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 잔잔하고 괜찮다고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산산이 부서지며 하늘을 수놓는 유성의 모습은 아름다웠고 시간을 초월해 소녀를 구해내는 소년의 모습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그려온 세계에 충분히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일본에서 개봉한 이후 흥행 신드롬을 불러온 <너의 이름은.>은 한국에서도 흥행을 이어나갔다. 일본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동일본 대지진'이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떠올리며 위로를 받듯 우리는 '세월호'의 기억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너의 이름은.> 흥행 속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너의 이름은.>의 여러 가지 요소가 '여성혐오'적이라는 것. 다른 시각으로 다시 들여다본 <너의 이름은.>은 과연 어땠을까.

남성중심적인 시선이 가득한 화면

 영화의 시작. 여주인공 마츠하가 자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카메라 앵글은 마츠하의 다리부터 몸을 훑으며 올라간다. 곧 잠에서 깬 마츠하. 그의 시선을 따라 노출된 가슴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 진다. 놀라며 자신의 가슴을 만지기 시작하는 그. 심지어는 몸을 확인하기 위해 속옷만을 남긴 채로 다 벗는다. 카메라 앵글은 다시 다리부터 상체까지 마츠하의 모습을 훑고 속옷과 마츠하의 벗은 몸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영화의 시작. 여주인공 마츠하가 자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카메라 앵글은 마츠하의 다리부터 몸을 훑으며 올라간다. 곧 잠에서 깬 마츠하. 그의 시선을 따라 노출된 가슴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 진다. 놀라며 자신의 가슴을 만지기 시작하는 그. 심지어는 몸을 확인하기 위해 속옷만을 남긴 채로 다 벗는다. 카메라 앵글은 다시 다리부터 상체까지 마츠하의 모습을 훑고 속옷과 마츠하의 벗은 몸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작품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자고 일어났더니 서로 몸이 바뀌어 있는 바람에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전반부의 주요 서사로 삼는다. 영화의 시작. 여주인공 미츠하가 자는 모습이 나온다. 카메라 앵글은 미츠하의 다리부터 몸을 훑으며 올라간다. 곧 잠에서 깬 미츠하. 그의 시선을 따라 노출된 가슴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놀라며 자신의 가슴을 만지기 시작하는 그. 심지어는 몸을 확인하기 위해 속옷만을 남긴 채로 다 벗는다. 카메라 앵글은 다시 다리부터 상체까지 미츠하의 모습을 훑고 속옷과 미츠하의 벗은 몸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잠에서 깨어나는 남주인공을 비추는 카메라 앵글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누워있는 모습을 정면으로 비춘다. 추가로 이어지는 노출 장면도 없다. 지금의 자신이 남자임을 알고 부끄러워하며 놀라는 모습만이 나올 뿐이다.

이어지는 장면. 타키는 미츠하의 몸으로 깨어날 때마다 가슴을 만진다. 이후, 자신의 가슴을 만진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항의하는 미츠하에게 타키는 미안하다는 말로 가볍게 넘어간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성의 강압적인 스킨십이 로맨스로 포장되어 보이는 것처럼 타키의 성추행은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인다.

논쟁이 되는 '여성혐오'가 어떤 뜻인지 짚고 넘어가보자. '여성혐오'는 단지 여성을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현상을 말하지 않는다. 원래 단어인 '미소지니(Misogyny)'는 여성을 동등한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차별 및 대상화하는 모든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즉, 여주인공(여주)의 몸을 훑는 것처럼 움직이는 카메라 앵글의 모습이나 상기된 얼굴로 여주의 가슴을 만지는 남주인공(남주)의 모습은 사춘기 소년이니까, 남자이니까 등의 이유로 넘어가기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말이다.

<너의 이름은.>에는 성차별적인 시선도 드러난다. 남주의 몸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가게 된 여주는 함께 일하는 선배의 치마를 수선해주게 된다. 이를 보고 선배는 "여자력 높구나?"라고 말한다. '여자력'이란 보통 요리나 가사 등을 잘하는 여자를 보며 사용하는 용어이다. 요리나 가사 등을 잘하면 '여자력'이 높고, 그렇지 않으면 '여자력'이 낮다는 식이다.

바느질을 잘하는 것이 여자의 역할인가. 바느질, 요리 등을 여자의 역할로,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버는 것을 남자의 역할로 규정하는 것은 결국 사회의 주축을 남자로 규정하고 부수적인 것을 여자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자력'의 반대되는 개념인 '남자력'의 경우도 남자의 역할을 강인하고 적극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일종의 맨박스이다. '여자력', '남자력' 등 남녀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 시선들 자체가 이미 남성을 '주'로 여성을 '부'로 구분하고 있다는 말이다.

<너의 이름은.>은 '여성혐오' 영화이다?

 어린이들이 쉽게 접하는 <도라에몽>만 해도 남주가 여주의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는 모습이나 여주의 치마를 들추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여성을 수동적이고 패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묘사하기도 한다.

어린이들이 쉽게 접하는 <도라에몽>만 해도 남주가 여주의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는 모습이나 여주의 치마를 들추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여성을 수동적이고 패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묘사하기도 한다. ⓒ tv아사히


그렇다면, <너의 이름은.>을 '여성혐오' 영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단순히 '여성혐오' 영화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화면의 연출 방법이나 캐릭터들의 말투, 태도 등이 논란거리가 되기는 했으나 <너의 이름은.>에 드러난 남성 중심적인 시선들은 우리가 지켜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드러나고 있는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 인물의 신체를 부각하여 잡는 카메라 앵글. 짧은 치마로 인해 자꾸만 노출되는 속옷은 <너의 이름은.>뿐만 아니라 다수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들이다. 속옷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이야기의 흐름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건만 얼마나 많은 작품에서 여자 캐릭터들은 자신의 속옷을 노출해 왔던가. 심지어 어린이들이 쉽게 접하는 <도라에몽>만 해도 남자 주인공이 여주의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는 모습이나 여주의 치마를 들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고정하는 차별적인 시선도 마찬가지다. 많은 작품에서 여자와 남자의 역할을 나누는 모습들이 등장한다. 여주는 쿠키나 케이크를 만들어 선물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남주는 운동을 즐기며 골목대장을 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도라에몽>에서는 운동장을 쟁취하기 위해 남자팀과 여자팀으로 나누어 야구 경기를 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여자 캐릭터들을 패션에만 관심을 가지고 행동에는 적극적이지 않은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문제만도 아니다. 연예인 아들의 생활을 지켜보는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서는 집을 치우지 않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저러니 여자가 필요하지", "여자가 있어야 해"라고 외친다. 한 남자 연예인은 방송에서 아내에게 영상편지를 보내며 "남자가 일하고 있으니 어서 집안일이나 해!"라고 호통을 치기도 한다.

'여성혐오' 논란, 그것이 시사하는 것

 <너의 이름은.>이 불러온 '여성혐오' 논란. 이 영화를 단순히 '여성혐오'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바라봐 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계기는 충분하다.

<너의 이름은.>이 불러온 '여성혐오' 논란. 이 영화를 단순히 '여성혐오'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바라봐 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계기는 충분하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여성혐오'적인 내용이 저변에 깔린 것은 단지 <너의 이름은.>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너의 이름은.>은 기존의 것들을 답습했음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된 것일까.

그것은 긍정적인 변화라고 본다. 여성의 신체를 남들의 눈요기를 위해 비추는 것이 잘못됐다는 점, 여성에게 자신의 애정을 강요하고 스킨십을 하는 것이 단순한 사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 등 그동안 그럴 수 있는 것처럼 넘겨 왔던 문제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 따라 넘어가서는 안 되는 문제가 된 것이다.

'쿠치카미자케(타액으로 빚은 술)'는 이 작품에서 남주인공 타키가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는 주요한 장치이다. '여고생 무녀'가 입으로 씹은 쌀을 뱉어 술을 만드는 장면도 있다. 일본 매체 TBS와의 인터뷰에서 '쿠치카미자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10대 남자아이의 페티시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신카이 모코토 감독. 비록 일본에 존재하는 문화 일부라고 해도, 이를 성적 페티시와 연결한 것은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왔을 문제였을 터다. 그렇기에 신카이 마코토 감독 또한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 같다. 다른 여자아이의 타액이 묻은 물건에 입을 갖다 대는 행동은 예전에는 사춘기니까, 남자니까 등으로 그럴 수 있는 것으로 넘겼던 문제였으니까.

<너의 이름은.>이 불러온 '여성혐오' 논란은 우리의 인식이 한층 발전하고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앞으로 작품을 만드는 많은 사람에게 한층 더 높은 인식 수준을 요구한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들, 내려놓을 수 없었던 차별적인 시선들은 이제 헤어질 때가 온 것은 아닐까? <너의 이름은.>이 불러온 '여성혐오' 논란. 이 영화를 단순히 '여성혐오'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논란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바라봐 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계기는 충분하다.

여성혐오 신카이 마코토 너의이름은 미소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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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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