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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우스가 로마의 성공요인을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세 요소를 혼합한 혼합정체로 보았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1월 23일 서울 광화문 광장과 일대 도로에서 열린 4차 촛불집회.
 11월 23일 서울 광화문 광장과 일대 도로에서 열린 4차 촛불집회.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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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선출직 엘리트 사이의 간극, 과연 국회가 민의를 대변할 수 있을까

지난 12월 3일 토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광화문 광장에 갔다.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 이후 주판알 튕기며 흔들리는 정치판을 보면서 이러다가 87년의 어리석음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생겨났다.

그 불안감이 아내와 나를 광화문 광장으로 내몬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 가보니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들고 있었다. 역사의 현장에 동참한다는 벅찬 감동과 함께 거대한 촛불의 바다에 합류하여 '박근혜 퇴진', '새누리당 해체'를 외치면서 청와대를 향해 행진했다.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로 뜨겁게 분출되고 있는 촛불민심은 박근혜 퇴진, 새누리당 해체 수준을 넘어 특권과 부패로 얼룩진 구체제를 타파하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국회는 그러한 촛불민심을 제대로 담아낼 능력도 의지도 없다. 새누리당은 국정농단의 공범이고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정치적 셈법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국회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도 한몫하고 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은 "의회는 사회 전체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회는 각계각층의 국민 의사를 골고루 대변하는 대의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회는 일반 국민과 선출직 엘리트 사이의 간극이 커서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

따라서 사회 전체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여 촛불민심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이 절실하다. 그 중 하나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 '추첨제 민회'다. 추첨제 민회란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의 대표자로 구성되는 의회를 말한다.

시민의 대표자를 추첨으로 뽑는다는 발상은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하다. 대표자의 선출을 운이나 재수에 맡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고 심지어는 민주주의를 희화화한다는 생각까지 든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표자는 선거로 선출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우리 머릿속에 확고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공직자 대부분을 선거가 아닌 추첨으로 선발한 고대 그리스인들

고대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를 특별한 엘리트의 지배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지배로, 그리고 누구나 동일하게 통치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정치체제로 이해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를 특별한 엘리트의 지배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지배로, 그리고 누구나 동일하게 통치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정치체제로 이해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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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공직자 대부분을 선거가 아닌 추첨으로 선발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를 특별한 엘리트의 지배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지배로, 그리고 누구나 동일하게 통치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정치체제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근대의 탁월한 사상가 몽테스키외와 루소도 같은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표자 선발방법으로는 선거제와 추첨제가 있다고 하면서 선거가 귀족적이라면 추첨은 민주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의민주주의가 확립된 이후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으로 추앙받으면서 추첨제는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버렸다. 이처럼 추첨제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시민혁명 엘리트들의 평등주의에 대한 우려였다.

추첨제는 엘리트 위주의 선발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엘리트의 권력 장악 및 재생산을 어렵게 만드는 반면 선거제는 재산, 지위, 명성 등에서 유리한 엘리트 위주의 선발이 가능했다. 이에 시민혁명의 엘리트들은 입으로는 만민 평등을 부르짖으면서도 추첨제를 철저하게 외면했고 선거제를 대표자 선출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방식으로 굳혀 놓았다.  

그럼에도 추첨제는 선거제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이지문은 자신의 저서 <추첨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에서 자유, 평등, 대표성, 통합, 공공선, 합리성, 시민 덕성 등 7가지 점에서 선거제와 비교해 볼 때 추첨제는 다음과 같은 강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자유의 면을 보면, 추첨제는 대표자를 선택하는데 그치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자기통치의 적극적 자유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선거보다 자유를 증진시킨다.

둘째, 평등의 면을 보면, 피선거권의 평등이라는 형식상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선택될 기회의 실질적 평등 및 배분의 정의 확립이라는 면에서 선거보다 더 평등에 기여한다.

셋째, 대표성의 면을 보면, 특정 사회계층의 과다 또는 과소대표가 아니라 다양한 국민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기술적 대표성 확립을 통한 실질적ㆍ상징적 대표성을 제고함으로써 선거보다 더 대표성을 제고한다.

넷째, 통합의 면을 보면, 선거 부정 및 연고주의 조장과 정치부패로 인한 정치 불신이 사라지고, 선거가 조정하는 분열과 정치부패가 현저히 적어진다는 점에서 사회통합을 가져온다.

다섯째, 공공선의 면을 보면, 정당ㆍ지역구ㆍ이익단체의 영향력과 함께 다양성 및 일반 시민의 입장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공공선 추구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판단과 다양한 대표들의 의회 진입에 따르는 집단지성 발현으로 공공선 추구에 적합하다.

여섯째, 합리성의 면을 보면, 투표자의 비합리적 투표행태 및 선거제도의 유권자 선호 집약 실패, 막대한 선거관리 비용 대신 과학적 사회통계기법으로 사회 전체를 의회에 반영할 수 있으며 선거 제반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 면에서의 합리성에 부합한다.

끝으로 시민덕성의 면에서 보면, 정치 참여가 투표참여로 한정되지 않고 직접 참여할 기회를 통한 인간 발달 차원에서 민주적 시민 덕성의 발달을 촉진한다.

선거로 뽑힌 '국회', 추첨으로 선출된 '민회'가 경쟁한다면?

아테네에서 평의회는 시민자격이 있는 30세 이상의 지원자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평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아테네에서 평의회는 시민자격이 있는 30세 이상의 지원자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평의원으로 구성되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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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가 로마의 성공요인을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세 요소를 혼합한 혼합정체로 보았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집정관은 군주정의 요소이고, 원로원은 귀족정의 요소이며, 민중의회는 민주정의 요소인데 이 세 요소 간의 견제와 균형이 로마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몽테스키외와 루소가 선거제는 민주정보다 귀족정에 더 어울리고 추첨제를 민주정에 맞는 제도로 말했다는 것은 앞서 본 바와 같다. 폴리비오스, 몽테스키외, 루소의 말을 종합하여 우리나라의 정치체제를 보면 대통령은 군주정의 요소이고, 국회는 귀족정의 요소인 반면 민주정의 요소는 아직 제도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민주정의 요소로 추첨제 민회를 제도화하여 대통령, 국회, 민회의 세 요소를 혼합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와 추첨으로 선출된 민회의원으로 구성되는 '민회'의 양원제 국가가 될 것이다.

그 경우 국회도 민회와 경쟁하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국민의 이익을 잘 대변하게 되지 않을까?

이러한 추첨제 민회 아이디어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500인 평의회(boule)에서 착안한 것이다. 아테네의 경우 최고의사결정기관은 민회(ekklesia)였으나 민회의 정족수는 6000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자체 안건을 준비하고 법안을 기초하거나 새로운 정치적 제안을 접수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컸다.

따라서 일종의 시민대표단이라고 할 수 있는 평의회가 구성되어 민회의 집행위원회 내지 운영위원회 역할을 담당했다. 평의회는 시민자격이 있는 30세 이상의 지원자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평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아테네에는 거주지를 기준으로 구분된 10개 부족이 있었는데 각 부족에서 50명씩 선발했으므로 평의원은 모두 500명이었다. 평의원의 임기는 1년이고 연임할 수 없었다. 평의회는 10개의 위원회로 구분되어 각 위원회는 순차로 1년 임기의 10분의 1씩의 기간 동안 업무를 수행했다.

평의회는 민회의 의제를 준비하고 결정사항을 실행하며 외교사절 접견 등 외교업무도 담당하는 등 아테네의 가장 중요한 통치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추첨제 민회는 지역대표 1800명과 직능대표 1800명으로 구성

추첨제 민회의 구성을 보면, 추첨제 민회는 3600명(지역대표 1800명, 직능대표 1800명)의 민회의원으로 구성한다. 이들과 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국회'와 함께 양원제 국가가 될 것이다.
 추첨제 민회의 구성을 보면, 추첨제 민회는 3600명(지역대표 1800명, 직능대표 1800명)의 민회의원으로 구성한다. 이들과 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국회'와 함께 양원제 국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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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아테네의 500인 평의회를 현대적 상황에 맞게 창조적으로 재구성한다면 사회 전체를 정확하게 반영하여 촛불민심을 확실히 담아내는 추첨제 민회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경우 추첨제 민회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떤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추첨제 민회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추첨제 민회의 구성을 보면, 추첨제 민회는 3600명(지역대표 1800명, 직능대표 1800명)의 민회의원으로 구성한다. 지역대표는 인구 비례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을 10개의 지역(서울, 경기, 강원, 충남, 충북, 경북, 경남, 전남, 전북, 제주)으로 구분하여 각 지역마다 180명씩 합계 1800명을 선발한다.

직능대표는 국회의 상임위원회 분류를 감안한 15개 직능(법제사법, 정무, 기획재정, 과학방송통신, 교육문화체육, 외교통일, 국방, 안전행정,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 산업통상자원, 보건복지, 환경노동, 국토교통)으로 분류하여 각 직능에서 120명씩 합계 1800명을 선발한다.

둘째, 민회의원을 보면, 민회의원은 25세 이상의 피선거권이 있는 자원자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한다. 민회의원의 임기는 1년으로 하고, 임기 동안은 당적을 갖지 않는다. 민회의원은 12명이 한 조를 이루고 1년 임기를 12회로 구분하여 300명씩 한 달간 업무를 본다.

이렇게 되면 한 조 12명 중에서 매달 1명이 업무를 보고, 나머지 11명은 다음 순번은 기다리면 된다. 이 경우 업무를 보지 않는 나머지 11명의 민회의원은 업무담당 민회의원의 자문 등의 역할을 한다. 민회의원은 업무 담당 시 약간의 수당을 받는다.

셋째, 추첨제 민회의 권한과 기능으로는 입법 발의 및 재의요구, 정부와 국회 통제, 헌법시민교육 등을 들 수 있다. 즉, 추첨제 민회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의 재의 요구를 할 수 있으며, 국민참여예산제 시행 및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 등으로 정부와 국회를 감시ㆍ통제하고, 국민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헌법시민교육을 실시하는 등의 권한과 기능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추첨제 민회 구상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절차를 거쳐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사실상의 추첨제 민회를 구성하여 운영하는 것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뜻 있는 사람들 위주로 추첨제 민회를 사실상 구성하여 운영하다 보면 여러 가지 미비점이 나올 것이다. 그러한 미비점을 보완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담아 헌법상으로 제도화한다면 금상첨화가 되지 않을까?

추첨제 민회 구상은 어쩌면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발칙한 상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발칙한 상상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태그:#국정농단, #추첨민주주의, #추첨제, #국회, #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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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입니다. 헌법가치가 온전히 구현되는 세상을 꿈꿉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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