도 몇 퍼센트 올랐다. 공주 역시 반짝반짝 '셀럽'으로서의 삶을 영위 중이다. 자,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물론 총리로 대변되는 권력자의 책무가 어디까지인가, 또 그러한 책임감을 요구하는 대중의 수위는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까지 다다르는 건 각자의 몫이다.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1 'The National Anthem' 의 한 장면.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1 'The National Anthem' 의 한 장면. ⓒ 채널4


제작진이 이 '국가'라는 뜻의 'The National Anthem' 편을 통해 가리키는 것은 사실 단일하지도, 명확치도 않다. 2011년 공개 당시 보수당 캐머런 총리가 집권했던 영국의 상황을 딱히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특종을 캐려는 미디어의 속성이나 익명의 '짹짹이'들이 득실거리는 소셜미디어의 가벼움을 강하게 비판하지도 않는다.  

단 하나, 이러한 전 국민적인 이벤트가 지나간 뒤 남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허망함과 씁쓸함만이 드라마 전편을 지배한다. 이 미친 요구에 응하는 총리의 행위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표정이 딱 그러하다. 누구는 비아냥대고, 누구는 조롱하지만, 종국엔 참담함으로 얼룩진 집단적 패닉을 체험해야 한다. 비록 각자 한 마디씩 가볍게 내뱉었던 의견과 요구와는 달리 말이다. 더군다나, 인질범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존재가 아니었다.

이 드라마의 세계관이 좀 그렇다. 충격적인 사건을 던져 주고, 이를 마주하는 인간의 얼굴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자 한다. 물론 이 이야기를 통해 총리의 내면을 엿볼 순 없다. 다만, 권력자의 사상초유의 행위가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과정을 다이내믹하게 그린 충격적인 드라마로 기억될 만하다.

구태여 이 드라마를 소개한 건 21일 우리 국민들의 표정과 드라마 속 영국 국민들의 표정이 꽤나 닮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때문이었다. 처음엔 비난 섞인 조롱도 보내고, 그간 쌓여왔던 감정도 표출해 보지만, 결국 '대통령의 검찰 수사'라는 참담한 현실이 결코 유쾌하거나 통쾌할 순 없을 대다수 국민들의 표정과 감정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13가지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 박근혜'씨와 달리 캘로우 총리는 자신의 잘못이 '1g'도 없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겠다. 드라마 속 피해자는 국민이 아니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명백한 피해자라는 점 또한. 

때때로 이 <블랙 미러> 시리즈를 소개할 예정이다. '블랙 미러'란 뜻은 TV, 컴퓨터 모니터, 스마트폰 화면을 꺼버린 암전 상태의 화면을 지칭한다. 스마트폰처럼 과학 기술의 좀 더 발달한 근 미래가 대부분의 배경인데, 아이디어가 뛰어난 작품들이 대다수다. 굉장히 시니컬한 드라마인 것은 맞다. 그게 영국식 코드란다. 이 드라마, 열광하는 마니아가 적지 않다. 그 중 한 명임을 고백하는 바다. 취향이란 게, 참 속이기 힘든 법이다.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1 포스터.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1 포스터. ⓒ 채널4



블랙미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