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신파만 있다면 나는 신파의 수조에 빠져 살겠다.

이런 신파만 있다면 나는 신파의 수조에 빠져 살겠다. ⓒ NEW


헤시오도스가 쓴 <신통기>와 <노동과 나날>에는 너무나 자주 회자하는 나머지 전혀 나이를 먹지 않는 듯한 이야기 하나가 실려 있다. 올림포스 신들로부터 갖은 선물을 받고 태어난 최초의 여성, 판도라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신화 속에서 판도라는 온갖 재앙이 담긴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 이 세상에 질병과 재난, 불행과 같은 해악들을 풀어놓는 장본인이다. 기독교의 하와가 그렇듯 그리스 신화 속 세상에서도 인간의 재앙은 한 여성 판도라의 경박한 호기심에서 비롯됐으니 여성에 대한 오랜 무시를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좀 더 멀리서 바라보면 보다 큰 줄기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티탄족 프로메테우스와 그를 벌한 제우스의 이야기다. 감히 불을 통해 문명을 일군 인간들을 보고 분개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거대한 바위산에 묶어 매일 독수리가 간을 뜯어먹도록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차두리처럼 매일 재생되는데 그의 고통은 헤라클레스가 등장하기까지 무려 3000년이나 반복된다.

좀생이 제우스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불을 얻어 오만방자해진 인간을 벌하려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니, 그게 바로 판도라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한 에피메테우스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과거 에피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함께 수많은 피조물을 만들었는데 그때 온갖 해로운 것을 봉인해둔 항아리 하나를 집에 보관해두고 있었다.

신들로부터 수많은 선물과 함께 호기심까지 받은 판도라가 이 항아리를 가만둘 턱이 없었다. 판도라가 뚜껑을 열자 항아리에 든 온갖 해로운 것들이 일시에 빠져나와 세상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판도라는 황급히 뚜껑을 닫았지만 이미 온갖 불행의 단초들이 빠져나온 뒤였다. 항아리 바닥에 깔린 희망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판도라는 결국 희망까지 풀어주고 세상 사람들은 온갖 재난에도 한 줄기 희망을 붙들고 삶을 이어가게 됐다는 게 이 오래된 이야기의 결론이다.

재난영화에서 찾게 되는 우리의 현실

 위기의 순간에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위기의 순간에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 NEW


지난 7일 개봉해 개봉 2주 만에 300만 관객을 훌쩍 넘긴 <판도라>가 화제다. 진도 6.1의 강진으로 원자력발전소에 이상이 생기고, 정부 당국이 재난관리에 실패하며 한국사회 전체가 혼란에 휩싸인다는 내용이다. 수년 전 완성된 시나리오라곤 믿기 힘들 만큼 한국사회의 오늘과 닮아 있는 이 영화에 판도라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영화는 동남권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원전폭발이란 거대한 재난이 예고된 이 마을은 영화 가운데 정확한 지명이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는데 아마도 지역 이미지 훼손과 같은 이유 때문인 듯하다. 하긴 실제 부산과 울산, 경주, 울진, 영광에 있는 원전도 고리, 월성, 신월성, 신고리, 한빛, 한울 같은 덜 유명한 이름을 앞에 달고 있는데 영화가 직접 이들 지명을 거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다.

주민 대다수가 원전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이 마을에 주인공 재혁(김남길 분)이 산다. 재혁의 아버지와 형은 원전에서 일하다 안전사고로 사망했는데 그 아들이며 동생인 재혁이 다시 원전에서 일할 수밖에 없을 만큼 이 마을에서 다른 방식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무거운 삶의 굴레를 등허리에 지고 무채색의 삭막한 공간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재혁은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러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대 선택을 내린다.

영화는 지난 몇 년간 한국사회 최대의 이슈들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보인다. 부실한 원전관리와 수명이 다한 원전의 졸속 재가동 결정 같은 직접적인 부분뿐 아니라 청와대 비선의 존재, 위기상황에서 정보를 차단해 문제를 키우는 정부, 심지어는 역대급 지진 발생까지 한국사회를 뒤흔든 문제가 여럿 녹아 있다.

무엇보다 국가적인 재난사태 가운데 공권력이 부재하고 끝내 시민들이 서로를 직접 구한다는 큰 줄기가 세월호 침몰참사 당시 바닷속으로 뛰어들던 민간잠수사들을, 매주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백만 촛불들을 떠올리게끔 한다.

대책? 그런 거 없습니다

 반드시 기억돼야만 하는 사람들이, 그러나 잊혀져 가는 사람들이 우리 곁엔 너무나 많다.

반드시 기억돼야만 하는 사람들이, 그러나 잊혀져 가는 사람들이 우리 곁엔 너무나 많다. ⓒ NEW


<판도라>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부실을 백일하에 드러낸다. 극 중 국무총리(이경영 분)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 나라가 겨우 이것밖에 안 돼?" 하는 물음이 뼈아프게 느껴질 만큼 허술한 시스템이 전면에 드러난다. 국가적 재난사태를 예비하는 대비책이 전무하고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저 제 몸 사리기에만 급급하다. 당연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재난 상황에 대비한 대책이 있지 않으냐는 대통령의 물음에 안보수석이 "그런 건 없습니다"라고 답하는 장면은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시스템의 붕괴를 더욱 가속하는 건 책임 있는 자들의 무책임한 행태다. 영화는 끝까지 발전소를 책임지는 해임된 발전소장(정진영 분)과 도망가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환자들 곁에 남기를 선택한 간호사(오예설 분)를 제외하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책임 있는 자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출동한 소방관은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고 경찰과 군대는 아예 현장을 버리고 도망친다. 심지어는 대통령조차 재난대책본부를 총리에게 맡기고 집무실에 틀어박히니 누구 하나 나서서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곳에서 책임은 가장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떠넘겨진다. 상처 입은 시민이 서로를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꺼뜨려 가며 가족을 살린다. 그러니 재혁이 "사고는 즈그들이 쳐놓고 또 국민들 보고 수습하란다"며 성을 내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누구도 나서지 않는 재앙의 한가운데로 재혁과 동료들이 들어가는 순간, TV에선 발전소 외주업체 직원들이 발전소로 들어가고 있다는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렇다면 재혁은 누구를 위해 목숨을 버렸는가. 재혁이 결코 살아나올 수 없는 그곳으로 들어간 이유가 오직 밖에 있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점은 몹시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로부터 재혁이 발전소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를, 그리고 현실 가운데 그 이유가 처해 있는 위태로움을 보지 못한다면 관객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나 진배없다.

재혁이 폭탄을 지고 발전소로 향한 이유는

 테르모필레 협곡을 사수하는 스파르타 전사들. 그 선두엔 왕 레오니다스가 섰다.

테르모필레 협곡을 사수하는 스파르타 전사들. 그 선두엔 왕 레오니다스가 섰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영화 <300>을 꺼내보자. 잭 스나이더의 너무나 유명한 이 영화는 스파르타의 300 결사대가 페르시아 대군을 저지하기 위해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벌인 싸움을 배경으로 한다. 300명의 용사로 하여금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는 협곡으로 기꺼이 나아갈 수 있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물론 <판도라>의 재혁처럼 <300>의 전사들 상당수에겐 뒤에 남은 가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을까. 스파르타의 전사들에겐 가족뿐 아니라 스파르타인이라는 자긍심과 전사의 자존심, 동료와 시민들에 대한 연대가 있다. 영화 속 300명의 전사에겐, 심지어 그 자신이 고아라 할지라도, 기꺼이 테르모필레 협곡으로 향하겠다는 기개가 넘쳐흘렀다. 과연 "디스 이즈 스파르타"다.

재혁은 어떤가. 재혁에게 한국은, 마을은, 국민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발전소 외주업체 직원으로의 자긍심과 책임감은 차마 묻기조차 민망하다. 그를 발전소 안으로 떠민 건 오직 어머니와 여자친구, 형수와 조카가 멀리 도망치지 못했다는 사실, 단 하나뿐이었다. 어디 재혁만인가. 과연 당신은 재혁과 얼마나 다른가. "디스 이즈 헬조선"이란 외침이 어디선가 들리는 듯도 하다.

재혁과 동료들이 발전소 안으로 들어서는 장면이 마치 한 편의 묵시록처럼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해체되는 가족과 무너지는 연대, 오래된 가치들이 힘을 잃고 삶 전체가 물화 되어 가는 세상 가운데 재혁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이 나라 고위 공직자와 그 자제들 가운데 병역을 마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면 조금 수월하게 답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살리고 싶은 사람마저 아무도 남지 않은 세상을 가정해보자. 그곳에서 재혁의 폭탄이 어떻게 쓰이게 될지를 상상해보자. 그 끔찍한 풍경은 정말이지 그리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신화 속 판도라는 세상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재앙을 풀어놓았다. 그런데도 지금껏 사람들이 살아올 수 있었던 건 항아리 안에서 마지막으로 풀려난 희망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영화 <판도라> 가운데 감독이 심어둔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답은 명백하다. 피로 맺어지지 않은 고부, 그들의 연대가 무너졌다 회복되는 과정을 통해 감독은 영화 안에 미약한 희망 하나를 심어두고자 했다. 먼저 아는 자 프로메테우스의 경고도, 늦게 아는 자 에피메테우스의 후회도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는 현실 가운데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연대의 회복에 있다고 목놓아 말하고 있다.

<판도라>가 그저 원자력발전소가 폭파되는 재난영화로 여겨져선 안 되는 이유다.

 감독이 영화 가운데 심어 놓은 희망은 바로 이 장면뿐인지도 모른다.

감독이 영화 가운데 심어 놓은 희망은 바로 이 장면뿐인지도 모른다. ⓒ NEW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판도라 NEW 박정우 문정희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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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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