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장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장면 ⓒ 영화사 진진


무언가 결핍된(또는 부족한) 누군가를 돕는 건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당장 배고픈 이에게 빵을 주고 가난한 이에게 돈을 줄 수 있겠지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바로 도움받는 이의 '자존심' 문제다. 도움을 주는 이와 받는 이가 강자와 약자로 구분되는 순간, 그 도움은 더 이상 도움이 아닌 '값싼 동정'이 된다. 때문에 복지는 인간을 향한 애정과 신뢰가 전제된 '투자'여야 한다. '나의 도움을 받는 대신 너는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널 도울 테니 아무 걱정 말고 너의 꿈을 펼쳐라'라는 태도 말이다. 복지 문제를 단순히 수치적 효율로써 바라보는 시각은 그래서 잔인하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복지 시스템이 갖춘 모순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질병과 실업, 주거, 육아, 교육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차원에서 복지 사각지대에 위치한 두 주인공을 통해서다. 영화는 오랫동안 목공 일을 해온 중년 남성 다니엘(데이브 존스 분)이 심장병으로 갑작스레 실직하고,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 찾은 복지 기관에서 역시 실업자인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 분)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장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장면 ⓒ 영화사 진진


심장병으로 일을 그만둔 다니엘이 좀처럼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영화 초반부는 행정 당국의 빈틈을 코믹하면서도 아프게 꼬집는다. 고용지원 수당을 받고자 센터를 찾은 그를 두고 획일화된 절차만을 강요하며 몰아세우는 공무원들의 태도는 특히 그렇다. 심장병을 앓는 다니엘에게 단순히 운동 능력과 정신적 상태만을 점검한 뒤 그를 '노동 가능자'로 분류하는 당국의 처우는 합리의 탈을 쓴 비합리적 관료주의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다. 판정에 불복한 다니엘이 ARS 콜센터로 전화해 한 시간이 넘도록 상담을 기다리고, '컴맹'임에도 "인터넷을 통해서만 수당 신청이 가능하다"는 방침 때문에 모니터와 씨름하는 등의 장면들에서는 웃음과 더불어 씁쓸한 뒷맛이 느껴진다.

이런저런 한계에도 굴하지 않는 다니엘의 '오기'를 블랙코미디 특유의 희화성으로 담아내던 영화는 케이티의 등장과 더불어 현실의 차가운 벽을 본격적으로 조명한다. 홀로 두 아이를 데리고 뉴캐슬에 정착한 케이티의 경제적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고, 그에게 주어져야 할 복지 혜택 역시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볼 뿐이다. 그가 '상담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고용 지원 상담을 거부당하고 센터에서 내쫓긴 뒤 끼니조차 챙기지 못하는 상태에서 겪는 에피소드들은 '복지 사각지대'의 실상을 뼈아프게 고발한다. 특히 케이트가 빈민 구호소에서 이성을 잃은 채 통조림 음식을 게걸스레 먹는 장면, 슈퍼마켓에서 남몰래 생리대를 훔치다 발각되는 장면 등은 여성이 지닌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짓밟는 잔혹한 현실로 폐부를 찌른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장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장면 ⓒ 영화사 진진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해 온 켄 로치 감독 작품이다. 공기업 민영화를 반대하고 이안 던컨(전 고용연금장관, EU 탈퇴 운동을 주도했다.)과 보수당을 비난하는 극중 다니엘의 대사가 지나가는 말로만 여겨지지 않는 이유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라고, "우리에게도 잠시 기대어 쉴 바람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결코 남의 나라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결코 약자에게 관대하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의 냉정함은 잔인할 정도지만, 그래도 영화는 끝내 희망 한 움큼을 남겨둔다. 제 앞가림 조차 쉽지 않은 이들이 서로 돌아보고, 보듬고, 가진 것을 나눈다. 대단한 걸 해주지 못할지언정 상대방의 일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기뻐하며 또한 응원한다. 다니엘과 케이티를 통해 보여지는 약자의 연대에서 '국가'라는 이름의 시스템보다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오는 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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