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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정의>(박상규-박준영 저, 후마니타스 펴냄)
 <지연된 정의>(박상규-박준영 저, 후마니타스 펴냄)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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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는가?"

영화 <내부자들>(2015)의 주인공 안상구(이병헌 분)는 이렇게 되묻는다. 영화 <내부자들>이 700만 관객을 스크린 앞에 앉힌 비결은 안상구의 대사 속에 있다. 바로, '정의의 부재'다. 그의 말대로 정의, 그 달달한 것은 책이나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의의 부재는 여러 가지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재벌들은 서민들을 착취한 대가로 700조가 넘는 사내유보금을 취했다. 사회 기득권이 저지른 부패와 부정은 차고 넘친다. 응축된 부정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단죄할 책임이 있는 사법 체계마저도 정의를 저버린 지 오래다. 국민을 짓누르고, 민주주의를 억압한 독재자는 1심에서 사형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지만 2년 만에 특별사면을 받는다. 재벌 총수에게도 법은 관대하다. 형이 확정되자마자 사면 시기가 논의된다.

실망하기엔 이르다. 정의의 부재를 메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책 <지연된 정의>(후마니타스 펴냄)의 저자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다. 이들은 2년 동안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까지 세 개의 재심 사건을 통해 진실을 좇는다.

왜 법은 약자에게 더 가혹한가

재판 준비 중인 박준영 변호사
 재판 준비 중인 박준영 변호사
ⓒ 파산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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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 사건 강인구 : 사건 당시 18세. 중학교 중퇴. 지적장애 있음. 한글을 잘 쓸 줄 몰랐음. 7세 때 어머니 사망. 알코올의존증 아버지 역시 한국을 쓸 줄 몰랐음. 체포 당시 월세 10만 원짜리 집에서 아버지와 둘이 거주.

삼례 사건 최대열 : 사건 당시 19세. 중학교 졸업. 지적장애 있음. 한글을 잘 쓸 줄 몰랐음. 어머니는 하반신 마비 1급 장애인, 아버지는 척추 장애 5급 장애인. 모든 가족이 보증금 1백만 원, 월세 2만 원짜리 단칸방에 거주, 최대열이 건설 노동을 하며 부모를 부양.

삼례 사건 임명선 : 사건 당시 20세. 중학교 중퇴. 아버지 알코올의존증. 어머니는 임명선이 수감된 뒤 정신 질환을 앓기 시작. 당시 부모님의 전 재산은 5백만 원. 아버지는 임명선 수감 중 사망.

익산 사건 최성필 : 사건 당시 15세. 초등학교 졸업. 아버지 알코올의존증.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며 힘들게 생계유지.

완도 사건 김신혜 : 사건 당시 23세. 고등학교 졸업. 살해된 아버지는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한쪽 다리가 불편했음. 어머니는 이혼해 어렸을 때 집을 떠났음.

지연된 정의의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약했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경찰과 검찰은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능력함을 약자들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들은 불법 감금과 체포, 가혹 행위를 통해 약자들에게서 허위 자백을 받아냈고, 사건을 조작했다.

무기수 김신혜씨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우리 아버지가 장애인이 아니었어도, 그 사람들(경찰)이 우리 아버지 (시신을) 함부로 다뤘을까요? 우리 아버지가 서민이 아니라 재벌, 정치인이었어도 그렇게 함부로 했겠느냐고요."

그녀의 울부짖음이 영화 <내부자들>에 등장하는 안상구의 자조와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안상구와 김신혜 모두 정의를 경험하지 못한 약자들이기 때문일 거다. <지연된 정의>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출발한다.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하는 법은 왜 약자에게 더 가혹한가. 법은 약자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가. 이 책은 우리 안에 숨겨진 정의란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기자와 변호사는 이래야 한다

박준영 변호사(맨 왼쪽)과 박상규 기자(왼쪽에서 두 번째)
 박준영 변호사(맨 왼쪽)과 박상규 기자(왼쪽에서 두 번째)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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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지 않은 사람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의 진실은 17년 만에 드러났고,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의 가짜 범인은 16년 만에 억울함을 풀었다. 무기수 김신혜씨는 법원에서 재심 여부를 판단하는 중이다.

재심 판결을 끌어낸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감옥에서 보낸 허송세월은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처음부터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다. 정의를 수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했더라면 <지연된 정의>에 나오는 세 개의 사연은 없었을 것이다.

경찰이 제대로 수사를 했더라면, 검찰이 오판을 내리지 않았다면, 약자들을 위해 나서는 변호사가 있었다면, 진실을 밝히는 기자들이 있었다면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까? <지연된 정의>는 우리 사회에 어떤 기자와, 어떤 변호사가 필요한지 보여준다.

"변호사나 기자나, 그냥 보면 안 보이는 걸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줘야 해요."

박준영 변호사의 말이다. 이 말을 듣고 박상규 기자는 재심 프로젝트에 뛰어 들게 됐다. 나는 이 책이 기자와 변호사를 꿈꾸는 이들의 손에 들어가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지연된 정의>가 '정의, 그 달달한 것은 아직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박상규.박준영 지음, 후마니타스(2016)


태그:#지연된 정의, #박상규, #박준영, #삼례 사건, #김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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