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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법률구조공단 이사장 페이스북
 이헌 법률구조공단 이사장 페이스북
ⓒ 페이스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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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헌 법률구조공단 이사장 발언이 화제를 낳았다. "저는 겨울왕국 엘사를 생각합니다."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말문을 연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박 대통령의 입장에서 끔찍한 일에서 벗어나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장의 주어가 모호하고 (누가 누구의 입장에서?) 술어도 뒤죽박죽이지만, '박 대통령이 행복한 결말을 얻기 바란다'는 의미로 쓴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해도 문제는 남는다. 그가 말하는 "끔찍한 일"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수사를 받는다는 사실? 설마 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이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법의 기본 전제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변호사로 생활비를 벌었던 사람이니, 혐의자가 수사 받는 것을 '끔찍한 일'로 여기지는 않을 터이다.

그렇다면 직무정지? 탄핵이 가결된 다음날, <연합뉴스>는 대통령이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꼼꼼히 보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직무정지 이튿날인 10일 관저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조용히 일상을 보냈다. 전날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로 권한행사가 정지된 박 대통령은 별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독서를 하면서 차분하게 앞으로의 행보를 구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를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뭐, 별로 달라진 것 없잖아?'였다. 잘 알려져 있듯, 박 대통령은 직무정지 이전에도 잘 출근하지 않았고, 관저에서 '별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여러 날을 '조용히' 보내곤 했었다. 듣자하니, 직무가 정지된 후에도 미용사까지 청와대로 정상 출근하고 있다 한다.

기사를 읽고 나니, 본문과 충돌하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본문은 봄볕에서 조는 고양이를 관찰하는 톤으로 쓰여졌으나, 제목만은 독자에게 달려들어 눈을 할퀴는 듯했다.

"박대통령 '피눈물난다는 말 알겠다'… 관저칩거 '정치적 연금'"

도대체 무엇이 대통령의 피눈물을 자아냈을까? 기사만으로는 뚜렷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다시 꼼꼼히 읽어보니 '독서를 하면서'가 나온다.

설마 아무리 책 읽기를 싫어도 '피눈물'까지? 그럴 리는 없으니, 다른 이유가 있을 터이다. 출근 안 하던 사람이, 출근 안 해도 된다고 하니 갑자기 출근이 하고 싶어진 것일까?

대통령이 피눈물을 흘린 이유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1월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뒤 굳은 표정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1월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뒤 굳은 표정을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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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보도를 보면, 박 대통령은 오히려 최근 들어 청와대 참모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궁금한 사항을 캐묻기도하고, 그렇게 싫어하던 '대면보고'까지 받으며 '현안'을 적극 '챙기고' 있다 한다. 직무정지가 되고 나서야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면, 탄핵을 2-3년 당겨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을 정도다.

대통령이 피눈물을 흘린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본인이 스스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사과 당시에 했던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라는 발언 말이다. 

대통령을 세우는 주체는 대통령 자신이 아니라 국민이다. 대통령은 '하는' 자리가 아니라 '뽑히는' 자리라는 말이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택될 수도 있고, 쫓겨날 수도 있는 자리다. 이 당연한 사실을 무시하면 '스스로 권력을 갖는 자' 즉, '독재자'가 된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라는 표현은 스스로 '하는' 자리라는 판단을 드러낸다. 대통령직이 국민의 의지에 따라 채워지고 비워지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런 착각이 '버티는 힘'의 든든한 밑천이 된다.

그는 국민의 마음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자신이 버틸수록 국민의 피해가 커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상관 없다. '내 자리'를 내가 유지하겠다는데, '남들'이 왜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

대통령이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라고 믿지는 않지만, 이제 자신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설사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한다 해도, 그가 되찾을 것이라고는 껍질만 남은 대통령직 뿐이다. 사라진 국민들의 신뢰가 헌재 판결로 되살아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은 헌재 판결이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이냐 '화려한 복귀'냐를 결정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탄핵심판은 대통령의 '파면'이냐 '빈 껍질뿐인 복귀'냐를 결정하게 되며, 결과는 당연히 '파면'이다.  

대통령이 탄핵으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게 아니라, 민심을 잃은 결과로 탄핵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 민심을 잃었는가? 국민을 배신한 채 무능, 실정, 부패를 되풀이했기 때문이고, 이는 법률적 판단으로 '기각'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존심도 포기한 강박적 권력 집착

지난 1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탄핵심판소추위원단·대리인단 첫 회의에서 공개된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 탄핵심판 답변서 요지.
 지난 1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탄핵심판소추위원단·대리인단 첫 회의에서 공개된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 탄핵심판 답변서 요지.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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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시간끌기를 '명예회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통령이 헌재에 제출한 답변서를 보면, 최소한의 체면과 자존심도 내던졌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이미 세 번에 걸쳐 사과까지 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는 최순실을 '키친 캐비닛(부엌 내각)'이라는 영어표현으로 부르며, 일상적인 국정수행 절차였다고 강변한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식견도 없는 사람이 사적 인연 하나만으로 대통령과 권력을 나눠가졌다면 그게 '비선실세'고, 공식적 직함도 없는 사람이 공식 내각을 휘둘러댔다면, 그게 '국정농단'이다. 

'부엌 내각'이라는 표현을 쓰려면, 최소한 부엌이라는 비공식적 공간과 독립된 집무실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는 '부엌'이라는 비공식적 공간이 집무실을 대신했다. 이곳에서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고, 정부 인사를 뽑거나 해고했고, 경제, 문화, 교육 정책의 틀을 짰고, 대통령 의상을 결정하고, 대통령이 맞을 주사약까지 골랐다는 폭로가 나왔으니 이건 '주방'이 아니라 '사령탑'이다.   

굳이 '부엌 내각'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최순실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에게 써야 한다. 대통령이 '권력 서열 1위' 최순실에게 조력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에게 의존한 것이 국정의 1% 미만이었다고 주장하지만, 365일중 3일만 죄를 저지른다고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박 대통령은 답변서에서 '형평성'도 따졌다. "대통령 등 최고권력자의 친인척 지인들이 최고권력자의 권위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여 왔던 사례는 역사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오직 자신만이 이 문제로 탄핵 당했으니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경찰이 음주운전이나 과속위반 딱지를 떼기도 어려워진다. 단속 경찰이 위반자를 몽땅 다 잡아들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억울하다면, 다른 위반자를 신고하면 된다. 

대통령 한 명의 끔찍한 일 vs. 국민 대다수가 끔찍하게 여기는 일 

17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즉각퇴진 공범처벌, 적폐청산의 날 - 8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박근혜 탄핵’ ‘박근혜 구속’을 촉구하고 있다.
▲ 박근혜 즉각퇴진 8번째 촛불집회 17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즉각퇴진 공범처벌, 적폐청산의 날 - 8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박근혜 탄핵’ ‘박근혜 구속’을 촉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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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법률공단 이사장은 <겨울왕국>의 엘사가 얼음궁전으로 돌아가는 게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영화를 제대로 봤는지 모르나, 주인공은 얼음궁을 버리고 사람들 속으로 되돌아간다. "다시는 성문을 닫지 않겠다"는 약속이 결말의 핵심인데, 이걸 놓친 모양이다.

이헌 이사장과 달리, 대부분의 국민은 대통령이 청와대라는 '얼음궁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끔찍한 일"로 여긴다. 그래서 대통령을 탄핵한 것이다. 대통령 한 명의 끔찍한 일과 국민 대다수가 '끔찍하게 여기는 일 가운데 어떤 게 더 큰 무게를 갖는다고 생각하는가? 

게다가 청와대 복귀는 대통령에게도 '해피엔딩'일 수 없다. 밥 하나도 남과 먹기 힘들어하고, 참모의 대면보고 받기조차 고통스러워하고, 머리 올리고 화장 하기 전까지는 비상사태에도 국민 앞에 서기 곤혹스러워하는 사람이다. 이런 그를 과거의 자리로 되돌려보내는 게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가? 제 역량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 만큼 불행한 일은 없고,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헌 이사장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공무원은 상관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그 한심한 글을 페이스북에, 그것도 근무 시간에 쓰는 것을 보면, 자신의 월급이 국민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태그:#이헌, #탄핵, #답변서, #키친 캐비닛, #최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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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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